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이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자주 뱉게 되는 말이 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무언가를 시작해보려 하다가도, 굳이 지금 해도 되는 걸까를 되뇐다. 하다못해 오랜 친구에게 연락하는 아주 단순한 일과조차 만나지 못할 텐데 조금만 지내보고 연락하자며 미루게 된다. 연락을 주고받다가도 괜히 힘이 빠져서 누군가가 답장을 까먹거나, 곧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서른이 되었고, 어떻게 살지 고민하다 보면 공부해야 할 것들을 비롯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 기대감에 검색창을 두들긴다. 그러나 이내 당장 수업을 듣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게 다 무슨 소용’하고 멈칫하게 된다. 무서운 건, 1년 반이 되도록 이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사람 관계에서도, 내 인생 계획에서도 자꾸만 무기력해진다는 것, 훗날로 미루게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무섭냐면, 아무것도 제대로 시작해보지 못한 채로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익숙해지고 있고, 당장 편안한 나의 몸과 마음에만 안주하다 보니 나를 조금이라도 복잡하게 하는 건 생각도 하기 싫어진다. 단순히 미루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진다. 지금 여기의 내가 잘 버티기를 바라며 잘 챙겨 먹고, 땀 흘려 운동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즉각적으로 내 몸에 신호가 오는 것들만 챙기다 보니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다. 자꾸만 현재의 나를 제대로 쳐다보기보다 합리화하고 싶어진다. 지금도 ‘그나마 몸이라도 챙기고 있는 게 어디야’ 하고 스스로를 토닥이고 싶어지는걸.
"그 근처에서 자주 뭔가를 잃어버렸다. 좋은 것이 생기면 나중에 잘 쓰려고 거기 어딘가에 넣어두곤 했는데 둔 곳을 종종 잊었다. 내가 너무 잘 두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말했고 그 좋은 것을 끝내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상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은 것일 뿐, 거기 다 있을 테니까. (중략)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지냈다. 잃은 것을 잊은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면 그건 거기 있었다."
-황정은, 『연년세세』 68쪽
웃기게도, 제법 바쁘게 하루는 간다. 원래부터 이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퇴근 후 운동을 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차려 먹고, 주말이 되면 푹 자다가 평일에 미뤄왔던 여유를 부리며 산책도 하고, 집안일도 한다. 그러나 틈틈이 급습하는 막막함과 불안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걱정은 되는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멍하니 있다 보면 벌써 시간이 흐르고 난 뒤다.
잃은 것도 없는데 상실감이 올 땐 과거를 들여다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꺼내 보려고 매일 좋은 기억 하나씩을 만들어 두었나보다, 하고. 까먹고 있던 순간의 기억들이 그래도 살아갈 의미는 있다고 토닥인다. 가령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 내게 온 바람을 떠올린다거나, 인적 드문 어느 골목의 저녁 무렵이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거나. 그런 순간들을 꼭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나의 습성에 감사하며 사진첩을 뒤적이기도 하고, 기억을 되짚어 다시 그곳을 찾기도 한다. 그럼 나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냥 잊고 있던 게 된다. 내 손에, 기억에, 마음에 있던 것들이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중략)
살아보니 정말이지 그게 진리였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황정은, 『연년세세』 50쪽
올림픽 경기들을 보면서 선수들의 하루하루는 어땠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매일 훈련한 결과가 모여서 경기장의 그들을 만들어냈을 테다. 이 경기만을 향해 왔을 선수들도 같은 물음을 지녀봤을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고. 반복되는 훈련 속에서 아마 많이 외쳐봤을 것 같다. 당장 결과가 나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조급해지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인내했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특히 비인기 종목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면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체득해 있으리라 생각한다. 매일 멀리 내다 보는 연습을 해 왔으리라고. 그 속에서 외롭더라도 중심을 잃지 말자고. 도달하고 싶은 데에 가려면 지금 원하는 걸 다 할 순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들은 지금 가장 빛난다.
멀리 봐 보기로 한다. 당장의 것들에 매달리지 않기로 마음 먹어본다. 시간이 가는 것, 그만큼 나이가 드는 것에도 조금 무뎌져 보자고. 서른이면 많은 게 바뀔 거라 생각했고, 기대도 했다. 다르게 살아보자고도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버티는 것만으로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러니 지금 하지 못하는 것들에 얽매이지 말자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어떤 하루는 소용 없더라도 다른 하루는 소용 있을 수도 있다고.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들에서 의미를 찾아낼 필요는 없다.
다 품고 갈 수도 없다. 상상한 것들이 다 이뤄지리라고 믿기에는 조금 많이 자라버렸다. 인정할 줄 아는 것도 나이가 드는 일 중의 하나다. 다만 떠밀려 살지는 않게 나를 찾아내자는 것. 멀리 보고 움직이자는 것. 소용 없어 보이는 것들도 모이면 어떤 쓸모가 생겨날지 모른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미래의 내가 집어 들면 소용이 있어질 지도 몰라. 나는 그냥 어딘가에 지금을 두면 되는 것이다. 잊고 살다가 잘 꺼낼 적절한 때를 기다리면 된다. 나는 거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테고,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잊은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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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도서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