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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반 넘게 읽었는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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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창문이 큰 군산 카페에 앉아 썼다. 그조차 마음에 든다. 저녁이 밤으로 몸피를 바꾸는 것을 지켜보면서. (2019. 05. 16)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나:  나 여행 안 갈래. 

그:  그러든가, 그럼.

 

여행 날 아침 사소한 일로 남편과 다퉜다. 그는 강연 차 혼자 대구로 떠났다. 원래는 같이 대구에 들린 후 경주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됐다. 싸움은 스파크다. 부지불식간에 불꽃처럼 일어난다. 그는 같이 가자고 더 청하지 않았고, 나는 고요한 얼굴로 짐을 끌렀다. 예약한 숙소의 주소를 종이에 적어 그에게 건넸다. 묵묵히 받아 나서는 남편. 치, 어쩌면 나는 쌀쌀함과 결혼했는지도 몰라.

 

사랑은 유리보다 약하다. 나 때문에 당신 때문에, 그도 아니면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지나가는 고양이 때문에,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라도 깨질 수 있다. 20대의 나라면 울었을까?  자기연민에 빠져 방에 틀어박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더 이상 무르지 않다. 나는 발레복을 챙겨 서울로 나갔다. 쿠폰제로 운영하는 교습소에 가서 80분 동안 발레 수업에 참여했다. 땀을 많이 흘리니 어깨는 가볍고 다리는 뻐근해졌다. 운동은 수련이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기 위해,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그런 게 좋다. 이제 그런 것만 믿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

 

가벼운 몸으로 카페에 가 책을 읽고 메일로 일을 처리하고, 시를 썼다. 연재하는 산문 두 편의 게재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내겐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시간, 약간의 돈이 있다. 떠나지 못할 이유가 뭐람? 식탁에 초콜릿을 올려두고, 메모를 남겼다. “며칠, 여행 가요. 각자 초콜릿 같은 시간 보내요.” 집에 돌아온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메모까지 남기다니, 너그러운 내가 마음에 들었다. (미쳐가나?)

 

군산의 숙소는 사진과 많이 달랐다. 별로 앉고 싶지 않아, 지도를 챙겨 나왔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을 랜드마크로 삼아, 걷기로 했다. 하지만 번화한 거리는커녕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휑한 길만 나왔다. 마침 양손에 짐을 든 남자가 보여 이성당 빵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돌아선 그의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술이 가득 찬 눈. 눈빛이 아니라 술빛인 눈. 알코올중독자가 틀림없다. 술기운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계속’ 마시는 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그는 의외로 순해 보였다. 사실 피하고 싶었지만, 그쪽으로 간다며 따라오라는 그의 선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늘 취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인생도 있음을 이제 안다. 그는 나보다 세 걸음 앞서 걸었고 이따금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그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 이성당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반 이상은 문을 닫은 상가골목을 한참 걸었다. “이곳이 예전에는 아주 번화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서…” 그는 무언가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나는 어쩌다 이 낯선 거리에서, 앞으로 평생 술을 끊기 어려울 사람의 등을 보며 걷고 있는 걸까. 그는 사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우회전을 해 신호등이 나오면 길 건너 좌측을 봐요, 이성당이 보일 거예요.” 나는 허리를 굽혀 곡진히 인사했다. 감사하는 마음 뒤, 그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이성당이 보였다. 그곳을 기점으로 옛날 일본식 가옥이 있는 거리를 찾아 걸었다. 저녁이 순하게 내려와 있는 낯선 도시. 얽히고설킨 전깃줄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사는 게 뭘까. 사는 게 뭐지.
 
창이 크게 난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공책에 떠오르는 생각을 끼적이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문득 이 낯선 도시에 혼자 있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다. 당신과 싸운 후 차곡차곡 빨래를 개듯 할 일을 하고, 감정에 휘말려 몸에 행패부리지 않고(감정은 때로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짐을 싸 여행을 떠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기차역 서점에서 산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를 반 넘게 읽었는데 좋았다.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혼자 걷고, 현재를 부정하지 않는 스스로가 좋았다. 나를 좋아하는 데 40년이나 걸리다니!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억지로 ‘둘이’ 예정된 여행을 떠났다면, 이런 긍정에는 다다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둘이 되지 못해 안달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혼자이지 못해 누추해지는 시간도 있다. 인간에겐 햇빛, 음식, 타인의 사랑만큼이나 ‘혼자인 시간’ 역시 필요한 법. 지금 당신도 멀리서, 나처럼 혼자일 거라 생각하니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오래 붙어있다 보면, 종종 상대의 빛을 보지 못한다. 혼자일 때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둘이 될 때, 내 빛남으로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 그 반대가 되어선 곤란하다.

 

이 글은 창문이 큰 군산 카페에 앉아 썼다. 그조차 마음에 든다. 저녁이 밤으로 몸피를 바꾸는 것을 지켜보면서. 혼자의 충만함을 느끼며. 멀리서 당신 역시 혼자 빛나고 있을 것을 상상하면서. 비로소 그리워하면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저 | 문학동네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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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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