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성, 시인 이상과 소설가 박태원이 탐정으로 활동했다면? 셜록 홈즈와 왓슨처럼 미궁에 빠진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하는 환상의 콤비였다면? 김재희 작가의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는 이런 상상에서 출발한다. 김재희 작가는 1936년, 이상과 박태원(구보)이 ‘구인회(九人會, 1936년 3월 13일자로 창간된 문인 모임)’ 동인지를 편집했던 ‘창문사’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한 장에서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진 속 이상은 줄무늬 넥타이를 맨 모던보이였고, 박태원은 과묵하면서도 지성이 빛나는 표정이었다. 김재희 작가는 “사진을 보는 순간 탐정 사무소가 떠올랐다”며 비운의 천재로 알려진 시인 이상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탐정 이상으로 다시 써낸 계기를 말했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뒤편에 보이는 포스터는 이상이 그렸다. / 자료제공: 박재영)
『경성 탐정 이상 4』 에서 이상과 박태원은 군산 거부의 사라진 병풍을 찾아다니고, 경성 우편국 화장실에 적힌 살려달라는 메모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를 푼다. 그런가 하면 단성사 주임 변사의 변사 사건을 파헤치고, 차이나타운에서 실종된 카프 작가를 찾아 나선다. 실재했던 장소와 인물의 등장으로 더욱 몰입도를 높이는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 지난 6월 14일, 서울 통인동에 위치한 ‘이상의 집’에서 『경성 탐정 이상 4』 출간을 기념해 김재희 작가와의 북토크가 진행되었다. 윤정인 문화해설사가 설명하는 실제 이상의 삶을 듣고, 김재희 작가의 『경성 탐정 이상 4』 의 집필 배경과 취재 뒷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현실의 이상과 소설 속 이상의 발자취를 나란히 따라가는 시간이었다.
윤정인 문화해설사가 말하는 실제 이상
이상은 세 살 때 자녀가 없던 큰아버지에게 입적돼 20년 간 큰아버지의 집에 거주했다. 현재 ‘이상의 집’이 위치한 통인동 154-10번지는 큰아버지의 집이 있던 자리다. 집은 인근 200평이 넘는 자리에 밭까지 갖춘 통인동 154번지 일대였고, 그 가운데 개발로 훼손될 위기에 처했던 지금의 자리를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시민들에게 기금을 모아 매입했다. 이상의 집은 현재 이상의 작품과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윤정인 문화해설사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던 절친한 화가 구본웅이 자신에게 선물한 화구 상자를 받고 무척 기뻐하며 ‘이상’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는다.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이(李)’와 ‘상자 상(箱)’이라는 이름을 더해 만든 이 필명을 이상은 고등학생 때부터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기사로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이상은 낮에는 건축기사로 일하고, 밤에 작품활동을 했다. 윤정인 해설사는 「건축무한육면각체」와 더불어 연작시 「오감도」와 「날개」가 게재된 신문 자료를 함께 소개하며 “작품과 함께 실린 삽화 역시 이상이 그린 것이다. 이상은 담배 상자를 펼쳐 놓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취미였다고 여동생이 증언한 바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이상은 친한 친구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이 신문에 연재될 당시에도 삽화를 그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도감이 잡힌 이 삽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당시 삽화는 상당히 일차원적이었는데 꽉 찬, 구도감이 있는 삽화를 처음 보고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 윤정인 해설사는 전했다.
한편 만성 폐결핵을 앓았던 이상은 1933년, 이를 치료하고자 황해도에 있는 배천온천으로 한 달 간 요양을 간다. 그곳에서 기생 ‘금홍’을 만나 함께 경성으로 돌아와 카페를 차리는데 그곳이 바로 ‘제비다방’이다. 카페 개업 2년 차가 되던 어느 날 금홍은 “새까만 버선을 벗어놓은 채” 가출을 하고, 제비다방은 폐업을 하게 된다. 이후로도 이상은 여러 번 카페를 개업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금홍의 가출로 상심한 이상에게 구본웅은 변동림(이후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고 ‘김향안’으로 개명한다)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둘은 결혼을 하지만 결혼 4개월 만에 이상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일본에 건너간 이상은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붙잡혀 한 달 동안 옥고를 치르는데 이때 폐결핵이 악화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숨을 거둔다. 윤정인 문화해설사는 이처럼 이상의 삶을 개괄하며 “이상의 작품을 좀 더 많이 아카이브 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렇게 해야만 21세기의 또 다른 이상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관심을 부탁하기도 했다.
김재희 작가의 취재 일지
1930-1940년대 재즈 음악을 들려주며 김재희 작가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먼저 설명했다. 작가는 1930년대 조선이 화려함과 우울함이 공존하던 시대, 동시에 희망이 존재했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대였죠. 일제 강점기였고, 유학을 다녀와도 실업률이 아주 높았어요. 좋은 직업은 다 일본인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조선인 젊은이들은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요. 그럼에도 음악은 이렇게 화려한 재즈 음악을 들었던 거죠. 당시에도 축음기, 라디오, 골프채 등이 다 수입이 됐어요. 골프장도 있었다고 하거든요. 신문물, 신문화가 아주 화려했던 거죠. 젊은이들에게는 재즈 음악 같은 막연한 열망과 시대의 암울함이 공존했던 겁니다. 명암이 대비되는 시기였어요.”
