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냉정 사이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지면 반딧불 의원에도 환자가 뜸해진다. 대기실은 한산했다. 데스크 앞에 서 있던 젊은 남성이 대기실을 나간 뒤,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에 낡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이제야 한가해졌네요. 기다리는 환자가 없는 것 같아 허리 좀 펴려고 나왔습니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고 또 어떤 때는 아예 뜸하네요. 시간을 정해 차례차례 오면 환자들도 좋고 저희도 좋을 텐데.”
“저는 맨날 뜸한 게 더 좋은데요.”
그의 농담에 김희정 씨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원장님. 지난 달 매출이……”
“그만 그만. 제가 또 괜한 말을 했네요. 이럴 때면 제가 희정 씨에게 월급을 받는 의사가 된 것 같아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런데 방금 왔던 분은 접수는 안하고 갔나 봐요.”
그가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김희정 씨가 장난기 많은 아이를 보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인데 응급 피임약을 처방해달라고 해서요. 일요일이잖아요.”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요일 저녁엔 응급 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의원을 방문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의원이 문을 닫은 시간이라 처방을 받으려면 응급실을 가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백팩을 멘 차림이 학생인 것 같았는데, 여자친구가 꼭 사오라 했다고 통사정을 하더라구요. 처방을 받는 환자가 직접 와야 한다고 한참 타일러 보냈어요.”
“두 사람이 같이 오면 더 좋을 텐데요.”
“안 그래도 같이 오라고 했어요.”
“열정이 가득한 주말이라. 좋네.”
혼잣말을 한 그가 싱긋 웃으며 다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빈손으로 돌아갔던 남자가 여자친구와 함께 다시 진료실로 들어온 것은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처음부터 제가 왔어야 했는데, 얘가 혼자 가서 받아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진료실 의자에 앉은 여자가 사과를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정색 뉴욕 양키스 베이스볼 캡 아래 쌍꺼풀이 없는 눈이 갸름했다. 흰 피부가 옆에 앉은 남자의 붉어진 얼굴과 대비되어 더 도드라져 보였다. 회색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와 스니커즈 차림인 남자는 디스커버리 로고가 프린트 된 커다란 베이지색 백팩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 의사는 모니터에서 다시 환자의 나이와 이름을 확인했다. 김윤희. 스물 한 살이었다.
“환자가 거동을 할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대리인이 처방을 받는 건 불법이에요. 가능한 경우라 해도 가족, 친지만 처방을 받을 수 있구요. 더군다나 응급 피임약은 오남용 우려가 많은 약이거든요.”
“본인만 처방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몰랐어요.”
“법도 법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약을 안전하게 쓰기 위해서입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더 생길 수 있어요. 몇 가지 물어볼게요.”
진땀이 나는지 양손으로 이마를 훔치던 백팩 남자의 얼굴빛이 더 벌개졌다. 그에 비해 여자의 표정은 담담했다.
“관계를 가진 게 언제였나요? 닷새 내에 약을 먹어야 효과가 있거든요.”
“어제 밤이에요.”
“만 하루가 안되었으니 다행이네요. 하루 이내에는 90% 이상 효과가 있지만 사흘째가 되면 절반으로 효과가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응급피임약을 쓴 게 언제였나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항상 얘가 콘돔을 쓰는데 어제는 그게 빠져버려서……”
그녀가 남자친구를 향해 눈을 흘기자 그의 얼굴빛이 다시 달아올랐다. 그가 더듬거리며 황급히 물었다.
“서… 선생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건가요?”
“응급 피임약은 일반 피임약보다 호르몬 성분이 높아요. 일종의 여성 호르몬 폭탄이라 보면 되겠네요. 이렇게 갑자기 많은 양의 호르몬이 들어오면, 몸 속 호르몬의 균형이 깨져서 수정이 되더라도 자궁 안에 자리를 잡기 어려워져요. 그래서 임신도 막을 수 있는 거죠. 대신 호르몬 불균형으로 종종 유방에 통증이 생기거나 생리가 불규칙해집니다. 두통이나 어지럼증이 생기고 구역질, 구토를 할 수도 있어요. 약을 먹고 두세 시간 내에 구토를 하는 경우엔 약효가 떨어지니까 새로 다시 먹어야 합니다.”
