[둘이서] 김사월X이훤 – 마지막 편지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이 서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글ㆍ사진 김사월, 이훤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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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자의 자유 


이번 주 산책 1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패터슨>의 빔 벤더스 버전 같았고 그래서 좋았다. 마지막 장면에 니나 시몬의 ‘필링 굿’이 중요한 노래로 쓰이는데, 그 쓰임이 약간 전형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영화관에서 나오는데 배가 고팠고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다. 한동안 나는 돈을 막 썼다. 돈도 없으면서 돈으로 뭐든 해결했다. 돈을 다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돈을 벌게 되면 생기는 흔한 일이다. 샌드위치가 먹고 싶으면 좋은 식당에 가서 만 원이 훌쩍 넘게 되는 비건 샌드위치를 먹었다. 요즘은 다시 돈 아끼는 방법을 찾는다. 애초에 나에게 그 정도의 사치가 필요했었나? 싶은 것이다. 편의점에서 3천 원이 안 되는 샌드위치를 샀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게 논비건이다. 계란만 들어 있는 것으로 샀다. (채식을 5~6년 하다 보니 이제는 고기나 햄 같은 질감이 잘 씹히지 않는다.) 죄책감을 가지고 흰 우유도 샀다. 내 의지로 우유를 먹는 건 진짜 몇 년 만인 것 같다. (영화에 나온다고 이것까지 굳이 따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정동길의 아무 계단에 앉아서 하교하는 학생들과 그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엿들었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따릉이를 탔다.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갈까 봐 가지고 있던 셔츠를 허리에 묶어 긴 치마처럼 만들고 자전거를 탔다. 무덥고 평화로운 거리를 쌩쌩 달렸다. 영화에 ‘고모레비(木漏れ日)’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고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라는 문구. 신호 대기 중인 도로의 자전거에 앉아 가만히 고모레비를 바라보았다.

사월

 

 

이번 주 산책 2

엊그제는 음악인이 많이 보이는 망원동 팟캐스트 녹음실 근처를 따라 걸었고, 어젠 네이버 맵이 정확히 지목하지 못하는 수십 년 된 을지로 대림상가 주변을 배회했다.

오늘은 사람의 얼굴을 따라 걸었다.

 

사람의 얼굴을 따라 걷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그 사람과 산책을 같이하거나 그의 사진을 찍으면 된다. 전자의 방식은 움직이는 얼굴, 특히 그 사람의 옆얼굴을 잘 배우게 된다. 산책을 함께한 사람과는 조금 더 빠르게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걷기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인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신만 보며 걷지 않지만 그가 이동하는 속도에 내 발끝뿐 아니라 몸의 전반적인 반경을 맞춰야 하고, 반대편에서 오는 행인이나 자전거와도 거리를 유지하며 이야기까지 잘 이어 나가야 하는 꽤 입체적인 교감 방식이다.

 

사진을 찍는 경우 얼굴을 오랫동안 살피는 산보가 허락된다. 촬영 중 눈을 맞추고 구도를 바꾸며 빠르게 한 번, 찍은 뒤에는 마우스를 따라 빛을 조절하며 아주 느리게 십수 번 살피게 된다. 시간이 무한히 주어지는 산보. 꼼꼼히 보정하다 보면 어디 점이 있는지, 웃을 때 어느 쪽으로 주름이 지는지, 몸이 편안한 경사는 무엇인지가 보인다. 그러고는 이내 잊는다. 어떤 낯빛은 찍는 이가 먼저 알게 된다는 사실에 늘 놀란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당신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나의 얼굴이 아니고 내가 아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보게 된다. 

 

*

 

집에 가고 싶은 순간 1

집에 가고 싶을 때에 카페에 가서 문제고

집에 가고 싶을 때에 비행기를 타서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의 집은 없으므로

사놓은 드립 백을 두고 카페로 나가고 침대에 누워 항공권을 검색하는 것.

어제는 길을 걷다가 너무 졸려서 공원의 으슥한 벤치에 누워서 2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그전보다는 조금 살고 싶어졌다.

저녁으로 튀긴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충동을 억누르고 토마토와 오이, 피망, 양파를 사서 집에 들어왔다.

푸실리 면을 5분 정도로 꼬들꼬들하게 삶아서 올리브오일을 살짝 뿌려 140그램 세 통으로 소분했다.

양파는 집에 있던 배추와 가지와 함께 잘게 썰어 코코넛오일과 소금에 볶아 통에 넣었고 토마토와 오이, 피망은 썰기만 해서 따로 담았다.

