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현 “이야기가 거꾸로 삶에 용기를 주는 것 같아요.”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펴낸 정기현 소설가. “귀여운 것 같아요. 뭔가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
글 : 염은영 사진 : 표기식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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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설의 세계를 지어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냐면요. 유튜브 채널 <민음사 TV> 인기 코너였다가 최근  팟캐스트로  다시 돌아온 <말줄임표> 정기현 편집자의 이야기입니다. 가만 가만한 그의 책 이야기를 듣는 것을, 그가 만드는 아름다운 책 읽기를 좋아해오신 분들께, 그의 첫 소설집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운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소설가 정기현을 소개하기까지 너무도 많은 말을 하고 말았지만, 앞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그의 소설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으로 만난 정기현 소설가는, 일상의 틈을 내시경으로 요리조리 살피다가 금세 천연덕스럽게 환상의 세계로 넘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커피를 홀짝일 것만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야기가 거꾸로 삶에 용기를 주는 것 같다”고 믿는 천생 이야기꾼입니다. 그런 그가 쓴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을 품은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각기 다른 새미, 기은, 승주의 세계인데요. 저마다 다른 세 사람은 마치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사실상 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이 소설집을 통해 “가만히 있다가 잠깐 현실 감각이 이상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가족들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내 가족인가?’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그런 순간”을요. 과연 그와 그의 소설은 정말 “귀여운 것 같아요. 뭔가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빅풋」, 26쪽)

 


귀여운  같아요뭔가 엉뚱한  같기도 하고.”

우리가 기다려온 미지의  사람소설 쓰는 정기현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최근 3년간 단편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셨기에 이렇게 소설집으로 만나 뵙기를 기다려온 분들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출간 소감을 여쭤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썼으니 좀 오래 썼는데, 그동안 공모전에 내고 떨어지고가 많았어요. 재작년 그러니까 2023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문학 웹진 <LIM>이 창간했는데, 신생 매체니 투고를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편집부에 문의했어요. 그렇게 보낸 소설 원고가 게재되면서 활동을 시작했고요. 그 작품이 「농부의 피」였고, 이걸 읽고 스위밍꿀 황예인 편집자께서 연락을 주셔서 지금의 소설집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참 좋았어요. 소설집에 실릴 소설들을 모아 놓고 보니, 각기 다른 소설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성기게 읽을 지점이 보이는 것, 또 베테랑이신 예인 편집자님의 언어로 포장되는 것, 저와는 다른 편집자의 교정 스타일을 보는 것 모두 너무 재밌었어요. 과정 중에 힘든 게 하나도 없었어요.

 

좋고도 드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책이 나오기 전까진 다 재밌었어요. 이제부터가 떨리는 일의 시작인 것 같아요.

 

왜 떨리세요?

앞으로 만나게 될 반응도, 인터뷰 자리나 행사들도 떨려요. 편집자로서 이런 일들에 참여했던 마음과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도 맞닥뜨리니 훨씬 다르네요. 그래서 최근엔 잠을 조금 설치는 날들이었고, 자다 깬 김에 읽거나 쓰면서 지내고 있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본격적인 출간 기념행사가 곧 이어질 텐데요. 그에 앞서 지난 2025 서울국제도서전을 통해, 독자분들을 처음 만나셨다고요. 어떠셨어요?

저는 행사의 일환으로 사인회를 했어요. 이번 도서전은 사전 예매하신 분들만 오게 되신 터라 정작 제 지인들은 많이 못 왔어요. 일찍 예매하신 분 중에서도 저를 알고 오셔야 하니 제 자리까지 많이 안 오시겠지 했는데요. 저를 잘 모르셔도 오가며 들르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앉아 있으면서 독자분들과 인사를 많이 나누고 온 것 같아요.


저는 먼저 말을 잘 이끌어가는 편이 아니어서 몇 마디 말들을 준비해갔는데요.(웃음) 예를 들면, 도서전은 잘 둘러보셨는지, 요즘 가방 꾸미는 분들이 많으시니 이런 키링은 어디서 사셨는지와 같은 질문들을요. 이런 물음들을 던지며 대화를 나눴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어요. 오신 분들 연령대도 다양해서 좋았고요. 처음엔 준비한 걸 한다는 느낌이었다면, 갈수록 점점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아요. 행사가 길어지는 것 같으니 편집자님이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하셨는데, 오히려 ‘좀 더 할 수도 있겠는데?’ 싶었어요.

