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간다. 이제 곧 새해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지난 한 해의 바람이나 미련을 어김없이 밀어내고 오는 새해를 향해 새롭게 다짐하고 다시 바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된다 하여 마법처럼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님에도 단 한 번 해가 지고 뜨는 사이 새로운 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소원을 빌고, 기원한다. 지난 1년 365일의 어느 하루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 흐르는 것뿐이지만 그날만큼은 유독 그렇다.
하루 사이에 세상의 풍경이나 개인의 만사가 드라마틱하게 바뀔 리 없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새롭게 동이 트는 것처럼 이전에 품지 못한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최소한 집 정리라도 해보거나, 새해에는 꼭 금연에 성공하길 다짐하거나, 혼이 정상인 대통령을 뽑을 수 있길 바라거나, 이처럼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다는 마음을 물리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렇듯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식은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유효한 마법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을 기도하는 것을 넘어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1년 주기로 한 번씩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만 하루의 흐름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새해가 온다는 건 새롭게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쥐어도 된다는, 전인류가 합의한 마법인 셈이다. 단순히 바란다는 마음만으로 기적 같은 변화가 백주대낮 무지개처럼 떠오를 리 없겠지만 대부분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염원하는 마음으로부터 자라나는 법이리라.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일상의 안위와 인생의 평온이 찾아오길 바라는 순백의 마음을 품고 오늘과 내일을 다짐하고 기원하는 의식의 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듯 다시 한번 삶을 가다듬어본다.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매일매일 약속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화초에 물을 주고,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인 필름 카메라와 지갑과 열쇠와 동전을 챙겨 집을 나선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 하늘을 올려보고 미소를 짓다가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밀어 넣고 캔커피를 하나 뽑아 차에 오른 뒤 시동을 걸기 전 출근길에 들을 카세트테이프를 고른다.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차와 함께 음악이 흐른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가 시작하는 하루와 함께 출발하는 영화다.
히라야마의 아침을 깨우는 건 미리 맞춰둔 스마트폰 알람이나 자명종 울림이 아니다. 동이 트면 이웃의 누군가는 깨어나 길을 쓸고, 빗자루질 소리에 히라야마도 깨어난다. 세상이 깨어나면 히라야마도 깨어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변모하는 세상의 섭리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굴리는 시계와 같다. 자연과 같이 일어나고, 세상과 함께 움직인다. 마치 타고난 평정과 평상의 주인처럼 자연처럼 흐르듯이, 세상으로 스미듯이 그렇게 매일을 살아간다. 일정한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부지런하고 묵묵하게 해낸다.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 청소부다. 출근할 때마다 등 뒤로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이라는 활자가 선명하게 박힌 파란 점프슈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도쿄 토일렛은 영화 속 가상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본의 한 비영리단체에서는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공화장실 개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것이 바로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였다. ‘최고의 환대’를 의미하는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를 내걸고 올림픽을 유치한 정부 기조에 맞춰 올림픽 개최와 함께 도쿄를 방문할 해외 관광객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줄 수 있도록 노후한 공공화장실을 새롭게 재단장하는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면면도 흥미롭다. 안도 타다오, 반 시게루, 구마 겐코, 후지모토 소우, 고바야시 준코, 사카쿠라 타케노스케, 마키 후미히코, 우시로 토모히토 등 일본의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비롯해 아이폰6와 애플 워치 디자이너로 유명한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마크 뉴슨까지 총 16인이 참여한 프로젝트였다. 이들의 손길로 새롭게 거듭난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은 총 17곳이었다. 하지만 이 화장실들은 최고의 환대를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팬데믹의 역습으로 2020년에 개최되지 못한 도쿄올림픽은 2021년에 가까스로 열렸지만 무관중 개최가 결정된 탓에 최고의 환대를 준비한 손님을 맞지 못했다.
