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다종다양한 사건과 현상들을 우리는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을까? 때로는 이 세상의 모습이 누군가에 의해 번역되고 해석되고 가공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한 적은 없는지? 말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나왔다.
이희재 저자는 1993년부터 학고재, 예경, 마로니에북스 출판사 등에서 일하기 시작해 2008년 이후 외주 교정자이자 영국 런던대 SOAS(아시아아프리카대학) 방문학자를 지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동양학부에서 동아시아 영어사전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으며 현재 서울출판예비학교 교수 및 교정 교열을 하고 있다.
『번역전쟁』은 2009년 『번역의 탄생』을 출간한 후 두 번째 저작입니다. 그사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진보를 대표하는 미국의 <뉴욕타임스>부터 보수를 대표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까지 이 세상의 주류 언론이 그려주는 대로만 세상을 보고 살았다는 깨달음이 어느 순간 들면서 그 뒤로는 어떤 사건이든 주류 언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그 역사적 배경을 캐고 들어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중남미에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정작 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것저것 읽으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적어도 국제 문제에서는 정말 믿고 의지할 만한 주류 언론이 없다 보니 속지 않고 살아가려면 제 시간을 투자하는 길밖에 없더라구요. 좀 고달프더군요. ㅎㅎ
『번역전쟁』 출간소식을 접한 독자들이 『번역의 탄생』 후속작이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분야의 책입니다. 『번역전쟁』을 어떻게 쓰시게 되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요?
번역은 가령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이지요. 말과 말을 잇는 일이지요. 그런데 현실을 영어든 한국어든 말로 담아내는 것 자체가 넓게 보면 또 하나의 번역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들었고 그 현실 번역이 돈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으로만 압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언을 하자면 우리가 쓰는 중요한 말, 개념의 대부분이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런 전쟁에서 99퍼센트 다수는 일방적으로 당했구요. 아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치열한 ‘말의 전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 키워드로 ‘다원주의, 포퓰리즘, 극우, 진보, 민영화, 인턴 등’ 우리가 언론매체에서 늘 접하는 35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선택한 기준이 궁금합니다.
말 자체가 무기로 쓰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다원주의’는 서양식 다당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를 공격할 때 많이 쓰이지요. ‘포퓰리즘’은 다수 서민을 섬기려는 체제를 공격하는 용도로 애용되구요. ‘극우’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타국을 증오하는 사람은 극우라는 말을 들어도 싸지만 자국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싸잡아 극우라고 부르는 것은 극우라는 말의 남용이고 오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들이 오용되고 남용되면 우리는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흐트러놓는 세력을 정조준하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가령 ‘서민주의자’를 ‘포퓰리스트’라고 부르면 우리는 현실을 잘못 읽게 됩니다. 저도 한때 그랬지만 사정도 잘 모르면서,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을 비웃게 됩니다. 잘못된 말이 온전한 앎을 가로막는 거지요. 그걸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서민주의’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사유화’를 ‘민영화’로 미화하는 세력을 ‘금벌(oligarch)’이라 정의하며,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금벌’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십시오.
다수 서민을 진심으로 섬기려던 서민주의자 차베스를 무책임한 포퓰리스트로 왜곡한 서방 정치 집단과 서방 언론의 배후에 있는 물주라고나 할까요. <뉴욕타임스>, <가디언> 같은 진보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금벌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돈벌이고 그 돈벌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을 없애는 겁니다. 그런 걸림돌을 없애는 가장 요긴한 수단이 전쟁이구요. 그래서 이런 진보지들은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다가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금벌의 전쟁을 돕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반성하는 척했지만 리비아에서, 시리아에서 다시 본색을 드러냈지요.
냉전 이후 멀리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 공격 때도 비슷했습니다. 더 멀리는 1차대전, 2차대전도 비슷합니다. 전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1차대전, 2차대전 모두 독일이 전범국으로 낙인 찍혔지만 독일은 전쟁에 끌려들었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전쟁을 갈구했던 건 영국과 미국이었지 독일이 아닙니다. 물론 독일이 정의로운 나라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모두 정의로운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거지요. 그 이후의 전쟁도 마찬가지구요.
