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 이야기는 앞서 읽은 이야기들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장르문학의 근사함은 여러 시대의 작가들이 크고 높은 탑을 이어 쌓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보태고 싶습니다.
시대 배경을 고르는 일은 고민스럽지 않았습니다. 고대사의 이야기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기록된 부분에 매력을 느끼곤 했고, 그 어떤 비극에도 안전한 심리적 거리를 가질 수 있는 점 역시 좋았습니다. 특히 신문왕 시대에 항상 끌렸습니다. 큰 전쟁이 끝난 통일신라는, 한껏 융성을 향해서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지요. 풍요 속에 숨어 있는 붕괴의 씨앗 같은 것을 천삼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제대로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먼 시대를 거울삼아 보는 일은 언제고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정세랑 소설가 편>
오늘은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장르문학의 근사함은 여러 시대 작가들이 크고 높은 탑을 이어 쌓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탑에 작은 돌을 보태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소설가, 새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쓴 정세랑 작가를 모셨습니다.
황정은 : 반갑습니다.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정세랑 : 2010년부터 소설을 쓰고 있고 요새는 좀 다른 매체 이야기도 자주 쓰고 있는 정세랑이고요. 사실 <책읽아웃>은 이번이 네 번째인데 꼭 나오고 싶었어요.
황정은 : 그렇습니까?
정세랑 : 네. 제가 지지난번에 나왔을 때 청취자 여러분께 이 책이 곧 나올 거라고 말했던 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웃음)
황정은 : 그게 몇 년 전이었죠?
정세랑 : 그게 2019년 7월이었어요. 이 책의 첫 이야기를 2018년에 발표를 하고 뒷이야기도 곧 쓸 수 있을 줄 알고 2019년에 아주 당당하게 ‘새 장편소설은 신라의 탐정이고 곧 나온다’라고 국제도서전 특별 녹음에서 외쳤더라고요. (웃음) 언제나 마음에 좀 무겁게 갖고 있다가 이번에 책이 나와서 가벼운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황정은 : 드디어 나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싶으셨군요.
정세랑 : 네, 4년이 늦어졌지만 나왔습니다. (웃음)
황정은 : 『시선으로부터,』를 내고 3년 만에 장편소설을 내셨어요.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인데요. 제목을 처음 들은 분들은 일단 SF를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비너스의 의미로 금성을 생각을 하실 것 같고, 또 정세랑 작가님이 그간에 써온 SF의 소설들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런 오해를 상상하기도 하셨을까요? 제목을 정하면서.
정세랑 : 그 부분을 편집부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금성이 들어가는 순간 모두 행성으로 느끼실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표지 그림을 그려주신) 윤예지 작가님이 고전미를 엄청나게 살려주셨고, 그리고 출판사에서 오해를 안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역사 미스터리다’를 되게 강조해 주셨어요. 아니면 살짝 착각이 일어나기 쉬운 제목이라서.
황정은 : 설자은이 돌아간다는 금성이 통일신라 시대의 수도 금성이잖아요. 그리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통일신라 시대입니다. 정세랑 작가님이 처음으로 펴낸 추리 소설이고 애초에 3부작으로 구성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첫 시리즈 작업이잖아요. 앞으로 쓸 방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정세랑 : 너무너무 쓰고 싶었던 장르거든요. 사실 독자로서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장르라서 ‘이렇게 많이 읽는 장르를 왜 나는 쓰지 않지?’라는 물음에서 약간 시작해서 ‘나도 써보고 싶다’로 출발했는데, 그런데 자료들을 소화하고 발효시키는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리더라고요. 제가 찾아보니까 이 책을 쓰려고 시작한 게 2016년이더라고요. 2016년에 답사도 다니고 책도 읽기 시작해서 2018년에 첫 편을 발표하고, 그러고 나서 더 갈피를 잡으려고 더 많이 읽었는데요. ‘아, 새로운 장르에 진입하는 데 어쩔 수 없이 적응의 기간이 걸리는구나, 마치 항아리에 뭘 담아놓고 발효시키는 것처럼 오래 걸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요. ‘항아리가 여러 개라서 그나마 다행이지, 이건 정말 효율적인 작업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웃음) 걱정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똑바로 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추리 소설은 진짜 천재적인 사람이 써야지 새로운 트릭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런 것까지는 가지 못했고 이 새로운 장르의 입구에 이제 막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좀 더 탐색해서 정수에 다다르고 싶어요. (웃음)
황정은 : 여기 실린 소설의 첫 단편을 2018년에 쓰셨다고 하셨잖아요. 긴 시간 동안에 이 소설을 하나하나씩 써서 완성을 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이 10권을 넘어서면 좋겠다’라고 작가의 말에도 쓰셨어요. 쓰는 동안에 쓰는 즐거움을 많이 느끼신 것 같아요. 어떠셨나요?
