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 『여행의 이유』, 평생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책”
아주 매끄럽고 아무 문제가 없는 여행은 금방 잊히죠. 고생했거나 예상과 달랐거나 문제를 겪은 곳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요. 결국은 마음에 연결되어서 무언가를 알려주니까요. 가능하면 준비하지 않고 가는 편이에요.
글ㆍ사진 신연선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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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즉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3주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는 작가가 자신의 최초의 여행부터 가장 최근의 여행까지를 ‘이유’라는 화두를 갖고 살펴본 에세이다. 여행을 즐기는 김영하 작가가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책이었다고 말하는  『여행의 이유』 . 무엇보다 제목에 대해 김영하 작가는 “제목이 약한 것 같지만 단기간에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라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 받는 책이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결정했다. 그러려면 너무 자극적인 제목이 아니어야 했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난 후 ‘아, 이 제목이 참 적절하구나’정도의 제목이길 바랐다.”는 설명을 더한 후에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각자의 여행에 깊이 들어가 이유를 찾아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5일,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는  『여행의 이유』  출간을 기념한 김영하 작가의 낭독회가 진행되었다. 오은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낭독회는 김영하 작가의 낭독을 시작으로 오은 시인과 김영하 작가가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낭독한 글은 『여행의 이유』 에 수록된 ‘여행으로 돌아가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약 20여 분의 긴 낭독을 마친 후 김영하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주변에서 죄책감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글은 원점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세대, 아예 원점이 없는 사람들의 선언이라고도 생각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이 더 본성에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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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진짜 실패한 여행은


오은 : 이번 책의 주제가 ‘여행’이에요. 왜 여행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게 되셨는지 알고 싶어요.

 

김영하 : 오래 전부터 쓰려고 시도를 했는데요. 잘 되지 않았어요. 물론 그 사이에도 계속 여행은 하고 있었고요. 그러다 지난 가을 즈음 한 생각인데요. 결국 자기가 한 행동이 자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요.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해온 일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러고 생각해보니 글 쓰는 것 외에는 여행을 제일 많이 한 거예요. 20년 넘도록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여행을 했거든요. 누가 여행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글쎄요” 하고 말았는데 실은 은밀하게 좋아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쓸 때가 됐다고 느꼈어요. 어쩌면 이런 형식의 책은 평생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책인데요. 이것으로 제 일생의 여행이 정리된다고 할까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지난 가을부터 쓰기 시작했죠. 제 최초의 여행부터 가장 최근의 여행까지를 ‘이유’라는 화두를 갖고 살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오은 : 보통 여행 산문집에는 사진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요.  『여행의 이유』 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죠. 이점이 신기했어요. 의도하신 건가요?

 

김영하 : 저와 이 책을 만든 편집자들의 결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웃음) 책을 만들면서 여러 고민들이 있었어요. 편집자, 마케터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제목과 표지, 본문 편집 등을 고민했는데요. 독자들이 책에만 집중하게 하자, 독자들이 자신의 여행을 상상할 수 있게 하자, 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진이 들어가게 되면 상상을 많이 제한하게 되잖아요. 아무래도 사진은 강렬하니까요. 그래서 과감하게 사진을 다 빼게 되었습니다.

 

오은 : 김영하 작가님은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것으로 유명하시죠. 작가님만의 여행 스타일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영하 : 점점 더 그렇게 되는데요. 계획을 좀 덜 하는 거죠. 2007년, 시칠리아 여행을 할 때도 호텔을 거의 예약하지 않았어요. 로마 호텔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그날 아침에 전화로 해결했죠.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곳에 있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거나 호객꾼이 나온 도시가 있으면 그런 분을 따라가기도 하고요. 우연에 맡기는 거예요.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내가 갈 곳이 어떤 평을 받는지, 방 면적이 얼마인지 등을 다 알 수 있으니까 실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그런데 아주 매끄럽고 아무 문제가 없는 여행은 금방 잊히죠. 고생했거나 예상과 달랐거나 문제를 겪은 곳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요. 결국은 마음에 연결되어서 무언가를 알려주니까요. 가능하면 준비하지 않고 가는 편이고요. 옷도 적게 가져가서 현지에서 사거나 하는 식으로 준비하지 않으려고 더 노력하고 있어요.

