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저|문학동네
아주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다. 한국 문학이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몰랐어, 더 많이 알고 싶어, 어떤 것들을 읽으면 좋을까? 하고 수많은 사람이 내게 물어오는 순간. 그런 꿈같은 순간을 대비해 나는 아주 긴 목록을 작성해 두었다.
그리고 정말 그런 날이 왔다. 이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시점은 노벨문학상 발표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난 날이다.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어요”라는 소감이 화제가 되고 문학의 의의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지금이, 바로 조해진의 소설을 읽을 때다. 전쟁 난민을, 탈북자를, 기지촌 여성을, 가깝고도 먼 타인의 고통을 우리 곁으로 불러오는 것이 늘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해진의 신작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는 작가가 10년 전 쓴 단편 ‘빛의 호위’에서 나아온 소설이다. ‘빛의 호위’에서 빈 방에 홀로 버려진 아이 권은은 반장 승준에게 카메라를 선물 받는다. 승준은 권은이 카메라를 팔아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길 바랐지만 권은은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번쩍이는 빛의 호위에 기대어 어둠을 견딘다. 훗날 권은은 분쟁 지역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승준은 기자가 되어 재회하고 권은은 승준이 건넨 카메라가 어떻게 자신을 살렸는지에 대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었음을 전한다.
『빛과 멜로디』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7년 사이, 권은은 시리아에서 포탄을 맞아 왼쪽 다리의 절반을 잃었다. 절망한 권은 앞에 영국인 애나의 제안이 도착한다. 권은이 닮고 싶었던 사진가 게리 앤더슨의 여동생인 애나는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젊은 시절 드레스덴 폭격작전을 수행했던 콜린의 삶을 되짚는 영상을 제작해줄 것을 부탁해온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승준의 딸 지유가 태어났다. 승준은 우크라이나 난민 나츠차의 인터뷰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돌봐야 하는 동안만큼은 좋은거”만 보고 듣고 싶단 아내 민영의 말 앞에서 고민한다. 나스차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한국에 있는 승준과 영국에 있는 권은은 다시 연락을 주고 받게 되고, 소설은 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빛의 파문을 그려나간다.
한손에서 다른 손으로 이어지는 빛의 호위. 그걸 그리는 이야기는 왜 또 한번 쓰여져야 했는가. 그 사이 러시아와 우크라이에서,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폭격이 빗발치고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장면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페이지로 이어 붙인다. 이러한 배치는 독자에게 즉각적인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내가 영위하는 평온한 일상이 실은 그저 지난 페이지의 이야기를 잊었기 때문에, 혹은 도래할 페이지의 내용을 짐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엄숙한 자각. 이는 누구보다 열렬히 사람을 살리는 일에 뛰어들어온 권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권은은 “수없이 셔터를 누른다 해도 전쟁이나 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몇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렌즈 너머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246p)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미군의 폭격에 많은 국민을 잃은 이라크는 다른 곳에선 쿠르드족을 죽였고 이십 세기 가장 처절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은 가자지구에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하고 있다. “죽고 죽이는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미친 전쟁에서 승리자와 패배자, 가해국과 피해국이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176p) 물을 수밖에 없다. 영겁과도 같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이 굴레 끝에서 우리가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결말은 어떻게 해도 이 공허한 반복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환멸뿐인 것 같다.
그러나 『빛과 멜로디』는 그런 손쉬운 결말 대신 희망에 대해 얘기한다. 학살을 저지르는 게 인간이라면 그것에 맞서 서로를 살리는 것도 인간이라고. 오래 전 승준이 권은에게 그랬던 것처럼, 권은과 애나의 도움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살마는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난민 나스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다. 구원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다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전쟁을 완전히 끝장낼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건네고 누구를 살릴 수 있는지는 결정할 수 있지 않느냐고, 소설은 답한다.
지난 10월 7일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1년 간 4만1,788명의 민간인이 죽었고 그 중 1만6,500명이 아이들이었다. 이런 문장을 옮겨적을 때마다 나는 키보드의 타자가 너무나 가볍게 눌리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타자가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딱 그만큼의 무게가 이 책이 나에게 준 것이다. 어쩌면 좋은 문학이 하는 일은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누군가 실버의 사진을 보고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어.”(1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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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