 

뭐라고 적어주셨어요? 보통 책의 한 문장이나 건네고 싶은 메시지를 정해서 써주시잖아요.

한 문장을 일괄적으로 쓰기에는 좀 딱딱한 것 같아서, 책 제목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서 따와서 ‘OO 마음 있는 사람’ 하고 적어드렸어요. 제 앞에 앉으신 분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의 말들로요. 어떤 분께는 씩씩한 마음, 어떤 분께는 기쁜 마음, 또 어떤 분께는 즐거운 마음…… 이렇게 써서 드렸어요.

 

이 인터뷰를 읽고 이 사실을 처음 아시겠어요, 그날 만난 독자분들이요.

그러시겠네요.(웃음)

 



걸으며 비우고 또다시 걸으며 채우기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임선우 소설가의 추천의 글 덕분에 ‘산책자의 소설’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인터뷰 전에 작가님과 매일 자주 산책하신다는 길을 함께 걸었는데요. 이 길은 주로 혼자 걸으셨나요? 그럴 때 주로 이야기가 스미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평소에 산책할 때는, 특히 평일엔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니까 집에 가서 뭔가를 하려면 뭐든 잘 안되더라고요. 회사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요. 그걸 좀 없애려고, 머리를 비우려고 하는 산책이 오늘 함께 걸은 길에서 주로 이뤄져요. 순수한 산책이라기보다는 비워내려는 의도가 있는 산책이에요. 이런 산책에서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는 없고, ‘오늘 진짜 걷고 싶은데 걸어볼까?’ 하면서 산책할 때야 이야기가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걸을 때는 이상한 간판들도 눈에 많이 띄고요.


최근에 이사했는데,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소설들은 이사하기 전 동네에서 주로 썼어요. 새로 이사를 온 동네는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그리고 1학년 때까지 한 2년 정도 살았던 동네이기도 해요. 익숙한 구도심 같은 데가 있고 지금 막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있어서 그 섞여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되게 재미있어요. 이런 데를 지나가면 자전거 타는 애들이 한 마디 확 내뱉는 것들에 꽂힐 때가 있곤 해요. 그런 건 곧장 메모해두기도 하고요. 그렇게 이미 힘들지 않은 상태에서 산책할 때 서사와 많이 연결되는 것 같아요.

 

<민음사 TV>가 시작과 동시에 붐업을 하고, 인기 코너에 편집자분들이 고정 출연하는 걸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편집자=PM(Project Manager)이라는 측면에서 업무 과중이 아닐까 섣불리 짐작하기도 했었거든요.

처음 유튜브에 출연한 게 2019년도예요. 당시 민음사에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찍은 건데, 신입의 마음으로 ‘회사의 일이다’ 하며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사회적 체력은 좀 약한 편이지만,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면 촬영이든 뭐든 할 수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편집, 유튜브, 또 지금은 도서 팟캐스트 <말줄임표>를 진행하고 계시고요. 더불어 소설까지 쓰시는데다가 취미로 양봉까지…..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니, 정기현 작가는 과연 헤르미온느인가 싶었답니다.

정말 제가 여러 명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헤르미온느가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 터너를 가진 거, 그거 진짜 부러워요. 너무 부러워요. 『해리 포터』 이야기 설정상 다른 시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면 큰일 나잖아요. 저는 진짜 안 마주칠 자신도 있어요.(웃음)

 

아주 바쁜 상반기를 보내셨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집 출간, 대외적으로는 서울국제도서전 준비를 하셨을 텐데요. 이 두 가지 굵직한 일을 마무리하고 난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여전히 할 일이 많아요. 하반기에 출간될 책 일정들을 지키려면 가을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편집들이 남아 있고요. 또 소설 마감들도 있어요. 이 역시 부지런히 써야 해요. 더불어 이제 막 책이 나왔으니, 본격적인 행사 시작이어서 어떤 걸 해볼까 편집자님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시즌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북토크도 좋지만, 같이 걷는다든가, 편집자님이 다니는 요가원에서 함께 요가를 해본다든가……할 수만 있다면, 몸을 함께 움직이는 행사를 해보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그러다 아주 장난스럽게 얘기하게 된 건데, 파쿠르* 원데이 클래스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해요.(웃음)


파쿠르: 프랑스에서 유래한 이동 기술로, 맨몸으로 도시나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곡예 활동.  