푸실리 양이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 세 번 정도의 끼니가 만들어졌다.

요리한 재료들은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그냥 썰어 두기만 한 채소들과 함께 볼에 넣어서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오일, 후추와 소금 간을 해서 먹으면 될 것이다.

어제 만들어 둔 두유 요구르트도 통에 나누니 세 통정도 나왔다.

통에 들어가지 않은 남은 요구르트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고 나서야 다행히도 겨우 거실 소파에 누울 수 있었다.

사월

 

집에 가고 싶은 순간 2

언어를 잃어 본 사람은 열네 시간씩 비행하기 위해 공항으로 간다.

자기 자신인지 오래된 사람은 종일 걷는다.

30년간 노래한 뮤지션을 알고 있다. 그는 언제 주소를 옮길지 몰라 계속 부른다고 했다.

 

집이 없다고 느낀 시절에 가장 집에 가고 싶었다.

 

문이 있고 방이 있어도 집은 아닐 수 있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어도 집은 아닐 수 있다. 가장 오래 머물지만 집은 아닐 수 있다.

 

누군가에게 집은 시간 단위로만 존재하는 상태. 

하룻밤 사이 흩어지는 인간들과

어떤 날은 성립되고 또 어떤 계절엔 나를 통과하지 못하는 다짐.


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사월아, 우리 지난 번 만났을 때 나눴던 이야기 기억나? 

그날 대화가 웃기고 좋아서 보내 둔다. 

 

          사월아, 너는 어떨 때 노래를 만들어?

 

사월      눈물 날 것 같을 때….

 

          그 말 들으니까 울고 싶네.

 

사월      시는 어떨 때 써?

 

          음…. 언어화되지 않는 중요한 뭔가를 끄집어내고 싶을 때. 그… 머릿속에 이미지가 파편처럼 떠다니잖아. 손에 잡히진 않는데 그걸 막 이어 붙이고 싶을 때….  

 

사월      밀가루 반죽 같은 거야?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너무 맞는 말 같다. (웃음) 어떤 시인은 반죽을 촘촘하게 이어 붙이고, 어떤 시인은 듬성듬성 반죽해. 어떤 반죽은 십 년 전부터 오백 년 후까지 늘어난다. 가사는 어때? 

 

사월      가사는 잘 부르기 위한 선택들도 중요해.

 

          그럴 것 같아. 작사 작업한 적 있는데 조금 미칠 것 같았어. 소리와 의미가 딱 들어맞는 바로 그 단어를 찾기 위해서 수십 번씩 부르고 계속 수정하잖아.

 

사월      그건 아마 가사를 의뢰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맞히기 어려워서 아닐까? 나를 위한 노래를 만들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단어가 자석처럼 쏙 들어간다. 뭐 내 경우지만….

 

          누군가를 정확히 알아주는 거 어렵지…. 

 

사월      나는 시에서 문장이 왜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다시 요기로 오는 건지 가끔 이해가 안 돼. 짜증 나. (웃음)

 

          나도 다 이해하는 건 아냐. (웃음) 어떤 시에서는 시인들도 어디로 가는지 몰라. 화자나 공간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문장을 잘 받아 적는 것에 가깝달까…. 그러니까 시인은 단어를 정확하게 고르는 사람인데동시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쓰는 존재이기도 . 독자들이 들어올 때 요리조리 새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사월      아, 나 조금 이해했어. 이 사진과 컵 사진이 붙었을 때와 저기 저 사진과 컵 사진이 붙었을 때 컵은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되잖아. 로베르 브레송이 말한 것 같은 거지?

 

          응응, 그런 거야!

 

사월      영화도 음악도 시도 비슷한 데가 있네!

 

* 두 사람이 나눈 모든 대화와 인터뷰는 2월 10일 발간될 『고상하고 천박하게』로 공개됩니다.


*필자 | 김사월

한국의 싱어송라이터. 정규 앨범 「수잔」, 「로맨스」, 「헤븐」, 「디폴트」를 발매했다. 잘 웃고 잘 울다가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


*필자 | 이훤

시집 『양눈잡이』와 산문집 『눈에 덜 띄는』 등 여섯 권의 책을 쓰고 찍었다. 「We Meet in the Past Tense」 등의 전시와 『끝내주는 인생』,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의 출판물에 사진으로 함께했다. 시선을 만들고 정지된 장면을 잇고 모국어를 새삼스러워하는 사람. 사진관 <작업실 두눈>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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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고 천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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