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천천히 갈게요.’ 흰 바탕에 이 한 문장을 쓰고는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쉬운 문장이다. 심지어 신선하지도 않다. 빨리빨리 사회에서 천천히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이번에 만든 책의 제목은 『나는 그냥 천천히 갈게요』 이다. 저자의 행동과 삶을 이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슬로우어(Slow.er)는 ‘나는 그냥 천천히 갈게요.’라는 말에서 탄생된 사람이자 소품 가게의 이름이다. 슬로우어 1호인 오누리 작가, 잠원동의 소품 가게는 작아 보였다. 나도 작은 편인데 작가도 나와 비슷해 보였고, 소품 가게도 작았다. 조그마한 몸, 조그마한 가게에서, 조그마한 것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작가님은 모르겠지만 작가님과 나는 동갑이다. 그리고 작가님과 나를 비롯한 수많은 우리가 있다.)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조그마한 것들이구나.’ 생각했다. 집도, 방도, 월급도, 어쩌면 배포(排布)도……?
‘천천히’와 ‘Slow’에 먼저 눈길이 가지만, 사실 이 책은 ‘갈게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리 해 보고 저리 해 봐도 답이 없는 작은 방이지만, ‘벽도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취향을 채우는 방향으로 간다. 이 넓은 수도권에, 그 많은 아파트 중에 부모님 도움 없이 시작하는 신혼부부의 집은 없지만, 부부의 취향으로 공간을 꾸미면 하나의 아파트라도 전혀 다른 분위기와 공간으로 분리될 수 있다. 그곳이 어디든 자신의 취향이 아니면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함께 사는 부모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지 않을까. 어떤 상황이 주어져 있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남들보다 느리더라도 자신의 갈 길을 ‘간다.’ 슬로우어는.
책의 마지막 사진에 함께 넣을 문구를 정하느라, 작가님과 속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엄청 빠르게 살고 있는데 매번 ‘이러다 늦는다’고,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작가님은 소품 가게 슬로우어를 찾은 손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가 결혼했을 때 저한테 몇 살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3n살이다.’라고 하니 ‘그렇게 늦은 나이가 아닌데 슬로우어 맞아요?’ 하시면서 농담처럼 물으시더라고요.” 작가님은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 속도와 연애 기간에 비해 늦었다고 생각했단다. 늦었지만 ‘그냥 천천히, 내 인생의 속도로 가기’로 했다고. “남의 속도와 비교할게 아니라 각자 자기 인생에서도 자기 속도를 좀 늦추는 의미일수도 있거든요.” 슬로우어의 의미 말이다. 각자 체감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진대, 그들 앞에서 서서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은 어쩌면 무의미하지 않을까. 이 사실을 납득하고 나서야 마지막 장의 문구를 정할 수 있었다.
속도를 각자의 인생에 맡기고 나니, 남는 것은 ‘갈게요’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혹시 ‘나중에’, ‘이러면’, ‘저러면’이라는 숱한 가정(假定)의 말들로 속도를 늦춰놓고는, 멈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더 달릴 수 있는데 ‘지금은 이런 상황이니까 저 정도까지만’ 선을 그어놓고는, 더 이상 달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회사에서는 달리지만 일상에서는 멈춰 버리거나, 먼 타인을 향해서는 열심히 달려가지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다가가지 않거나 등등. 행복에 이르는 방향과 속도는 각자 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고 단호하다. 지금 당장 가긴 가야 한다는 것. ‘갈게요, 행복하러 갈게요.’ 인사하는 사람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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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천천히 갈게요오누리 저 | 팜파스
이제는 그곳을 떠나 용산 열정도에 새롭게 꾸민 슬로우어의 모습도 담았다. 슬로우어가 직접 만들고 모은, 혹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주요 소품들과 활용법을 이야기한다.
이은규(팜파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