「마음대로 우는 벽세계」의 그 파쿠르요? 그거 너무 재밌을 것 같은데요.

몸 쓰는 걸 같이 하면 되게 빨리 친해지더라고요. 그런데 평상시에 그럴 기회는 별로 없고요. 매일 만나는 회사 친구들하고도 같이 몸을 움직이는 걸 해본 적은 거의 없잖아요. 특별히 시간을 내서 무언갈 한다면, 독서 모임 정도고요. 제가 친구들과 파쿠르 원데이 클래스를 들어봤는데, 다들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도 아니고 거의 초등학교 체육 시간을 마친 아이들처럼 얼굴이 엄청 빨개질 정도로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까 무척 좋고 신기했어요. 처음 해보는 거라 서로 막 부끄러워하면서도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이건 좀 기대가 되는 행사입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행사고요.

(웃음).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내린 이야기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뒷부분에는 각각의 단편 소설들이 어디에 발표되었는지를 정리한 친절한 목록이 있어요. 발표 시기가 제법 촘촘했는데, 틈틈이 새로운 소설을 여러 편 쓰면서 발표한 것이었나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소설집은 「농부의 피」를 통해 출간 제안을 받았는데요. 계약 후에 편집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게 이런 소설 원고들이 있어요’ 하고 보여드렸던 것이 많았어요. 그 과정에서 소설집에 싣게 될 작품들이 선택되었고, 이 작업을 통해 완전히 묻어두게 된 원고들도 생겼어요. 정리하면,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그동안 써온 것들을 고치고 다듬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조금 빠르게 발표할 수 있었어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를 보내고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중편 소설, 장편 소설 모두 새로 쓰는 것들이에요.

 

어떤 마음이세요? 새로이 0에서 출발하는 마음은.

막상 다시 끝에 이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대감이 들어요. 그 기대감이라는 건, 첫 소설집은 그간 쓴 걸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니 이다음 책은 뭐가 됐든 바뀔 거라는 생각에서 온 것 같아요. 초조함 역시 동시에 들기도 하지만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커요. 소설을 쓰고 제 책을 만드는 입장이 되어 보니, 그동안 편집자로 일할 때 작가님들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이 조금씩 와닿는 것 같아요. “그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런 말씀들이 이제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틈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틈이라는 건 관계의 틈, 시간의 틈, 물리적 공간의 틈 등 다양한데요. 남들은 보지 못하는 ‘틈’의 세계를 아주 오랫동안 응시해온 사람이 풀어내는 이야기 같아요. 예를 들면, 두 번째 수록 작품 「발밑의 일」을 읽고 나서는 물리적 틈에서 일어난 일들을 실제로 보고 쓴 것 아닐까 하는 못 말리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어요.

일단 저는 공간에서 출발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발밑의 일」 같은 경우,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 큰 규모의 대학병원이 있었는데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 병원이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어요. 학교 가는 길에 꼭 그 병원을 지나야 했는데, 이렇게 크게 지어놓고는 왜 운영을 안 할까, 어떤 다툼을 이토록 오래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 다니곤 했어요. 또 ‘저기에 누구든 들어가 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 저는 무서워서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소인인데, 저는 자주 제가 소인이 되면 재밌겠다고 상상하곤 했어요. 소인이 되면 똑같은 걸 봐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평소에 하던 잡념에 가까운 상상들이 익숙한 풍경의 공간을 바라보며 품었던 의문과 잘 섞이고 합체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됐어요. 또 보통 동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데서 소인은 대개 요정 같은 느낌이어서 예쁜 살림을 꾸리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데, 저는 이들이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매일매일 투쟁하고, 극심한 주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자기네들의 문제, 특히 생존 문제를 겪으면서 공생이자 기생 형태로 살아가는 걸로 설정하게 되었고요.


또 언젠가 너무 힘든 날이 있었는데요. 퇴근하고 집에서 쉬는데 유튜브 같은 거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니 계속 소리에 노출돼 있어선지 진짜 조용한 데 있고 싶더라고요. 그 욕망도 이 소설에 섞이게 되었고, 그게 임준섭의 집처럼 고요한 공간으로 발현되었어요.

 

「발밑의 일」의 임준섭의 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교회, 「농부의 피」의 텃밭,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의 장범규의 집 등 작중 인물의 안식처가 될 만한 공간이 등장해요.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에게 이런 공간을 주시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졌어요. 작가님께도 그런 공간이 있으신가요?