정세랑 : 저는 그런 게 너무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몇 년간 국내 여행을 아주 좋아하게 됐는데, 도처에 보물이고 이야기인 것 같은 거예요. 원래 있었던 걸 좀 가공해서, 우리가 현대의 삶을 사느라 놓쳤던 어떤 아름다움이나 흥미로움을 다시 조명하고, 그것을 지금 사는 사람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에요. 그래서 되게 하고 싶은 작업인데, 문제는 읽고 소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진짜 수명 싸움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웃음)
황정은 :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의 매혹도 컸을 것 같아요. 후기에도 밝히셨습니다만 미스터리의 어떤 점이 좋으셨는지 조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정세랑 : 코로나 시절에 이상하게 추리 소설에 손이 더 많이 가더라고요. 항상 해결책이 있고, 항상 원인이 밝혀지고, 그다음에 개선도 있고, 정의가 실현되고, 이게 사실은 현실과 너무 다른 세계잖아요. 그런 것에 되게 위안을 얻었어요. 항상 답이 있는 세계에 위안을 얻었고. 그런 면에서 오락적인 문학이 가지는 효용을 다시 발견했던 것 같아요. ‘아주 즐겁고 작가와 독자 사이의 어떤 게임이 되는 소설이 이렇게 힘든 시기에 나에게 엄청 힘이 돼주는구나, 좀 더 오락 문학을 해도 되겠다’라는 어떤 확신 같은 걸 건졌습니다. 그래서 더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후기에서 “언제나 원인이 밝혀지고, 답이 주어지고, 해결이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쓰셨습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에서 위안이나 쾌를 얻는 점이 분명히 있거든요. 작가 후기의 그 말을 읽는데 ‘그런 쾌나 위안을 얻는다는 게,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리가 자주 겪고 있기 때문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해갈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세랑 : 점점 더 ‘답이 너무 어렵게 얻어진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그 현실에서 도피하자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마음이 너무 힘들 때는 답이 있는 세계에 잠깐 머리를 담그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황정은 :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세랑 작가님이 이야기를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방금 말씀 듣고 보니까.
정세랑 : 그렇죠. 저는 약간 현실 옆의 이야기를 쓰죠. 현실은 아니고.
황정은 : 현실을 알고 있고, 또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언제나 현실을 넘어보는 이야기를 짚어내고 계시잖아요. 그런 작업이 정세랑 작가님의 이야기를 쓰는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황정은 : 정세랑 작가님이 역사 소설을 펴내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정말 설렜거든요. 왜냐하면 작가님이 역사교육을 전공하셨잖아요. 그래서 답사도 종종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정세랑 작가님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시선을 두고 계실까 아주 궁금했는데 통일신라 시대, 그중에서도 신문왕 치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정세랑 : 여러 요소가 있을 것 같은데, 저는 기본적으로 약간 고대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역사와 이야기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서술 방식을 써서, 역사랑 이야기를 둘 다 좋아하다 보니까 그 섞여 있는 방식에 흥미를 많이 느꼈던 것 같고. 그리고 고대사는 마음이 늘 편한 것 같아요. 현대사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발견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런데 어느 시점을 지나면 사람들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 너무 기뻐해요. (웃음) 긴 시간이 어떤 슬픔을 완충해 주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고, 슬픔뿐만 아니라 더러움도 사라져요. 사람들이 화장실이나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면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조개 무덤을 파헤치면서. (웃음) 긴 시간이 가져오는 더러움도 슬픔도 다 날아간 그 거리감이 좀 재밌는 것 같고. 또 신문왕을 좋아했어요. 정말 학생일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요.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녹읍제도도 한번 뒤집어 보고 화랑제도도 한번 뒤집어 보고 수도도 한번 옮기려고 했었거든요. 전쟁에서 이긴 강력한 아버지 다음에 나타나는 되게 개혁적인 행정가의 면모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런 패턴이 늘 있거든요. 전쟁이나 나라를 세우거나 이런 강력한 아버지 다음에 행정가가 나타나면 나라가 되게 좋아져요. 그런 면모를 좋아했던 것 같고. 사실 몇십 년 전 사람의 생각에도 동의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세대 차이라는 게 있고. 천 년도 더 전의 사람이 했던 게 ‘합리적이네’ 이런 생각이 들기 쉽지 않은데 신문왕은 합리적인 방향으로 갔던 것 같아서 좋아했고, 그래서 그 시절에 대해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시대에도 조금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게, 통일을 하고 엄청난 풍요가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다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는 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요. 풍요 속에 숨어있는 붕괴와 부패의 씨앗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여러모로 가장 끌리는 시기였습니다.
황정은 : 주인공의 이름이 설자은입니다. 내력을 약간 소개하자면 죽은 오라비 대신 그의 삶을 살게 된 매우 총명한 인물인데요. 자은의 서사는 처음에 어떻게 만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정세랑 : 설자은은 주목받기 싫어하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자기 노출을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요. (저의) 주변 친구들이 아무도 SNS를 안 하는 거예요. 관심이 없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갈구하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런데 그런 친구들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야 할 때는 망설이지 않는 용감함이 있는 걸 보면서, ‘관심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이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만든 인물인 것 같아요. 사실 많은 추리 소설 속의 탐정들이 성격이 다 다르잖아요. 관심을 아주 갈구하는 화려한 인물들이 있고 진짜 관심을 원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는데, 그 중에서 선택을 해보자 했을 때 ‘원하지는 않지만 할 때는 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저는 미스터리 장르 소설에서는 인물의 매력과 능력을 많이 주목해서 보는 편이거든요. 작가님은 자은에게 어떤 능력과 매력을 주고 싶으셨는지 궁금해요.
정세랑 : 본인이 처해 있는 복잡한 상황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질감을 잘 발견하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기억력이나 추리력이 있기보다는 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감돌 때 그걸 잘 포착하는 사람. 애거사 크리스티나 조지핀 테이처럼 관계에서 작품의 주요 요소들을 발견하는 작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도 그쪽을 택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르 문학이 그런 것 같아요. 자기가 읽은 것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고 약간 이어달리기하는 느낌으로 쓰게 돼서, (설자은에게) 그런 능력을 주게 된 것은 제가 읽은 작품들이 많은 경우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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