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
유년 시절, 『작은 아씨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좀 부끄러웠다. 소녀들을 숙녀로 만드는데 목표가 있는 소위 ‘소녀문학’의 전형 같아 보였달까. 네 자매가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늘어뜨리고 드레스를 차려입고 가족사진의 모범답안처럼 앉아 있는 표지는 그런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정소설이니 소녀문학 같은 분류방식 자체가 부당한 방식으로 여성의 글을 밀어내는 말이며, 특히 당대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 작가일수록 남성 비평가들이 이런 부당한 라벨을 붙이고는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스파 공동체(spa friendship)를 만들어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던 여성지식인-예술가 공동체의 효시와 같았던 ‘블루스타킹’ 클럽의 존재라든가, 19세기 미국 최초의 백만 부 소설인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지은 해리엇 비처 스토우가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기획과 상상력을 펼쳤고,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이 여성참정권운동에 참여했고 여성의 자립과 여성공동체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훨씬 후였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도 조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 마치. 글쓰기와 달리기를 좋아하고, 연극대본을 쓰며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스스로 결정하는 조. 특히나 조가 정신없이 글을 쓸 때를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는 같이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루이자 메이 올콧은 글을 쓸 때 아주 맹렬했다고 한다. 여성작가들의 글쓰기 방식과 습관에 대한 글을 쓴 『예술하는 습관』의 메이슨 커리는 루이자를 집필광이라고 불렀고, 이런 글쓰기 습관을 ‘폭필'이라고 표현했다. 폭연도 폭음도 아니라 폭필이라니. 과연 『작은 아씨들』 400쪽을 2달 만에 썼고, 한참 불이 불으면 식사도 거르고 잠도 잘 안 자면서도 달리기만은 꼬박꼬박했다고 했다. 어쩐지, 조가 작품 속에서 그렇게 달리더라니.
생각보다 언제나 논쟁 속에 있었던 책
『작은 아씨들』은 발표 당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무시나 혹평으로 일관했고, 197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가치가 부여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작품을 지지했던 건 아니다. 여성의 소비지향성과 허영심에 대한 다소 부당한 당대의 여성혐오적 시선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혹평을 하는 이도 있었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로리 등의 존재가 결국은 여성자립공동체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플롯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평도 있었으며, 독보적인 캐릭터인 조마저도 이후에 결국은 선머슴 기질을 버리고 현숙한 성인 여성으로 자라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도 거셌다.
모두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이지만, 출판사와 독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책을 읽은 이들은 매우 의아해했다고 한다. 아니 조와 로리가 정말 안 이어진다고? 그럼 조의 짝은 어디에 있나? 루이자는 당시 독자와 출판사가 원하는 바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조는 문학 독신여성으로 남기고 싶었어. 하지만 수없이 많은 열광적인 젊은 아가씨들이 편지를 보내는 거야. 로리가 아니더라도 조를 누군가와는 반드시 결혼시켜달라고 말이야. 이런 엄청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조에게 재미있는 짝을 지어주었지. 분노의 병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들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은근히 기대되기도 해” 이렇듯 작가는 조에게 짝을 만들어준 게 ’타협의 결과‘임을 작품 속에서도 작품 바깥에서도 드러냄으로써 후대에 이 작품의 결론을 변주할 수 있는 일종의 체크포인트를 만든다.
그레타 거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서 2020년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2020년의 조는 출판사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바꿀 수 없도록 판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판권은 내가 가질래요. 돈 때문에 내 여주인공을 결혼시켜야 한다면 그 대가는 받아야겠어요.”) 영화 안에서 프리드리히와의 재회 장면은 장편소설 작가로 드디어 데뷔하는 조 마치가 작품설명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도록 정교하게 재배치된다. 2020년 판본의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배치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또한 로리와 에이미라는 캐릭터를 원작자의 의도를 살려 복원하고, 원작과는 달리 조가 세우는 학교의 문호를 여학생에게도 개방한다. 이쯤 되면 감독이 『작은 아씨들』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논쟁사를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조와 에이미, 그리고 로리
1948년 머빈 르로이 감독의 『작은 아씨들』에서 이웃집의 수줍은 소년 로리는 온데간데없다. 원작 소설에서 가정교사와 학생 관계로 설정되었던 (나중에 메그의 남편이 된) 브룩과 로리는 무려 군대에서 만난 사이로 나오며, 이때의 로리는 마치 거의 남성우월주의자처럼 군다. 최악은 로리가 조에게 한 청혼이 거절당하는 장면이다. 조가 난 너를 연인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고 하자 로리는 조에게 넌 개망나니 같은 남편을 만나 고생만 하다가 죽을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질리안 암스토롱이 그려낸 1994년의 로리는 이보다는 훨씬 더 나은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자들과 동성 친구처럼 지내는 작고 유약한 소년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2020년에 와서야 로리는 좀 더 철없고, 장난기 많고, 다소 나르시시트처럼 보이는 인물로, 원작 소설에 가장 가깝게 변한다. 조가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조가 남성적이거나 로리가 여성적이어서가 아니라, ’둘이 너무 똑같아서‘다.