회사에 있을 때는 아까 그 길도 그런 공간이 돼요. 또 다른 곳도 있는데, 근처 아파트 단지 놀이터예요. 거긴 낮에 사람이 없거든요. 정말 한 명도 없어서 그곳에 잘 앉아 있곤 해요. 앉아 있다 보면 회사 사람들을 가끔 만나고요.(웃음) 그리고 양봉하는 곳이 그래요. 그곳에서 참 많이 에너지를 충전해서 돌아와요. 지금은 양봉 터를 옮기게 됐지만요.

 

집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나요?

그럼요. 너무 그냥 당연히 집밖에 없어요. 평소엔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거의 집에만 있거든요. 제게 집은 안식처예요. 회사에서 돌아와 머리를 비워낸 다음엔 무척 편해지는데, 그럼 밥 먹고 그냥 바로 잠들어요. ‘저속 노화 선생님’께서 들으면 싫어하실 것 같은 생활 습관인데(웃음) 그래도 일단 자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작업하세요? 대체 언제 쉬시나요?

두세 시간 정도 하는 것 같아요. 잠은 많이 자는 편인 것 같고요. 나눠 자긴 하지만 그래도 합치면, 하루에 예닐곱 시간 정도는 자니까요. 주말에는 그보다 많이 자고요. 잘 때면, 목에 딱 맞는 베개를 베고 눕는데요. 그러다 스르르 잠들어요. 그때가 평일 중 제일 행복한 때예요. 주말에는 2~3주에 한 번 양봉하러 내려가요. 가벼운 취미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어요.

 

양봉을 1년이나 배우셨다고요.

처음엔 한 달 과정을 배웠는데, 너무 재밌어서 1년 실전반을 등록해버렸어요. 사실 처음 듣는 한 달 과정은 벌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우는 정도거든요. 이 수업을 듣고 나면 실전반을 등록할 수 있어서 바로 듣게 됐는데, 수강생들 각자 벌통을 관리할 수 있는 터가 있어서 거의 매주 갔었어요. 한 시간은 이론, 한 시간은 벌통 돌보기를 했는데, 양봉이라는 게 정말 사계절을 거치며 해봐야 하는 일이라는 걸 1년 해보면서 알게 됐어요.

 

양봉이 소설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전혀 무관심했던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 측면에서 그래요. 한 번 인식하고 나니 그것만 보이고, 항상 신기하고요. 벌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하니 정말 많은 게 바뀌었어요. 벌에 대한 모든 걸 찾아보게 되고, 찾아보니 벌과 관련된 영화, 책 같은 것이 이미 정말 많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고요. 또 새롭게 배운 건 벌들이 꿀을 채취하는 식물로는 그냥 꽃만이 아니라 관목이나 회양목 같은 것도 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의외의 밀원(蜜源)은 토끼풀이었는데요. 왜 토끼풀 하면 으레 잡초라고 생각하잖아요. 거기에 꿀이 있을 줄은…… 지금은 토끼풀 씨앗을 사다가 뿌려놓기도 했어요.

 

벌을 키우는 것이 무언가를 심기고 자라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네요. 작업 자체가 소설 쓰기와 닮은 것 같고요.

맞아요.




새미기은승주의 천연덕스러운 멀티버스 

 

공식적으로는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시면서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하지만 작가님의 행보에 조금 더 관심 있는 독자라면, 『유령들』 1호에 발표하셨던 「검은 강에 둥실」이 먼저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스위밍꿀, 2024)를 읽고 “어?”하는 독자분들이 계셨어요. 이 앤솔로지에 「검은 강에 둥실」이 실려 있는데, 『유령들』(고스트프레스, 2021)에 실렸던 걸 기억하셨던 것 같아요. 『유령들』은 동료 화진 씨가 만들었던 잡지예요. 화진 씨는 그동안 제가 쓴 소설을 많이 읽었었는데, 창간호를 만들면서 「검은 강에 둥실」을 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때는 제가 쓴 소설을 알리는 데 용기가 부족할 때여서……(웃음)

 

그래서 이름도 숨기셨어요?

(웃음).

 

그때는 정새미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셨지요. 당시엔 그런 생각을 못 했지만,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는 주인공 이름이 새미인 만큼, ‘새미가 들려주는 새미의 이야기’라는 감상을 주기 위한 고도의 기획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면 정새미라는 필명을 오래 사용하셨던 것일까 싶기도 했고요.