 

오은 : 관광을 목적으로 한 여행도, 일상 탈출을 목적으로 한 여행도 있었을 텐데요. 처음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로 돌아간 여행도 있었나요?

 

김영하 : 『빛의 제국』 이라는 소설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파이는 모두 실패한 스파이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진짜 실패한 여행은 기억이 안 나는 여행이에요. 너무나 매끄러웠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죠. 예를 들면 책 관련 행사가 있어서 가는 여행도 그래요. 현지 공항에 이미 제 이름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나와 있고요. 그 사람에게 ‘인계’되어서 아주 깨끗하고 별 특징 없는, 어느 나라에 있을 법한 별 서너 개짜리의 호텔에 가요. 늘 바싹 마른 베이컨과 달걀이 나오는 아침을 먹고요. 행사를 열심히 하고 나면 집으로 고이 또 돌려보내지는 그런 여행인 거죠. 지나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 여행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진짜 실패한 여행이죠. 그런 여행은 저는 그냥 ‘출장’이라고 불러요.(웃음)

 

오은 : 책에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51쪽)이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도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내게 이런 면이 있었어?’를 알게 될 때거든요. 여행을 통해 그걸 더 잘 발견하게 되기도 할 텐데요.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김영하 :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성격은 시련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어요. 상황이 좋을 때는 다 좋은 사람들이죠. 실은 여행이 우리에게 시련을 부과하기 때문에 자기가 뭘 견딜 수 있는지, 뭘 못 견뎌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를 알게 한다고 생각해요. 대담함, 용기 같은 것도 여행에서 발견되고요. 가령 비행기가 연착될 때 내가 기다림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얼마나 참을성 있는가를 알 수 있죠. 여행에서는 그런 일들을 수시로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시카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친 적이 있는데요.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보니 시카고에서만 만든 맥주와 핫도그를 파는 거예요. 너무 맛있어 보여서 잠깐 바에 앉아서 먹고 갔더니 비행기가 이미 떠났어요.(웃음) 이런 걸 겪으면 알게 되죠. 유혹에 약하다, 먹는 것에 약하고 맥주를 누가 마시고 있으면 마시고 싶어 한다, 위험을 과소평가한다, 이런 거죠.(웃음)

 

오은 『여행의 이유』  출간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신 장소도 호텔이었다고 해요. 책에도 작가님의 호텔 예찬이 나오거든요. 호텔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영하 : 호텔이라는 곳을 피치 못해 가는 곳이거나 음침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실은 호텔은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낯선 환경에 도착했을 때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안락함을 누린 후 여행이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노하우가 집약된 곳이에요. 아무리 생소한 호텔에 가더라도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이쪽에 가면 프론트가 있겠고, 저쪽으로 가서 우리를 방으로 데려다 주겠고, 하는 것들을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호텔은 잠만 잘 뿐 아니라 여러 일을 하기 아주 편한 곳이죠. 사람을 만나기도 괜찮고요. 출간 후 이틀 동안 9개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요. 카페라면 눈치도 보일 테고 하니까 호텔에서 하면 간단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뜨면 잠깐 들어가 누울 수도 있고, 화장실 사용하기도 편하고, 조용하니까요. 방해 받지 않은 환경에서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게 된 겁니다.

 

오은 :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꼭 가보고 싶은 곳이나 가본 적이 있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세요?