남자친구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심각한 부작용도 아닌걸 뭐. 어차피 생리 때도 겪는 일인데.”
“드물지만 자궁외 임신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생길 수 있어요.”
의사의 설명에 백팩을 안은 남자가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봤다면 환자와 보호자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희야. 괘… 괜찮을까?”
“괜찮지 않으면. 그냥 안 먹고 기다릴까? 선생님. 얘는 신경 쓰지 마시고 처방해 주세요.”
약 처방을 끝낸 의사가 다시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약을 먹는다고 100% 임신이 안되는 건 아니에요. 혹시 계속 생리가 없거나 임신이 의심되는 증상이 생기면 꼭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이 약은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선 효과가 없으니, 피임은 계속 하고 앞으로 더 주의하도록 해요. 이번처럼 여자친구 고생시키지 말고.”
마지막 당부를 하며 의사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가볍게 일어서서 나가는 그녀와 달리 그는 엉거주춤 뒷걸음치며 되풀이해 고개를 숙였다.
환자가 처방전을 받고 진료비를 계산하는 동안 의사는 진료실 문간에 기대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나가고 의원의 출입문이 닫히자 김희정 씨가 말했다.
“예뻐 보이는 커플이네. 단단히 주의 주셨죠?”
“네. 다음부턴 더 조심하겠지요.”
“그래도 지금은 방법이 있어 다행이에요. 우리 동생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인데. 아직 새로운 인생까지 추가로 감당하기엔 이르잖아요.”
“나이가 많든 적든 마찬가지겠죠. 더군다나 자기 스스로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라면.”
그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 전 지방의 시립 의료원에서 일을 했어요. 밤에 당직을 서는 일이었는데, 당직이라고 해봐야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병동에서 주치의가 낮에 빠뜨린 처방을 내리거나 간단한 시술을 하고, 가끔 응급실에 일손이 달릴 때 도움을 주는 정도였죠. 대신 제가 주로 해야할 일은 행려 병동에 있었습니다.”
“행려요? 노숙인을 말하는 건가요?”
“비슷해요. 환자의 가족과 집을 찾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행려 환자가 되는 거죠. 제발로 올 때도 있지만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순찰차에 실려오는 경우가 많아요. 의료원에는 행려 환자들을 모은 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선 제가 직접 환자들을 맡아야 했습니다. 행려 병동은 따로 주치의가 없었거든요.”
“원장님이 주치의였던 거네요.”
“일반 병동이었다면 인턴 경력만 있는 당직 의사에게 맡기지 않았겠죠. 의사로선 다양한 환자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환자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구요. 운 좋게 가족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어요. 대부분은 도착할 때도 혼자, 떠날 때도 혼자인 사람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단골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주말에 퇴원을 시켰던 환자가 다음 주말에 또 실려오기도 했어요. 퇴원할 때가 되었는데 병원을 나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분들도 있구요.”
김희정 씨는 서울역 노숙자 쉼터에 봉사를 나가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음이 가난하던 때였고, 마르타 수녀의 손에 억지로 끌려갔을 뿐이었다. 처음엔 매주 하릴없이 쉼터를 찾아오는 이들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찾아갈 곳과 나를 알아줄 이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지린내가 섞인 병동이 그들에겐 집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어느 날, 지적 장애가 있는 젊은 여자 환자가 새로 왔어요. 단발머리에 피부가 희고 웃을 때면 빠진 앞니가 훤히 드러나던 게 생각나네요. 밝은 성격에 붙임성도 좋아서 나이 드신 분들이 대부분인 병동에서 환자와 간호사들이 금새 정을 많이 줬습니다. 초콜릿을 무척 좋아해서 가끔 사주기도 했어요. 입원하고 열흘쯤 되었나. 저녁 회진을 하는데 그 환자가 보이지 않았어요. 가끔 말없이 병원을 나가 사라지는 환자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그럴 기미가 없었기에 사고라도 나지 않았을까 다들 걱정을 했지요. 환자가 돌아온 건 다음날 새벽이었어요.”