<퍼펙트 데이즈>를 연출한 독일의 거장 감독 빔 벤더스가 제안받은 건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로 새롭게 단장한 공공화장실을 소개하는 단편 연작 연출이었다. 하지만 도쿄로 날아가 공공화장실을 둘러본 빔 벤더스는 공공화장실을 소개하는 선상을 넘어 그곳과 관련이 있는 누군가의 삶을 떠올렸다. 파란 점프슈트를 입고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이들의 묵묵한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불특정 한 만인이 찾아오는 이 공간을 매일 같이 닦아내고 정화하는 이의 보이지 않는 일상을 상상했다.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팬데믹에 대한 경험이 투영된 것이기도 했다.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선의 의미에서 보다 은유적인 의미로 화장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빔 벤더스의 말처럼 <퍼펙트 데이즈>는 수많은 타인의 삶이 잠시나마 중첩되는 공공화장실을 매일 같이 청소하는 한 남자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특별히 정해진 규율을 따르는 강박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물이 흐르듯 순조롭게 이어지고 전환되는 그의 일상은 켜켜이 쌓여 이룬 지층의 단면처럼 단단하게 여문 반복의 결과처럼 보인다. 흡사 타고난 평정과 평상의 주인처럼 미동 없이 자신이 바라는 온전한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는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의 미덕을 전시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는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히라야마는 집을 나와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다를 보러 가자는 니코에게 ‘다음에’라고 하니 ‘다음이 언제냐’고 반문하자 이렇게 답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대사를 두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궁리하면 궁리할수록 이 대사에는 다음이 간절한 이가 바라보는 지금의 심경이 투영된 것만 같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의 과거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니코가 찾아오고 니코의 엄마이자 히라야마의 동생인 케이코(야마다 아오이)가 찾아오는 순간 그의 보이지 않는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일말의 단서들이 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가 왜 도쿄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깃들고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결국 그가 유지하는 지금의 평정과 평상이란 타고난 평정심과 평상심의 결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으로 다다른다. 이는 분명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터져 나오는 히라야마의 눈물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명백하게 알 수 없지만 그의 지금은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내면의 애수와 고독을 밟고 서기 위한 안간힘의 노력일지도 모른다는 애틋한 예감이 그가 마주 보고 가는 동트는 아침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지난가을에 출간된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은 여름이 한창이었던 지난 6월 말부터 쓴 책이다. 그렇다. 내가 쓴 책이다. 자신이 쓴 책을 이렇게 직접 소개한다니 뻔뻔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일단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시라. 아니, 읽어보시라.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은 북스톤에서 출간한 사계절 시리즈 중 ‘가을’을 담당한 책이다. 가을에 출간될 책을 여름이 한창이던 6월 말에 쓰기 시작한 건 사정이 있었다. 본래 내정된 필자가 있었다는데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집필을 할 수 없게 돼 새로운 필자를 찾아야 했던 출판사와 연이 닿아 책을 쓸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서문과 백커버에 쓴 것처럼 ‘가을을 위한 책이 아니다’. 가을을 닮아서 가을에 떨어뜨릴 만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가을이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인해 화려하게 물드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메마르고 떨어지는 낙엽들과 끝내 앙상하게 드러나는 가지로 인해 낙하와 쇠락으로 점철된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떨어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그 에너지를 추동하는 힘이다. 떨어지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결사의 돌진이다. 매달린 위치에서 떨어지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힘, 그러니까 추락하는 것에는 에너지가 있다. 결국 가을은 마지막까지 힘을 쓰는 계절이다. 끝까지 소진하고 떠나는 마음이다.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에는 그런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무언가 마지막까지 소진하고 싶은 사연과 경험과 마음과 심상과 풍경과 얼굴들에 관해 말하려 했다. 그럼으로써 이 이야기가 그것을 마주하는 독자들이 떠올릴만한, 자신만의 가을 같은 이야기와 이미지로 떨어져 닿기를 바랐다.
일찍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광주에서 선동렬과 이종범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가을야구를 보고 자랐고, 1980년 5월 18일의 상흔과 통증이 깃든 도시의 심연을 마주했다.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반려견 하늘이를 소회 했고, 서촌살이 중 길에서 만난 품종묘 구니니는 요도가 자꾸 막히는 질환으로 인해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11년째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결혼식을 축하할 수 있게 된 삶의 의미와 이제는 옛일처럼 아득해서 되레 생경해진 팬데믹 시기에 코로나19에 걸린 덕분에 신뢰할 수 있게 된 사회적 약속 그리고 서촌의 멋진 바를 돌면서 생일주를 거듭 마셨던 5월 12일의 하루와 청소와 빨래의 리듬으로 각성한 매일의 다행을 떠올리고 떨어뜨렸다. 영화기자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의 삶도, 굽은 목과 구부정한 몸을 펴고 일으키려 시작했던 필라테스를 하면서 느낀 뜻밖의 깨달음도 모두 떨어뜨렸다.