이 시기 한 가운데를 살았던 이상. 그가 만약 탐정이었다면, 이라는 상상으로 시작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김재희 작가는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했다. 먼저 『경성 탐정 이상 4』 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 「주인 없는 양복」은 고급 양복을 헐값에 구입한 구보가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자 양복의 원래 주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영화감독이던 양복 주인이 갑작스런 권총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은 그의 죽음이 단순 사고사가 아님을 직감하고 사건에 깊이 들어간다. 김재희 작가는 탐정 이상의 추리력이 흥미롭게 진행되는 「주인 없는 양복」을 쓰며 취재한 당시 영화 산업을 둘러싼 풍경을 전해주었다.
“1900년대 초에 서울 곳곳에 전차가 다녔어요. 왕십리, 용산, 서울역 등을 다녀서 동대문에 있는 영화관에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던 거예요. 당시 전차료가 10전이라고 하는데요. 큰돈이죠. 그게 없어서 걸어 다녔다고 하고요. 영화관 입장료는 특등석 1원, 1등석 50전, 2등석 30전 등이었습니다. 그때 경성은 흙길이어서요. 흙이 묻은 신발로 영화관에 들어오고, 서로 옷에 흙이 묻어서 싸우고, 그랬다고 해요.(웃음) 또 영화관 안에는 끽다실, 끽연실, 매점 등이 있었고요. 냉난방이 되지 않다가 1935년 에어컨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재희 작가
두 번째 단편 「군산의 보물창고」는 이상과 구보에게 군산의 미곡상이던 갑부 ‘선경묘’가 자신의 병풍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작품을 쓸 때 김재희 작가는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시마타니 금고’를 직접 찾아가 취재했다며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낮이었는데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가도 금고라는 게 없더라고요. 여러 번 헤맨 다음 차에서 내려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죠. 겨우 찾았는데요. 진짜 둘은 못 가요.(웃음) 셋은 돼야 갈 수 있고요. 낮인데도 너무 을씨년스러웠어요. 문이 열려 있고, 들어가 보니 깨끗하더라고요. 그런데 지하가 있어요. 너무 무서워서 거기는 안 들어갔어요. 그곳이 작품에서 으스스한 풍경으로 같이 만들어 넣게 된 곳입니다.”
상이 가리키는 푸른색 철문을 보니 보통 두께도 아닐뿐더러 ‘made in USA’라고 적혀 있었다. 금고에 적합한 견고성으로 폭탄에도 화재에도 안전하다. 잡아당기니 꿈쩍도 안 했다.
“이 건물이 진짜 금고방이지. 원조 금고방.”(중략)
구보는 공터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날은 춥지 않은데 묘하게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차다.(「군산의 보물창고」, 94-95쪽)
네 번째 단편 「백운산장의 괴담」은 등장인물들이 대결하듯 괴담을 이야기한다. 김재희 작가는 이중에 자신이 직접 전해들은 괴담도 있다고 말했다. “소설을 쓰는 모티프는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지만 소설의 디테일은 작가가 어릴 때 들은 얘기로 완성되기도 한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꼭 적어둔다”며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방물장수가 언젠가 산에 고립됐을 때 귀 달린 뱀을 봤다고 하거든요. 이 얘기를 제가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예요. 할머니가 농치고, 거짓말하는 분이 아닌데 화장실에서 귀가 달린 뱀을 봤다고 하는 거죠. 그 뱀이 하얗더래요. 할머니가 워낙 거짓말을 하는 분이 아니라 그 말을 믿었었죠. 그게 이 작품을 쓸 때 생각이 나서 괴담에 넣었습니다. 그런 괴물이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그러게나요. 뱀이 고갤 돌려 나를 보는데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죠. 그 뱀은 그냥 뱀이 아닌 진정한 영물입니다.”
청년이 다시 물어봤다.
“영물이라뇨?”
“귀가 쫑긋하니 뱀 머리에 달렸는데, 뱀의 눈동자가 지긋하니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마주치는 게 믿깁니까?”(「백운산장의 괴담」, 194-195쪽)
이밖에도 김재희 작가는 지금의 <프로듀스101>에 버금가는 ‘조선미인보감’의 존재, 독립운동가 외에 일반 범죄자도 많이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의 풍경, ‘경성구락부(서울 클럽)’ 격인 장소에 모여 골프와 수영 등을 즐겼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 등을 전하며 “당시와 지금이 똑같다. 없는 것은 딱 하나 인터넷뿐이다. 심지어 옷이나 가방은 지금보다 더 좋다. 비싼 수제품을 수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류층에 한한 이야기지만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곧 출간될 다섯 번째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는 장편이다. 작가는 독자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기대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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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4김재희 저 | 시공사
북한산 세 봉우리 삼각점에 자리한 백운산장, 경성권번과 차이나타운 등 경성 시대를 상징하는 실존 장소에서 ‘탐정’으로 이름을 떨치는 천재 시인 이상과 그의 조력자 구보 박태원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수작이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