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두 번의 큰 이사를 했다. 물건 정리를 잘 못하는 데다, 버리기도 힘든 성격이라 매번 이사 비용이 예상보다 더 많이 들곤 했다.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싸면서 제일 놀랐던 부분은 역시 책이었다. 어쩌다 보니 쭉 책 밥만 먹고 살아서인지 산 책, 받은 책, 만든 책이 일반 가정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나름 정리를 한다고 큰 결심을 하고 처분도 시도했지만,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이니까 (언제 읽게 될까?), 페이지가 접힌 책은 또 볼 거니까 (정말?), 내가 디자인한 책은 내 새끼니까 (미우나 고우나…) 등등 책을 남겨 두는 이유는 구구절절하게 많았다.
한바탕 이사를 마친 후 먼지가 쌓이고 때가 묻은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기에 약한 종이를 물기가 있는 수건으로 살살 닦아내야 할 때, 그때 비로소 표지 코팅의 고마움을 느꼈다. 이래서 아이들 책은 거의 다 코팅하는구나 싶었다. 본래 유통과 보관 과정에서 책을 보호하는 목적이 크지만 소장하는 입장에서도 그 유용함을 실감하게 된다. 코팅 없이 종이 고유의 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을 좋아하지만 이 경험은 실용적이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오늘 이야기할 두 권의 책은 출간 소식을 접하고 온라인 서점을 통해 주문하게 되었다. 책 내용이 궁금해서 출판사나 가격, 디자인 등 다른 조건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화면을 통해 본 디자인이 조형적으로 일단 근사했다. 책을 받아 랩핑 비닐을 벗겨내자, 두 권 모두 주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종이 결이 손끝에서 생생하게 읽혔다. 먼지가 꽤 쌓일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경험, 나의 시도』
최정호 저 | 안마노 이주희 디자인 | 안그라픽스
최정호는 한국의 1세대 글꼴 디자이너로 191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요도바시 미술학원에서 수학하며 글꼴 디자인을 시작했고 일본 모리사와와 샤켄을 위한 한글 원도 제작에 참여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명조체와 고딕체의 원형을 만들었다. 70년대 후반, 디자인 잡지 <꾸밈>의 아트디렉터였던 (안상수체의 바로 그) 안상수의 요청과 설득으로 최정호의 작업에 관한 생각을 6편의 연재와 인터뷰로 남겼다. 그것을 다시 한데 엮은 것이 바로 『나의 경험, 나의 시도』이다.
이 책의 첫인상은 자신감이었다. 진한 회색 바탕에 굵은 명조체로 큰 제목과 저자명이 정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제목이 너무 크면 왠지 부끄러워 덧싸개를 씌운다는 사람도 많은데 이 책의 큰 제목은 오히려 자랑스럽다. 밖에서 내놓고 읽고 싶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꾸밈이 많은 시대에 오히려 투박하고 큰 목소리로만 이야기하니 담백하고 믿음이 갔다. 본문 글은 당시 <꾸밈>에 실린 오리지널본을 먼저 보여주며 시작한다. 언급된 낱글자와 자소가 따옴표로 묶였던 것을 이 책에서는 옅은 회색 상자 안에 올려 표현하는 등 세심한 본문 디자인도 눈에 띈다.
책 표지는 ‘말의 똥’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거친 질감을 자랑하는 ‘마분지’를 선택했다. 표지로 쓸 수 있는 용지 중 질감의 강도를 따지자면 상위에 속할 텐데 이러한 특징은 예전부터 디자이너들이 사랑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제지 회사에서는 “티끌이 섞여 표면이 소박하고 따스한 인상을 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따스함보다는 왠지 그가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진한 먹색과 대비되는 밝은 하늘색은 책의 인상이 너무 무겁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진한 먹색 종이에 컬러 인쇄를 할 수 없으므로 실크스크린을 통해 밝은 색상을 찍었다. 두껍게 잉크를 올릴 수 있는 실크스크린으로 일반 인쇄에 비해 더 깊고 풍부한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군더더기 없는 자신감이 이 책 제목 ‘나의 경험, 나의 시도’와 가장 잘 어우러진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저 | 전용완 디자인 | 위고
홍한별 번역가의 이름이 담긴 책을 몇 권 디자인한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이 익숙해질 무렵, 2022년 『돌봄과 작업』(돌고래)에서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이야기까지 만났기에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번 신작을 보고 그의 작업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이제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에 관한 이야기. 그 고뇌와 아득함이 책 표지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은 흰 점들이 파동을 일으키다가 끝에서 어렴풋이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라는 글자가 드러난다.
이 타이포그래피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만큼 읽히는 정도에서 그래픽 작업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목이 좀 더 잘 읽혔으면 하는 마음에 한 단계 더 제목이 온전히 보이기를 요청했다면 어땠을까. (작업하다 보면 이런 요청을 부지기수로 받게 되는데, 몇몇 받아들였던 나의 책들이 떠올라 눈물 한 번 닦고 지나간다.) 지금과 같은 깊이감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은 비록 한눈에 잘 보이더라도 훨씬 평평하고 밋밋한 파동을 보여줬을 것이다. 디자이너의 제안도 중요하지만 이를 수용하는 편집자와 출판사의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검은색에도 깊이가 있다면 이런 경우를 들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슈퍼콘트라스트’라는 흑지를 사용해 가장 깊은 곳의 어두움을 표현했다. 흑지 위에 흰 글자는 앞 책과 마찬가지로 실크스크린으로 올렸다. 뒤표지에는 부분적으로 획이 미치지 않는 글자들이 보이는데, 크지 않은 글자를 실크스크린으로 찍다 보니 발생한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앞표지의 입자들의 움직임과 그 결을 같이 하는 듯 자연스럽다.
표지 종이인 ‘슈퍼콘트라스트’는 코튼 펄프를 40% 이상 함유한 비목재지이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폭닥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이 질감은 하이 벌크 백상지인 ‘클라우드’로 본문 용지를 사용해 책장을 넘길 때까지 이어진다. 북디자이너가 그래픽 영역인 시각 디자인만이 아닌, 제작 영역인 촉각 디자인까지 상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흰 종이에 검은색이나 하늘색을 인쇄하지 않고 굳이 검은 종이에 밝은색 안료로 글자를 올리는 이유는 그만큼 더 깊은 농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각적 무게와도 연결되고 시각적 질감으로도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책이 현실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질 수는 없지만 가능한 영역에서 좀 더 다양한 물성을 입은 책들이 독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코팅된 책보다 먼지가 더 많이 쌓이겠지만, 조금 더 살피고 아껴가며 한 번 더 펼쳐본다면 먼지가 쌓일 틈이 없지 않을까. 아 물론, 이것은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나의 경험, 나의 시도
출판사 | 안그라픽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출판사 | 위고

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