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공자, 붓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직접 저술한 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말은 제자들의 손을 빌려 후대로 전해진다. 형식이 강의나 독백이 아니라 '대화'다. 플라톤 저작이나 『논어』,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불경 모두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 입증하듯, 대화는 올바른 견해로 이끄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오늘날도 대화로 구성된 여러 책이 사랑받는다. 특히 인문 분야에서 이러한 형식이 두드러진다. 당장 떠오르는 책만 해도 『미움받을 용기』,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가 있다. 모두 좋은 내용이다. 그리고 또 한 권, 끝내주는 책이 등장했다. 진짜, 끝내주는 책이다.
제목은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록 밴드 노브레인 보컬 이성우 분과 정신의학과 교수 한덕현 분이 함께 나눈 대화다. 필자는 노브레인을 좋아했다. 과거형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집에서 울려퍼지는 건 아기상어와 뽀로로 동화라서다. 노브레인 음악을 못 들은 시간이 꽤 길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로도 록 대신 '던던댄스'가 채우고 있다. 진로와 취업 걱정으로 쉽게 잠 못 들던 나의 20대를 위로해준 '그것이 젊음'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 아득하다.
이 노래에서 특히 좋아했던 구절은 '산다는게 뭔지 고민만이 가득찬 그대 좌절은 변기에 버려 텅텅 빈 지갑에 절망감은 두둑한 그대'였다. 이런 방황하는 청춘에게 '거침없이 재껴보'라고 했던 사람이 15년이 흘러 답답해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찾아갔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록커 이성우만의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연예인의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터. 예사롭지 않은 에세이는 시중에 많고, 당연히 예스이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다른 책에서 읽으셔야겠다. 이성우 저자가 안고 찾아간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고민해본 사안이다. 행복, 죽음, 고향, 관계, 사랑, 결혼, 술, 노화, 꿈, 나다움 등등. 대부분은 이성우 저자 본인의 이야기고, 가끔은 주변 사람의 사연도 등장한다. 이에 대해 불안 전문가로서 한덕현 교수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으로 글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다움에 관한 대목. 애주가이기도 한 이성우 저자가 위스키의 숙성 과정을 인간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선생님, 위스키를 만들 때 처음 증류한 원액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보통 스피릿이라고 부릅니다. 스피릿은 보기에 하얗고 도수도 높고 알코올 향이 튀는 게 보통 생각하는 위스키와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이 원액을 와인이나 버번위스키를 숙성시켰던 나무통에 넣어서 숙성시키는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위스키의 맛이 달라져요. (중략) 이렇게 숙성의 방식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위스키처럼, 나란 사람은 47년을 거쳐 어떤 향을 풍기고 어떤 맛이 나는 위스키인지 생각해봅니다. 47년 숙성의 위스키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_이성우, 296쪽
이에 대해 한덕현 교수는 인간 성격 이론을 알려주며 나다움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답한다. 나아가 나이가 들수록 나다움을 추구하기 쉽다는, 중년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도 덧붙인다.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위스키 원액은 18세 정도에 정해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이것을 '성격'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18세까지는 자신의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색깔이 정해지지요. 하지만 그 후 어떤 오크통에서 또 얼마나 숙성하느냐, 얼마나 많은 물과 섞이느냐 등에 따라서 맛이 변하죠. 그런데도 자신의 맛을 잃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지내느냐에 따라서 자신감이나 표현이 변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현실적 이유 때문에 받아들이고, 계획이 변함에 따라 인생이 묽어지고 숙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원액 성질은 잃지 않죠. 고등학교 이후에 사귄 친구들을 보면 세월이 10년, 20년 흘러도 겉모습은 변해도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대충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그런 속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나의 색을 나타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자신감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점점 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 즉 자신의 색이 점점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_한덕현, 300쪽
두 저자의 다른 문체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공감가는 내용이 가득하다. 두 사람의 고백에 여러번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끄덕, 그래그래, 예스24. 한덕현 저자가 공중 보건의로 복무하던 시절, 업무 끝나고 축구한 뒤 누워서 밤하늘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아마도 이때가 인생에서 제가 하고픈 것을 진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73쪽)라고 한 대목에서 울컥했다. 라이브 클럽 대신 술집만으로 채워진 홍대 거리를 쓸쓸히 걷는 이성우 저자의 글(290쪽)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명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서울역에 내린 순간 느끼는 긴장감은, 수도권 아닌 곳에서 태어나서 수도권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대목이다.
저만 그럴 수도 있는데, 원래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서울역에 내리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기합이 들어갑니다. 고향에서 느슨해졌던 긴장의 끈을 다시 꽉 조이고 방전되었던 에너지를 급속도로 충전하는 거죠. (안 그래도 되는데) _69~70쪽
개인적으로 헤비메탈을 몹시 좋아하는데, 올해 발표된 주요 록 페스티벌 라인업을 보고 절망했다. 아는 밴드가 없어서. 그럼에도 헤드라이너로 활약하는 노브레인의 존재가 반가웠다. 여하튼, 아래 대목에서 눈물까지 맺혀버렸다. 관뚜껑이 닫히기 전까지 메탈을 듣겠어요!
"형! 그렇게 나이 들어서 록은 무슨 록이야. 이제 나이에 맞게 살아야지!"
선생님, 저 말을 듣는데 제 속이 부글부글 끓지 않겠어요!
"야 이 새끼야. 나이 먹었다고 록이 뭐냐고 그러면 7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헤비메탈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 할배들은 뭔데? 그리고 니가 지금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지는 난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너랑 나랑 함께했던 추억을 싸구려 취급하면 안 되지! 진짜 기분 더럽네." _241쪽
흘러간 과거를 추억하는 쓸쓸함이라는 정서도 있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중년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고, 인간에게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고 격려하는 대목도 나온다. 한덕현 저자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인용하고, 이성우 저자는 자신의 삶을 증거로 내민다.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되뇔 수밖에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남이 살라고 하는 대로만 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인생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만으로도 충분했어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인생은 엿이나 먹으라고 해주고 싶었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어쩜 사람들은 그렇게 남을 다 아는 것처럼 말도 쉽고, 길도 대신 정해주는 걸까요. 다 나 잘되라고 하는 충고가 아니라 저를 옥죄는 쇠사슬 같았어요. _146쪽
좌절을 변기에 버리더라도,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내면에 쌓이고 쌓일 수밖에 없다. 똥처럼. 그럴 땐 계속 변기통에 버려야 한다. 잘 안 되면, 전문가의 조언도 구해야겠고.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는 변비약 같은 책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마무리라면, 이 책의 내용이 더 궁금하다면 직접 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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