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의 방어술>은 2025년 하반기에 만들고 싶은 시 창작 수업이다. 지금 수업 소개서를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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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의 방어술
어떤 독자들은 우리가 쓴 시를 읽고 이렇게 평가하곤 합니다. “말도 안 돼, 헛소리, 거짓말, 작위적이야, 병이 있으면 병원에 가세요, 진심이 안 느껴져, 억지야, 신파네, 오버하고 있네, 어쩌라고, 유치해, 뻔하네…….”
이 수업에서는 독자가 이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도록 창작 과정에서 사전에 방지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함께 고민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독자는 무심히 우리가 쓴 시를 혹평할 것입니다. 독자의 호불호는 독자의 것이며, 정당한 비판은 달콤한 것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트집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 트집은 우리가 우리의 시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을 때 생깁니다.
시인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맘대로 모욕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예컨대 어떤 시인에게는 자신의 질병, 연애사, 종교적 믿음 같은 것들이 소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독자에게도 무조건 중요할 수는 없겠죠.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욕을 당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했다는 것만으로 인격적 모독을 당할 필요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방어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수업에서 할 일은 우리가 쓴 것을 무조건, 누구나가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의견이 달라도 존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허용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많은 독자를 압도시키는 시도 있겠지만, 처음엔 나를 위한 시가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 다시 읽어볼 수 있도록. 우리가 쓴 것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 하나 덧붙일게요. 우리는 애초에 독자에게 모욕당하기를 바라면서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방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어일 수 있습니다. 무방비한 상태로 철저히 상처받는 것이 시인의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정신 승리도 방어술의 하나죠! 정신 승리를 위한 조언도 해보겠습니다.
철저한 반성이나 어마어마한 죄책감도……. 우리의 친구로 만듭시다.
- 2025년 하반기에 진행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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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에서 부탁하기
학생들에게 제일 처음 할 조언은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화자가 독자에게 직설적으로 부탁하면 해결이 된다. 시의 도입부에 이렇게 쓰는 것이다.
“이 시에 제가 쓴 것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하면 대부분 부탁을 들어준다. 조금 더 먹히는 부탁을 하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
“지금부터 제가 할 얘기는(혹은, 이 시의 화자는) 다소 유치하고 많이 개인적입니다. 저도 알고 있는데 제게 아주 소중한 얘기예요. 비웃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소문은 내지 말아주세요. 만약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저를 조금만 응원해 주시길…….”
이렇게 나도 내 얘기의 허점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이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미리 고백하면 된다. 그러면 독자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부탁을 안 들어주는 독자는 말 그대로 부탁을 안 들어주는 사람이 된다. 시인이 독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순간, 독자는 시인의 게임에 초대된다. 만약 독자가 시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독자는 단순히 게임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게임에 조금이나마 성실히 참여하지 않은 독자도 독자는 독자다. 하지만 그런 독자가 하는 말에는 상처를 크게 받지 않아도 된다.
“독자님. 당신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제가 만든 게임을 제 의도대로 즐긴 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당신의 모욕도 반의반만 참고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정신 승리를 할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을 너무 자주 사용하면 안 좋은 습관이 생길 수 있다. 방어술은 다양할수록 좋은데, 제일 쉬운 방법이다 보니 자꾸만 기대게 될 수 있다. 시 쓰는 일이 점점 구차해질 수도 있다. 도입부에서 부탁하기. 정말 정말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용기가 너무 안 날 때만 사용하면 좋은 기술이다.
딱 봐도 작위적인 형식 사용하기
어떤 시는 독자로부터 너무 작위적이라거나 인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시 창작 교사는 실제로 겪었던 것만 시에 쓰라고 하거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계속 질문하면서 학생을 괴롭히다가 울리기도 한다. 시 창작을 지도하는 사람은 이런 폭력적인 교수법을 지양해야 한다. 게다가 내 생각엔 작위적인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실제 있었던 일로 쓰더라도 어쨌든 시로 쓰면 전부 다 픽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물론 시가 픽션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남의 얘기를 맘대로 각색하거나 인용하여 폭력적이고 소모적인 방식으로 배치할 때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시는 작품이고 작품은 가상의 영역에 속한다. 특히 인위적이라는 표현은 말이 안 되는 게, 작품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위적이라는 단어는 꾸민 게 티가 난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든 꾸민 것이기 때문에 티가 적게 나거나 많이 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내가 쓰고 싶은 주제나 다루고 싶은 소재(대상)가 다소 사변적이거나, 꾸민 티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면 어쩌겠는가? 제일 쉬운 방법은 아까 우리가 배웠던 대로, 시의 도입부에 이건 다 지어낸 얘기고, 좀 과하게 자폐적인 개똥철학이라고 미리 이실직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더 좋고 멋진 방법이 있다.
시의 형식이 이질적이면 된다. 예컨대 만화 독자는 만화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쉽게 작위적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애초에 만화에서는 자연스러움이 최상의 가치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만화가 그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무리한 설정이 나오더라도 연출만 잘 되어 있으면, 그러니까 그 무리한 설정이 충분히 재치 있기만 하면 특별한 상상력이라거나 훌륭한 작화라고 도리어 칭찬한다.
시라고 그렇게 못 할 것 없다. 만약 우리가 엉터리 부동산 계약서를 작성하여 시라고 우긴다면, 계약서는 딱 봐도 작위적인 ‘형식’이 된다. 독자는 한눈에 계약서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계약서가 작위적이라서 재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내용만 흥미로우면 작위적이어도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AI와 AI와의 대화, 답을 해야만 하는 심리 테스트 따위를 만든 다음 시라고 우기곤 한다. 이런 시는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시, 멋들어진 문장을 연과 행으로 나누어 배치한 글보다는 유치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한눈에 파악이 가능한 ‘자기 주장이 강한 형식’은 그 유치함을 애써 숨기지 않기 때문에 호연지기가 있다.
예를 들어 문보영 시인의 경우,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이라는 시집에서, 시에 지도나 모형을 그려놓곤 한다. 그러면 이미 그 시는 아주 작위적으로 뭔가를 끼얹어놓은 형상이 된다. 그건 일종의 초대장과 같다. 내가 여기 뭔가를 꾸며놨어. 이거 나랑 같이 가지고 놀래? 안 놀아? 마음대로 해. 아 너는 같이 놀겠다고? 어때? 기분 좋지? 너도 네 시에 도형 같은 거 그려봐. 기분이 좋아. 어떤 사람은 그리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내 그림을 아무 이유 없이 다짜고짜 모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랑 같이 놀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욕하는 건…… 속단이다.
결론
내 생각에 이런 식으로 실용성 있는 방법들은 50개쯤 설명하면 재밌는 수업이 될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방어술은 대부분 내 시를 지키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허점을 미리 드러내거나 인정한다. 그리고 그 미진한 부분이 내가 가장 쓰고 싶은 것이라고,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자기가 쓴 것을 누구보다 부끄러워하고, 누구보다 슬퍼하는 일이다. 용기를 내어 타자를 시인의 내밀한 공간에 초대하는 일이다. 절대로 주눅들지 말자. 제 발이 저린다고 될 대로 돼라 아무렇게나 쓰지 말자. 독자와 시인 사이의 규칙이 공고하다면, 부끄러움은 예술이 될 수 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출판사 | 문학동네

김승일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데뷔. 시집으로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산문집으로 『지옥보다 더 아래』가 있다. 2016년 현대시학 작품상. 2024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