다 아니에요.(웃음) 처음엔 그냥 본명으로 할까 했는데, 그 당시에는 공모전에 낼 때에도 이름을 다 바꿔서 내던 때였거든요. 혹시 누가 알아볼까 봐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소설 속 인물인 새미의 이름을 따 정새미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거였어요.

 

그럼 방금 전 인터뷰 사진 촬영에서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굿즈인 ‘정기현’ 명찰을 들고 있었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데요.

그러게요. 그동안 제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자주 겹칩니다. 새미, 기은, 승주. 이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요. 그 이름마다 부여된 캐릭터의 특징이 있기 때문일까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새미, 기은, 승주의 특징을 설명해주신다면요.

새미는 약간 초연한 면이 있는, 조용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의외로 모험에 나서는 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에요. 반면 기은은 혼자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 무엇이든 망설이고, 또 지난 일에 대해 ‘그때 왜 그렇게 말했을까’를 곱씹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승주는 좀 당차죠. 본인이 예상한 대로 믿고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는데, 결론이 그게 아닐 때가 많아서 자주 무너지기도 하지만 씩씩하고요.

 

「농부의 피」의 승주는 소설을 처음 발표한 당시엔 기진이었는데요. 이름을 바꾸신 특별한 까닭이 있었나요? 

이름에 대한 논의는 편집자님께서 먼저 물꼬를 틔워주셨어요. 소설집을 묶는 과정에서 기진의 이름을 바꿔도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기진의 이름을 바꾼다면 승주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님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가 절로 느껴져요. 너무도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천연덕스럽게 환상적인 장면으로 넘어가는 점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그 천연덕스러움의 원천이 궁금했어요.

제가 편집한 책 중에 유일한 역서로 마이조 오타로의 『인간의 제로는 뼈』가 있어요. 그 작가를 무척 좋아하고, 그가 소설을 통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진짜야”라고 전하는 메시지도 너무 좋아했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전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바로 되어버리는 것, 그런 게 너무 거짓말 같은 생각이잖아요. 저는 그런 게 이상하고 재미있어요. 제가 여기서 이렇게 쓰면 사실이 된다는 것이 소설 자체의 재미고, 천연덕스러움이고요. 그런 천연덕스러움이 소설이라는 장르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좋게 작용하는 것 같아 적극적으로 이용해 쓰고 있어요.

 


이토록 이야기가 좋은 사람

 

힘들 때마다 이야기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나아진다’(문학 라디오 <문장의 소리> 797화 1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작가님께 이야기의 힘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요?

뭔가 그냥 이렇게 힘없이 있다가도 예를 들면, 드라마 속 인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완전히 우울함을 싹 날려버릴 때가 있잖아요. 내가 너무 힘에 부치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도 끝까지 잘해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 이야기가 되고요. 요즘 제가 재밌게 보는 것으로, 민음사 커뮤니티에 북클럽 회원분들이 독서 경험을 나누는 온라인 공간이 있는데요. 거기에 서동요 탭이 있어요. ‘내가 7월에는 이 책을 읽을 겁니다’라고 하면, 서동요가 그러했듯 노래에 담긴 이야기가 진짜가 되는 것처럼, 일단 외쳐놓으면 진짜 한다는 취지의 게시판이거든요. 그곳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가 거꾸로 삶에 용기를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한다고 이야기하면 진실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제 뉴스를 보는데 러브 버그가 기승인 이유가 새들이 아직 러브 버그를 먹이라고 인식하지 못해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근데 그 말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럼 먹이로 인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러브 버그도 다른 벌레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먹이라고 인식하지 못하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뉴스를 전하는 앵커가 하는 말이 좀 웃기게 느껴졌어요. 되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모습까지도요. 그런 게 항상 재밌어요. 그것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니까요.

 

『슬픈 마음 있는 사람』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어떤 분들께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셔요?

이 책을 읽고 ‘무언가 하고 싶어졌다’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때, 보람차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께 이야기가 가닿기를 바라냐면, 음…… 대신 이런 걸 느껴보시면 좋겠다는 건 있어요. 뭔가 가만히 있다가 잠깐 현실 감각이 이상해질 때가 있잖아요. 가족들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내 가족인가?’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그런 순간이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감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시작의 만남에서는 항상 또 다른 시작에 대해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왕성한 젊은 작가로서, 그다음 행보는 무엇인지요. 

