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퍼포먼스의 대세는 오랫동안 ‘칼군무’였다. 별다른 무대 장치나 보조출연자 없이도 무대를 꽉 채우는 다인원이 만들어내는 빈틈 없는 열맞춰의 향연. 멤버 하나하나가 서로의 그림자가 된 것처럼, 얼핏 보면 마치 한 사람이 추고 있는 것처럼 합과 각을 맞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칼군무는 춤을 넘어선 기예나 묘기에 가까워 보였다. 칼군무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여기에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그냥 보는 건 재미가 없었다. 아이돌의 각종 무대 영상을 느린 화면으로 재생하며 멤버들의 팔과 다리의 각도는 물론 점프 높이나 무대 위에서 거칠게 쉬는 호흡까지 체크하기 시작했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뮤직비디오 리액션이나 세계관 해석처럼 너무나 익숙해진 유희다.
이처럼 유구한 케이팝의 칼군무 사랑은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데에서 비롯한 즉각적 쾌감 외에도 여러 근거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칼군무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사무치는 연습량이다. 즉, 각도기로 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대는 그 자체로 피 땀 눈물이 흐르는 강도 높은 연습이 뒷받침되었음을 뜻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끈끈한 팀워크와 멤버 간의 유대감으로 이어진다는 추론이다. 장담컨대 팬들을 팀의 서사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강하고 순수한 미끼는 없다. 시간이 흘러 딱딱 맞아떨어지는 단순한 칼군무는 좀 촌스럽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듣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그룹도 칼군무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차세대 퍼포먼스 아이돌로 불리는 그룹 에이티즈의 ‘불놀이야’는 이제는 그렇게 케이팝의 필수 구성요소가 되어 버린 칼군무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진화해 나가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무대다. 데뷔 시절부터 퍼포먼스로 주목받아온 이들의 무대는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칼군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에이티즈의 무대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숨 막히는 칼날보다는 오히려 무대에서 ‘잘 노는’ 것으로 유명하던 과거 그룹들의 이미지다. 빅뱅이나 블락비처럼 힙합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 그룹이 추구하던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습이 에이티즈 무대의 뿌리다. ‘불놀이야’도 그렇다. 먹잇감을 찾아 헤매듯 자신의 파트에 맞춰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던 멤버들은, ‘여긴 지금 터져버릴 것 같은’이라는 산의 파트가 내리는 신호에 맞춰 마치 마법처럼 하나의 대형을 이뤄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 밀고 당기기는 곡이 진행되는 내내 이어진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무대 사이사이 존재하는 여유 구간은 무대를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다양한 요소를 삽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숨구멍으로 기능한다. 노래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산, 여상, 민기 같은 퍼포먼스 멤버들의 화려한 독무나 칼군무와 함께 케이팝 명물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3단 고음을 발사하는 종호의 목소리, 눈 깜빡하는 사이 치고 빠지는 백업 댄서들이 남기고 간 잔상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3분 30초가 갓 넘는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케이팝을 통해 즐겨온 다채로운 요소들이 한 아름 쏟아진다. 물론 그 모두를 아우르는 건 케이팝의 중심에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 잡은 칼군무다. 에이티즈의 하이브리드 군무가 만들어 낸 새로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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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