에이미는 『작은 아씨들』에서 조와 가장 많이 부딪히면서 함께 성장해가는 인물이다. 그 전 작품들에서 에이미는 조보다 한참 더 어리게 그려진 반면, 플로렌스 퓨가 분한 2020년의 에이미는 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이대의 소녀로 나온다. 원작과 이전 영화들에서 에이미가 다소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강하며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철없는 막내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그레타 거윅의 영화에서 에이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이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인물로 나온다. 에이미는 결혼은 경제적인 거래로 생각하는 걸 경멸하는 조에게 주눅이 들거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세속적인 욕망을 역겨워하는 이상주의자 로리가 메그에게 허영심을 발견했을 때 실망감을 표현하자 메그가 수치심을 느끼고 조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에이미는 심지어 로리에게 잘보이고 싶을 때조차도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자칫하면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자매의 삼각관계라는 막장으로 흐를 법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로리의 존재는 조와 에이미의 유대관계를 깨트리지 않는다. “자매끼리 미워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조)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에이미가 정신을 매우 똑바로 차리고 있어서다.
여성동성사회성의 작동원리
남성들의 동성사회성과 여성들의 동성사회성은 어떻게 같고 무엇이 다를까. 동성사회성(homosociality)은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개별적인 친밀한 관계들의 구체적인 양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맺기의 전형화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브 세즈윅은 ’동성 사회적 욕망‘(homo social desire)’에 대한 설명에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남성들끼리의 유대감은 대상 여성에 대한 욕망보다 더 깊고 강하며, 이때 여성은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남성들의 (상호 모방과 경쟁과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 유대를 위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다. 소설과 영화 등에서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둔 여자들끼리의 경쟁 관계는 여자들 간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반면, 여자를 매개로 한 남자들끼리의 경쟁은 더 지속적인 유대관계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에는 그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조와 에이미의 경우에는 로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둘의 관계가 파괴되지도 않고 로리를 매개로 더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여성 동성 사회적 욕망을 표출하고 구상하는데 있어서 남자라는 존재는 그다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여성간 유대가 만들어지는 플롯에 남자의 존재는 욕망의 대상이나 사라지는 매개자라기보단 존재감이 덜한 ’조연‘을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아씨들』에서의 로리처럼 말이다.
여자들의 사회에서는 너무 남자를 좋아해도 싫어해도 다 문제가 된다. 여자들 간의 감정적 유대가 깊어지는 순간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 사실은 이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는 자기도 이제 사랑받는 게 중요하다며 마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조) 마미의 답은 간단하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중요한 건 로리나 프리드리히가 아니라 여자의 삶에서 사랑은 어떤 위치여야 하는가라는 내용을 담은 이런 대화 자체다. 조와 에이미 역시 로리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에이미는 조에게 요즘 글을 쓰고 있는지 묻는다. “우리 인생 얘기야. 가족끼리 티격태격하고 웃고 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어? 중요할 것도 없는 얘기잖아” 조가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얘기라며 스스로의 작품을 평가절하하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가자 에이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야. 계속 쓰지 않으면 중요한 이야기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조는 새삼 감탄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현명해졌대?” 에이미의 대답은 이렇다. “항상 그랬어. 언제나 내 단점만을 찾아내서 몰랐을 뿐이지” 이 자매들은 이제 서로의 흑역사를 공유했던 유년 시절을 넘어가는 중이고, 이 시기가 지나면 관계는 또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여자들의 사회‘에는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 같은 공식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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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allly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