하반기에 중편 소설을 발표할 예정이고, 지금은 격월간 문학잡지 『Axt』에 장편 소설 「살구 농원 술래잡기」를 연재하고 있는데요. 내년 초쯤 연재가 끝나면, 같은 해 하반기 정도에 출간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랜만의 반차였을 것 같습니다. 오전에 업무를 짧게 하고, 오후엔 연달아 인터뷰를 마친 오늘은 어떤 일과로 마무리하시는지요.

글쎄요. 집에 가서 어제 사다 놓은 김치찌개를 마저 먹고 나면 뭘 해야 할까요.(웃음) 고양이랑 누워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그런 밤이셨으면 좋겠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래도 또 습관처럼 일어나서 쓰시려나요?

지금 약간 긴급한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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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1

<J.K 롤링> 저/<강동혁> 역

출판사 | 문학수첩

악스트 Axt Art&Text (격월) : 7/8 [2025]

편집부

출판사 | 은행나무

인간의 제로는 뼈

<마이조 오타로> 저/<정민재>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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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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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은영

쓰고 엮고 매만집니다. 더불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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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롤링

새로운 판매 기록을 세우고 수많은 상을 수상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다. 1965년 7월 영국 웨일스의 시골에서 태어난 작가 조앤 롤링은 딸아이를 데리고 궁핍하게 살아가는 무명의 작가 지망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조앤 롤링은 다섯 살 때 이미 홍역에 걸린 토끼에 관한 이야기를 썼으며 언제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희한한 사건이나 모험담을 꾸며내어 들려주는 등 일찍부터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롤링은 엑스터 대학에서 불문학과 고전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고 졸업한 뒤에는 국제 사면 위원회에서 임시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히 글을 썼다. 199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장마저 잃게 되자 포르투칼로 영어강사를 하기 위해 가게 되고 현지 기자와 결혼 딸 제시카를 낳았다. 3년도 되지못해 그 결혼은 파경을 맞고 그녀는 에든버러로 돌아오게 된다. 일자리가 없어 3년여동안 주당 69프랑밖에 되지 않는 생활보조금으로 간신히 살아가야 했던 그녀는 마침내 오래 전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간에서 생각해냈던 해리 포터 이야기를 끝마치기로 결심했다. 미친듯이 글을 써낸 끝에 1996년 6월, 그녀는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다. 처음 몇번은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는데, 저작권 대행업자 크리스토퍼 리틀을 만나게되고 그는 롤링의 책을 블룸스베리 출판사에 팔아주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고아소년 해리 포터가 친척집에 맡겨져 천대받다가 마법 학교에 입학하면서 마법사 세계의 영웅이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는 환상소설로, 처음에는 출판사로부터 여러차례 거절당하다 서서히 소문이 나며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곧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이 시리즈는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세계 최우수 아동도서로 선정되었고, 유명한 스마티즈 상을 수상했으며, 많은 호평과 각종 상을 휩쓰는 등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 시리즈는 5억 부 이상 판매되었고, 8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여덟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되었다. 후속작인 『해리포터와 비밀의방』, 『아즈카반의 죄수』 3편은 1 년넘게 미국 [뉴욕 타임스] 일반도서 베스트 셀러 부문에서 높은 순위를 유지하였으며 워너 브라더스 영화사에서 1~3편의 영화판권을 샀다. 또한 2003년에 나온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역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100여 개국에 약 25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성경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자선단체를 돕고자 자매편인 『퀴디치의 역사』, 『신비한 동물 사전』(코믹 릴리프와 루모스를 후원),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루모스를 후원)를 썼고, 『신비한 동물 사전』을 기반으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또한 2016년 공동 집필한 연극 대본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가 2016년 여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J.K. 롤링의 온라인 기업인 포터모어가 출범하여 팬들이 그녀의 새 글을 즐기고 마법사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게 됐다. J.K. 롤링은 또한 성인 독자들을 위한 소설 『캐주얼 베이컨시』를 썼으며,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범죄 소설도 여러 편 썼다. 아동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OBE),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안데르센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조앤 롤링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상에 빠져 비서직에서 두번이나 해고를 당했고 이혼도 했으며, 생활비가 없어서 정부보조금으로 간신히 살았고 작가 지망생이였지만 글 쓸 공간이 없어서 동네 카페의 테이블을 빌려서 글을 썼다. 하지만 「해리포터」 시리즈로 인해 그녀는 2005년 공식 재산 집계만 1조원에 이르렀고, [포브스]지 선정 '세계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40위를 차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