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이기고 지는 일이 있을까? 사랑은 게임도 승부도 아니지만, 어쩐지 매번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마음의 기울기가 늘 평행을 이룰 순 없다면, 한 사람은 관계에서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하게 되곤 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면, 사랑이 너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계산도 밀당도 자존심도 아무 소용이 없을 만큼 빠져버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해경의 노래 〈권태〉([나의 가역반응], 2017)를 들으며 한 생각이다. “오늘은 따라 갈래요/안 된단 말 하지 마요/나는 그대에게 하고픈 말이 많아/하지만 늘 잊어버리죠” 오늘은 그대를 따라가겠다고 호기롭게 던져놓고서는 안 된단 말은 하지 말라고 덧붙이는 마음에는 어쩔 수 없음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명령문이지만 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절은 거절해요. 왜냐하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 거절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서요. 그대를 따라가겠다는 의지도, 안 된단 말은 하지 말라는 부탁도, 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이원하의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에도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제주에서 혼자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때로 너무 크고 깊어서 무한한 자연 같다. “물이 몇 장으로 이루어져야 바다가 되는지/수분은 알까요”(「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라며 마음의 양을 따져보다가도,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그게 안 됩니다”(「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라며 마음의 조절에 실패하고 만다. 깊이를 따져볼 수도 크기를 조절해볼 수도 없을 만큼 사랑에 빠진 시인이 속수무책의 심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코스모스는 매년 귀밑에서 펴요//귀밑에서 만사에 휘둘려요/한두 송이가 아니라서/휘둘리지 않을 만도 한데 휘둘려요//어쩌겠어요//먹고살자고 뿌리에 집중하다보니 하늘하늘거리는 걸 텐데/어쩌겠어요”(「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두 손이 묶여 어찌 할 도리가 없다니 차라리 속 편해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어떠한 조치가 필요해요”(「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시인은 그 조치를 알아내려 혼자 풀밭에도 나가보고 밤하늘에 무럭무럭 핀 별들도 바라보고 살결이 푸른 바다도 관찰하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무지개도 살핀다. 그런데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안고 자연 속에 있다 보니, 놀랍게도 시인은 자연의 이치를 다 알아버리고 만다. “하늘이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이유가 다 보인다//(...)//식물이 비를 기다리는 이유를/하늘은 알까, 안다면/진한 감정 하나 때문이라는 것도 알까//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구름보다 안개를 부른 것까지도 알까//(...)//알긴 뭘 알까”(「하늘에 갇힌 하늘」)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랑에 대한 조치를 찾아내려다보니, 다시 말해 당신을 너무 사랑하다보니, 하늘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도, 식물이 비를 기다리는 이유도, 무지개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이유도, 다 알아버리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통달해도 미지로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는 여전히 지는 사람이다. 결국 시인은 대단한 조치도 뾰족한 대책도 찾지 못하지만, 시집의 제목과 ‘시인의 말’에 능청스럽기도 귀엽기도 절박하기도 한 거짓말을 꺼내놓는다.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시인은 여전히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지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능청스럽고 귀엽고 절박한 사랑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매력에 유혹당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속수무책의 일이라서, 이원하의 시라면 앞으로 언제라도 조치도 대책도 없이 기꺼이 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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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