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일상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경쟁은 크고 작은 곳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나라 안팎은 각종 갈등으로 들끓는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각종 스포츠, 주식 시장을 설명하는 기사에서도 ‘생존’이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이때의 생존은 사회경제적 맥락인 경우가 많다. ‘날 생(生)’에 ‘있을 존(存)’을 쓰는 ‘생존’은 사실 물리적 영역에 가깝다. 숨을 쉬는가, 심장이 뛰는가, 뇌가 기능하는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의 ‘생존’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유무를 의미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마피아와 갱으로 가득했던 시카고이기 때문이다. 사기와 폭력, 강간과 살인 등 온갖 불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곳. 그런 곳에서는 누구나,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인간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롭게도 한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 거리를 가득 메운 총 든 마피아들 사이에서 언제까지 두려워만 할 것인가. 삶의 유한함을 일상으로 마주하던 1920년대의 사람들은 금기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오락을 만들어냈다. 정해진 규칙보다 자유로움과 즉흥성을 강조한 재즈가 시작된 곳도 이즈음의 미국이다. ‘플래퍼(flapper)’라고 불리던 젊은 여성들은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자기주도적 삶을 꾸려나갔다. <카포네 트릴로지: 로키>(이하 <로키>)의 롤라 킨은 유흥과 자유, 그 중심에 선 인물이다.
가난하고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롤라는 집으로부터 탈출해 또 다른 감옥으로 흘러들어왔다. 1923년, 그는 갱단 소유의 렉싱턴 호텔 바에서 쇼걸로 일한다.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그의 삶은 공허와 불면으로 가득하다. 삶에 실체가 없어서다. 불면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에서 비롯되고, 롤라는 탈출을 염원한다. 하지만 돈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카고에서 여성이 탈출하려면 여전히 남성이 필요하다. 롤라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잣대를 무기 삼아 탈출 계획을 세운다.
D-Day는 결혼식을 앞둔 밤. 롤라는 그를 추앙하는 어수룩하고 돈 많은 회계사 데이빗에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여성을 독점할 수 있다’라는 환상을 자극해 결혼을 약속했다. 자신을 갱단에서 빼낼 돈은 그에게서 마련한다.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은 치기 어리지만 사랑을 믿는 이탈리아 마피아 니코가 돕는다. 문제는 이 둘이 롤라의 객실을 찾아오며 시작된다. 크고 작은 거짓을 감추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롤라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춤을 추고 가슴을 내어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의 탈출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출과 소유라는 정반대의 목적 안에서 롤라의 계획은 예견된 실패에 가깝다. 그렇다면, 목적이 다른 이와는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결국 롤라는 자신을 구원의 이미지로 포장해 줄 수녀복을 입고 홀로 탈출을 시도한다.
생존을 향한 롤라의 분투에는 슬픔이 있다. 롤라는 그 누구보다도 실체 없는 삶에 지쳐있지만, 스스로 실체 없는 말을 내뱉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얄팍하고 수가 훤히 보여도 자신을 향한 추앙을 이용해야만, 슬픔을 감추고 웃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거짓과 폭력이 1923년의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로키>의 진짜는 거기에 있다. 냉소나 무기력,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진흙탕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겠다는 의지와 행동. 20년에 걸친 이야기 속 661호에서 살아나가는 유일한 사람이 롤라임을 떠올렸을 때,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에 초연됐다.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인지와 섬세한 젠더 감수성이 요구되기 시작한 때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여성을 향한 잘못된 시선과 폭력은 더욱 촘촘하고 내밀해졌으며,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보호받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롤라를 떠올린다. 생존을 향한 롤라의 절박함이 모두 옳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게 죽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있을까. 사랑도 자유도 희망도 살아있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10년간 우리 사회도 퇴보한 듯 보이지만, 한해에도 수십 편의 여성 서사 콘텐츠가 소개되고 중요한 일에 앞장서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이 변화 역시 살아있으니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실패해도 어떻게 해서든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롤라의 지구력과 그가 남긴 흔적이 더욱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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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엔터테인먼트 웹매거진 <매거진t>와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10년 동안 콘텐츠 프로듀서와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다. 공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무형의 생각을 무대라는 유형의 것으로 표현해내는 공연예술과 관객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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