이처럼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은 가을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다만 가을이 있는 덕분에 쓸 수 있었던 책이다. 가을에 모두 떨어뜨리고 겨울을 난 가지는 결국 봄에 다시 틔우고 여름이면 울창해질 것이다. 내가 사는 서촌의 오래된 구옥 연립 뒤로 길게 자란 나무도 지금은 앙상하지만 돌아올 봄과 여름에 다시 푸른 생기로 가득해질 것이다. 이렇듯 반복해서 돌아오는 계절의 풍경도 거듭 돌아오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 가을에 떨어뜨린 잎과 내년 봄에 틔우고 돋아날 잎은 필시 다른 생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계절에 다시 자기 색을 찾고 품을 채우는 풍경을 마주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할 결심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완벽한 날’로 수렴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한 날들’이 있었다고 소회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삶이란 늘 행복할 수도 없고, 늘 불행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행복만 추구할 수도 없고, 불행만 대비할 수도 없다. 가끔씩 오는 행복도, 불행도, 하루하루 평범하고 무난하게 지속되는 매일매일의 사이에서 찾아오는 파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하고 무난한 매일을 꾸준히 이어 나간다면 다행일 것이다. 일어날 수 있을 때 일어나고, 가야 할 곳이 있을 때 가고, 돌아올 수 있을 때 돌아오고, 누워 잠들 수 있을 때 잠드는 것. 그렇게 하루를 지나 또 다른 하루를 만나는 것. 이러한 매일을 지나고 만날 수 있다면 행복도, 불행도 자연스럽게 맞고 이길 것이다. 결국 그렇게 꾸준히 살아가는 데까지 살아보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이 이긴다’라는 부제는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을 통해 떨어뜨리고 싶은 가장 큰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코모레비는 행복도, 당연히 불행도 아닌 다행인 것만 같다. 평온하게 하루가 지나갔다는 사실에서 무탈하고 원만하게 지속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렇게 매일의 다행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즐길 수도, 언젠가 날아올 불행을 견딜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다음의 다행으로 수렴할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결국 지금을 살아간다는 건 언젠가 지금이라 말할 수 있는 다음의 기약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건 소소하듯 숭고한 일이다. 반복되는 고유의 리듬을 견인하며 꾸준한 일상을 반복하고 이어가는 경험이란 삶의 중력을 만드는 숙련의 여정과 같다. 가끔씩 일상의 평정과 평상으로부터 아득히 밀려나가고, 흔들리고, 미끄러지는 기분을 느낀다 해도 끝내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다행의 경지로 쌓이는 나날들. 그렇게 이어지는 나날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면 매일매일 찾아오는 코모레비를 향해 미소 지을 마음도 깃들 것이다. 지극히 사사롭게 여기는 것을 향해 미소 짓고, 모두가 지나치는 소소한 무엇을 응시할 수 있는 삶이라면 어떤 외로움이나 고단함이나 괴로움도 그 삶의 위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넘어 다음도 올 것이다.
어쨌든 비로소 맞이한 이번 겨울은 우리 모두에게 심중한 계절이 되고 있는 것만 같지만 그래도 끝내 이 모든 여정이 다행으로 기억되리라 믿어본다. 물러갈 것은 물러가고, 흘러가는 곳으로 흘러가야 한다. 한 번 나아가본 역사는 잠시 뒤로 물러난다 해도 애초에 머물렀던 자리를 기억하고 끝내 다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며 다음으로 다다르는 존재들이므로, 이번 겨울에도 이길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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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준
<무비스트>, <엘르>, <에스콰이어> 등의 매체에서 기자/에디터로 밥벌이를 하며 영화와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비롯한 세상만사에 관해 기사와 칼럼을 썼다. 현재에는 프리랜서 작가, 평론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불리며 집필과 방송,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모색 중이다.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를 썼으며 지난 여름에 쓴 에세이집 <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이 이번 가을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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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