 

김영하 : 저는 다닌 곳을 계속 다닌 편이에요. 늘 가던 곳에 다시 가는 패턴이었는데요. 가고 싶은데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면 아프리카예요. 저는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이 있거든요. 어린 시절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본 이후에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죠.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으로만 아프리카를 봐서 왜곡된 인상을 갖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것을 교정할 기회를 가져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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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되새기는 혼자 놀기의 방법


오은 : 책에서 여행은 영감을 얻거나 쓰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보통은 여행을 다녀와서 뭔가를 써내려고 하거나 여행지에서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김영하 : 예전에는 여행 가서 뭐라도 좀 건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요. 사실 금방 글로 나오지도 않고요. 또 여기에서 워낙 많은 생각을 하니까요. 저는 여행지에서의 진공 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국내에서는 카페에 앉아 있어도 옆 사람의 말이 다 들리잖아요. 게다가 저는 상상하는 게 일이니까 조금만 들어도 그들의 관계, 갈등, 뒷이야기 같은 것들이 다 전달돼요.(웃음) 모국어가 들리는 환경에서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는데요. 여행지에서 모국어의 진공 상태에 앉아 있노라면 물론 와글와글 하긴 하지만 그게 언어적 정보가 아니니까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머리가 텅 비면서 오래 생각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지금은 좋아요.

 

오은 : 그 장소에 다녀온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 다녀온 후 그때를 떠올리면서 그 장면을 묘사해보는 일까지 여행이라는 말씀처럼 들려요.

 

김영하 : 그렇죠. 여행은 강렬한 경험이잖아요. 낯선 곳이고, 돈도 들고, 신경도 예민해지고요. 그런 강렬한 경험을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날려버린다는 것은 너무 아까워요. 알랭 드 보통은 ‘글그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현장을 말로 표현해보자고 제안하거든요. 요즘은 거의 사진만 찍고 잊어버리죠. 아니면 SNS에만 올리고 잊어버리는데요. 저는 늘 글로 남기려고 노력하고요. 그림으로도 그려보고, 그곳의 소리도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곱씹어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여행이라는 그 중요한 경험을 매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 번 갔다 온 여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기는 혼자 놀기의 방법을 개발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주변에 이 방법을 많이 권유하고 있어요.

 

오은 : 원론적인 질문인데요. 김영하 작가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요?

 

김영하 :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도 이런 질문을 받아서 떠오른 답이 있어요. 진작 떠올랐으면 책에 쓰는 건데 아까웠어요.(웃음) 여행은 몸으로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책은 여기서도 읽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여행은 직접 그곳에 가야만 하고요. 내가 직접 가서 읽어야만 비로소 읽히는 텍스트지, 남이 갔다 온 여행을 백날 들어야 재미없죠. 직접 가서 그곳의 공기와 공간감을 느끼고 다 경험해야만 읽힐 수 있는 한 권의 책, 텍스트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은 : 환대의 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도 좋았어요. 여행지에서 도움을 준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다음 여행에서 다른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고 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여행에 있어 환대는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 걸까요?

 

김영하 : 환대라는 게 겪어보면 별 건 아니지만 많이들 겪죠. 호텔에서 직원이 “어서 오세요”라면서 활짝 웃어주는 경험도 환대라고 생각하고요.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카드 잔액이 부족한 경험 있잖아요. 그때 대신 버스비를 내주는 분들 계시죠. 그분에게 계좌번호 알려달라고 하기보다는 감사 인사를 보내고 다음에 다른 분한테 버스비를 내주면 어떨까요. 저는 그런 게 신뢰와 환대의 순환이라 생각해요. 책에는 쓰지 않았지만 우리는 환대를 베푼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는 문화가 강한 것 같아요. 특히 부모 자식 간에 강하죠. ‘효(孝)’가 부모가 준 것을 부모에게 갚아라, 라는 건데요. 바뀔 필요가 있어요. 우리 모두 지구에 다녀가는 여행자라고 했을 때 내가 받은 환대를 부모님도 물론이지만 다른 사람, 나의 도움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도 좋겠죠. 그런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고요. 우리는 폐쇄적인 순환 고리 안에만 있다고 할까요. 그런 생각도 쓰면서 들었어요.