절대 다수의 국민은 전쟁으로 말못할 고통을 겪지만 금벌은 전쟁으로 돈을 법니다. 전쟁으로 나라빚이 늘어나면 나라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길도 열리구요. 금벌은 언제라도 전쟁 꼬투리를 만들어내려고 평소에 마음에 안 드는 몇 나라를 집요하게 악마로 그립니다. 가령 지금은 러시아가 그렇지요. 그런데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증오한다고 해서 한국까지 러시아를 혐오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러시아는 천사 나라도 아니지만 악마 나라도 아닙니다. 한반도와도 붙어 있는 나라입니다. 땅도 넓고 자원도 넓고 한국이 잘 지내야 할 이웃입니다.
언론매체에 비쳐지는 카다피, 만델라, 하토야마, 무가베, 아사드 등의 정치인들에 대해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론매체가 대중에게 전하는 프레임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면 좋을까요?
서방 주류 언론은 금벌에게 복무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습니다. 진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이 서방 주류 언론 특히 진보 언론을 너무 잘 믿지요. 짐바브웨의 무가베는 1980년 무장항쟁으로 이겨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당시 남아공 만델라 등은 감옥에 갇혔던 처지라 짐바브웨가 너무 강하게 나가면 남아공 백인이 양보하지 않을 테니 제발 온건하게 나가달라는 만델라 측의 읍소에 백인의 토지 보유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한 15년 동안 서방 언론에서 무가베는 명예박사 학위를 여러 개 받았고 훗날의 만델라에 버금가는 성자 반열에 올랐지요.
그러다가 옥토의 절대 다수를 백인이 차지한 상태에서 짐바브웨 다수 국민의 여건이 나아지지 않아 토지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무가베는 악마가 되었지요. 그랬던 무가베는 지금 자기 당 안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는데요. 그 근본 배경에는 영국의 금융 공격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통화를 공격하는 것은 침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서방 언론의 특징은 그러한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현실 자체도 틀리게 보도할 때가 많지만 설사 현실을 보도하더라도 눈앞의 현실만을 보도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짐바브웨 경제를 처음부터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이 그렇게 만들었는지까지 짚어주어야 합니다. 하나의 ‘사실’은 시공간이라는 맥락 안에 놓였을 때만 ‘진실’로 승격될 가격을 갖습니다. 역사와 절연된 ‘사실’은 절대로 ‘진실’이 못 됩니다.
지난 20년 간 『반자본 발전 사전』, 『몰입의 즐거움』, 『소유의 종말』 등 수많은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셨는데요. 번역가로서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요?
말하듯이 귀에 쉽게 들어오는 번역을 하려고 합니다. 문턱이 낮은 번역을 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내용일수록 쉽게 옮기려고 애씁니다. 한자어보다 고유어를 선호하고, ’전진하다’보다 ’나아가다’를 선호하는데 이건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독자에게 쉽게 와닿는 번역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권위적인 표현도 될수록 안 쓰려고 노력합니다. ‘번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보다는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이라고 쓰려고 합니다. 문턱이 낮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처럼 문턱이 낮은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요. 『번역전쟁』의 본문을 존대말로 한 것도 문턱 낮추기를 위해서였습니다. 딱딱한 시사 내용을 조금이라도 쉽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집필중이거나 앞으로 더 쓰고 싶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점과 선: 영한사전의 기원』이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만든 영일사전을 사연도 맥락도 모르고 그때그때 베끼면서 ‘점’처럼 살아온 것이 한국 영한사전의 역사라는 내용입니다. 『번역의 탄생』 속편도 내고 『번역자의 영한사전』도 준비 중입니다. 번역도 물론 해야지요. 이 세상을 정확히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고 또 그런 책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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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전쟁 War on Words이희재 저 | 궁리출판
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각 국가의 시선들, 진보와 극우의 진정한 의미, 평생직장과 인턴의 이면, 민영화의 진짜 속내, 한국과 그 주변국가의 미묘한 입장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