“별다른 일 없이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병원 앞에 산책을 갔다가 어느 택시 기사를 만났대요. 아저씨가 초콜릿을 사주면서 좋은 곳에 가서 놀자고 했다고. 택시를 타고 간 곳은 어느 모텔이었고, 거기서 새벽까지 있었답니다. 말을 잘 들으면 다시 병원에 데려다 준다고 해서 그렇게 했대요. 지적 장애가 있는 걸 이용한 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정말 못된 인간이네요.”
김희정 씨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환자 이야기를 듣고 제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뭐였는지 알아요?”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죠.”
“그보다 먼저 응급 피임약을 처방했어요. 약은 제가 직접 샀습니다. 병원에 약이 없어 바깥의 약국에 가야했는데, 약국 문을 열기까지 기다렸던 게 생각나네요.”
“정말 잘하셨어요.”
“그럴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환자는 왜 약을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 상황에서 제가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택시 기사는 잡았나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땐 너무 화가 났지만, 택시 기사를 찾는다고 과연 처벌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한 것도 환자에게 미안하네요.”
김희정 씨는 생각했다. 그 환자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같은 일이 지금 생긴다면 그 기사를 찾아 처벌할 수 있을까. 그때의 그처럼, 지금의 그녀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한동안의 침묵을 깼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진료를 받고 나간 환자의 남자친구였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치즈 케잌 사면서 작은 걸로 하나 더 샀어요. 여자친구가 엄청 좋아하거든요. 이건 간호사님 드시라고요. 아까 죄송했습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응급 피임약이 국내에서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이다. 처음에는 ‘사후 피임약’ 또는 ‘morning after pill’이라고 불렸지만, 사후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약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어 ‘응급 피임약’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국내에서 시판되고 있는 것은 levonorgestrel 성분 (노레보원정, 포스티노 등), ulipristal acetate 성분 (엘라원정) 두 가지이다. 이들 약은 임신에 필요한 배란을 억제하거나 수정된 배아의 착상을 방해해 임신을 막는다. 이미 착상이 이루어진 후에는 효과가 떨어지므로 성관계 후 노레보원은 72시간(3일) 이내, 엘라원은 120시간(5일) 이내에 복용해야 하며, 일찍 먹을수록 효과가 더 좋다. 노레보원 기준으로 24시간 이내에 약을 복용했을 때는 피임 성공률이 95% 이상으로 높은 편이지만, 48시간은 75%, 72시간은 50% 정도로 성공률이 뚝 떨어진다. 엘라원은 노레보원보다 성공률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응급 피임약의 효과는 완벽하지 않으며 복용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할 수 있으므로, 복용 2~3주 이내에 생리가 없는 경우 임신 여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응급 피임약은 고농도의 여성 호르몬을 포함하고 있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종종 생긴다. 흔한 부작용으로 오심이나 구토, 복통, 두통, 어지럼증 등이 있다. 유방의 통증이나 생리 주기의 변화, 질 출혈도 생길 수 있다. 반복해 복용할 경우 부작용의 위험도 그만큼 더 높아질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가장 안전하고 좋은 피임 방법은 어떤 방법이든 사전에 준비해 피임하는 것이다.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기 전, 피임에 대해서만큼은 미리 냉정하고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먹는 낙태약으로 해외에서 사용 중인 mifepristone 성분의 국내 시판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응급 피임약과는 달리 이 약은 자궁의 수축을 일으켜 이미 착상된 수정란을 배출시키는 기전을 가지고 있어 낙태약으로 불린다. 응급 피임약과 기전이 다른 만큼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훨씬 더 크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수정란의 배출이 제대로 안되거나 자궁 수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심한 출혈로 인한 응급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부작용이 있더라도 임신 중절 수술에 비해서는 안전하며 여성의 자기 결정권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시판 허가를 찬성하는 의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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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