 

오은 : 저는 여행보다 산책을 좋아해요. 여행은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산책은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안정감이 있죠. 김영하 작가님께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했던 장면에 맞닥뜨렸을 때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어요.

 

김영하 : 강형욱 훈련사가 개 훈련하시는 걸 보면 아주 차분하게, 그러나 단계적으로 하잖아요. 그 개들도 낯선 환경이기 때문에 움츠러들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여행에 있어서도 두려움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요. 단계적으로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번 새로운 곳을 가야만 그 여행이 본전을 뽑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요. 제2의 고향 같은 도시가 몇 군데 있는 것이 개인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고 생각해요. 언제 비행기를 타고 떨어져도 어딘가를 찾아갈 수 있는 동네 말이죠. 그게 도쿄가 될 수도, 상하이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곳을 홍대 앞 다니는 것처럼 쉽게 다니면서 약간의 낯섦을 극복해가면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이 잘 통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해결되는 과정을 경험하면 점점 더 멀리, 또는 낯선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오은 : 책 예약 판매 사은품으로 만든 ‘첫 문장 노트’를 김영하 작가님이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어요. 노트에 들어가는 그림도 직접 그리셨고요. 어떤 이유로 기획하게 되셨어요?

 

김영: 노트를 펼치고 펜을 꺼내서 첫 문장을 쓰기까지가 글쓰기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그런 분들에게 첫 문장만 제시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 테고요. 어떤 분들은 나도 내 여행의 경험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하실 것 같아요. 망한 여행, 최초의 여행 등 그 여행이 자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쓰셔야 할 텐데 문제는 첫 문장 쓰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 첫 문장을 저 같은 작가가 대신 써주면 두 번째 문장부터 쓰게 되겠죠. 그 글이 망하면 김영하가 잘못한 것이 되는 거잖아요.(웃음) 저한테 책임을 떠넘기면 훨씬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구상을 해봤는데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출판사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걸 보고 독자 분들도 좋아하시겠다, 생각했어요.

 

오은 :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어떤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면 좋겠는지, 말씀 부탁드려요.

 

김영하 : 이번 여행은 망했어, 정신 없었어, 뜻대로 안 됐어, 하고 젖혀놓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지만 실패한 여행 같은 건 없어요. 그것들을 보다 보면 그곳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마음의 변화가 있더라고요. 그건 오직 사유하고, 글을 쓰면서 생각할 때만 분명해지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는 여행 하나 하나를 조금 더 각별하게 생각하시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글로 남기시기를 권하고 싶어요. 언어란 아주 강력하게 감정을 흔들거든요. 쓰는 과정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기억이 좀 더 명료해지고 풍성해집니다. 지금 그 여행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어도 10년 뒤에는 다를 수 있어요. 사실 그 여행에서 변화가 일어났고, 그 이후에 한 결정이 실은 그 여행에서 싹을 틔운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잖아요. 우리 모두 지구에서 한 번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 안에 작은 여행들이 쌓여서 큰 여행이 되는 것이니까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여행을 기록해가시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 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202-203쪽)


 

 

여행의 이유김영하 저 | 문학동네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풀어낸 여행담이기보다는,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 삶의 의미로 주제가 확장되어가는 사유의 여행에 가깝다. 소설가이자 여행자로서 바라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놀랄 만큼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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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김영하 작가 #여행의 이유 #마음의 연결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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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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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196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잠실의 신천중학교와 잠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한 번도 자신이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에 PC통신 하이텔에 올린 짤막한 콩트들이 뜨거운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집 『오직 두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 여행에 관한 산문 『여행의 이유』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냈고, 산문집 삼부작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과 『랄랄라 하우스』 등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만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등 해외 각국에서 활발하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