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런마터우, 타이완. 지금 여기서는 경로를 찾을 수 없는 바다 건너 어느 도시.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앞 구르기 한번은 족히 할 정도의 공간이 남는데 굳이 가까이 와서 기어이 나를 밀치고 지나가는 저 사람을 보면서 생각한다. 처음 보는, 아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보고 싶지 않은, 모르는 당신과 나의 적정 거리는 얼마인가.... 아악! 아무리 멀어져도 적정하지 않아. 아무리 떨어져도 적정하지 않다고! 라는 내적 고함을 꾹꾹 가라앉히고 가만 따져보면 ‘계산 결과 없음’ 정도가 아닐까 싶다. 공유하는 관계, 시간, 기억, 사람 등 무엇을 식에 넣어 계산해보아도 도무지 제대로 값이 나오지 않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남이니, 그저 남 답게 있어주면 좋은 거리다. 어떤 변화가 생겨 ‘아는 당신’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주치면 인사를 꾸벅 하고 특별히 즐거운 일이 없어도 시선이 부딪혔을 때 가볍게 웃어 보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 거리가 아닌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왔다...... 더 좌절할 때는 젊은 세대의, 충분히 개인주의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세대의 사람이 비슷한 말들을 할 때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기성세대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자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말들을 할 때, 여자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그이의 이름을 지웠다.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24쪽
나의 현 위치에서 자동차로 최단거리 97.9킬로미터라고,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알려주는 친구와의 거리에 대해서도 곰곰 헤아린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폭주하는 말들을 주고받고 쏟아내며 고개 마다 같이 키득거리고 굽이 마다 같이 분개하고 그러다 훌쩍 다시 평정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러기를 반복해온 날들. 햇수로 18년, 함께한 시간에 반비례해 우리의 거리는 짧아졌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이나 직접 만나면 다행인 생활인들이 되었지만 한치의 의심 없이 평생의 인연이다. 숫자들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힘든 ‘사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다.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는 마음의 거리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97쪽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로 정리되어 버리고 마는, 바다 건너 어느 도시와 나의 거리는 어떤가. 평생을 두고 볼 때 그곳에서의 시간은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관계에는 단순 계산으로는 잘 가늠할 수 없는, 거리를 재는 이상한 셈법이 있다. 교감이라 할 만한 것은 혼자 했고 그리움 또한 혼자의 것이었다. 그쪽이 어떻든 간에 내가 좋은 때에 연락하고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일 하지 않는 나의 잠시 멈춤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어찌나 고마운지, 그렇게 덤덤하게 흐르는 그곳의 시간 속을 마음껏 떠다니고는 했다. 받은 것도 준 것도 없는데 무언가 많이 얻은 것 같다. 신나게 돈을 쓴 댓가로 손에 넣은 것들은 차치하고 말이다. 몇 마디 말로는 정의하기 힘든 그런 무형의 습득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전혀 다른 의미의 ‘거리 측정 불가’인 채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 어딘가에서 이 무수한 말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하고 있을 당신. 당신과 나의 거리에는 적어도 책 한 권 또는 영화 한 편, 아니면 노래 한 곡 정도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 우리가 어떤 ‘사이’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같이 나누는 책과 영화와 노래가 ‘측정 불가의 거리’를 만드는 이상한 셈법이 되어줄 테다. 그 셈법이 계산해내는 그만큼의 거리에서 이 말들과, 말들 사이의 의미들이 너무 오래지는 않아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쯤에서, 누군가 마음 속 리스트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린다 해도 괜찮다. 거리는 그런 것이니까.
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