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 재미있었는데 어때요?
<채널예스> ‘마음을 읽는 서가’에 북 리뷰를 처음 쓴 날이 2014년 5월 12일이었다. 내년이면 5년차로 접어드는 장수 코너가 되었다. 꾸준히 격주로 서평을 올리는 것은 나름 스트레스다. 책을 읽다가 ‘야, 이거로 쓰면 딱 되겠네’ 싶은 책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마감일이 다가올 때까지 바빠서 책을 못 읽었거나, 코너에 어울리는 책을 만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난다. 쓸만한 책이 있나 서가를 스캔해보기도 하고, 이전에 읽은 책 중에 놓친 것을 찾아보려 최근 읽은 책을 쌓아놓은 책상 위를 훑어보다 겨우 찾아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어떨 때에는 두 권의 책을 놓고 저울질 하다가 하나를 올리고, 나머지 하나는 뒤로 밀려버리고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책에게 미안해 진 적도 있었다.
생각해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리뷰를 쓰기 위한 책 읽기는 솔직히 허망한 일이다. 물론 리뷰를 하면, 책을 자세히 읽고, 또 글로 정리를 하게 되니 책의 일부가 내 것이 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든 책을 그런 마음으로 읽는다면, 책 읽기는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공부와 성취의 대상으로만 제한될 것이다. 책이 줄 수 있는 기쁨을 반의 반으로 줄이는 바보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책을 샀지?’라고 읽다가 화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책을 고를 때 20% 정도의 실패는 기회비용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갖고 책을 골라야 의외의 발견을 하면서 시야가 확장되는 독서만이 줄 수 있는 진성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을 마무리 하는 이 시점에 독자들에게 내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올 한해 읽은 100여 권의 책 중에서 몇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마음을 읽는 서가’에서 소개한 책뿐 아니라, 이 코너에 올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난 참 재미있었는데 어때요?’라고 권하고 싶었던 책까지 더할 예정이다. 자 이제부터 실패율 높은 잡독인(雜讀人)이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 내 기억에 남은 권하고 싶은 책들의 소개가 이어진다.
1~2월은 모리 히로시의 『작가의 수지』로 시작했다. 일본 국립대 공학부 교수를 하다가 취미로 추리소설을 썼고, 그게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전업작가가 된 특이한 이력의 저자는 인세, 강연료, 추천사 등 수입을 낱낱이 공개하는 책을 냈다. 일본의 출판시장이 대단하다는 것에 놀랐고, 한국의 일반적 작가의 수입과 비교하면서 두 번 놀라면서 넘사벽을 경험하게 한 책이었다. 심리서로는 텍사스 대학 교수 제임스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명사나 동사도 중요하지만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접속사나 부사와 같은 기능어의 사용이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것에 집중했다. 기능어 사용 패턴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현재의 심리, 정체성,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중요한 관계를 맺는 상대와의 관계의 안정성을 반영해주는 일종의 심리적 거울이라고 말한다.
지난 겨울엔 유난히 음식 관련 책에 손이 갔다. 『미각의 비밀』을 읽으면서 쓴맛과 단맛이 인간의 생존과 진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었고, 『과식의 심리학』을 읽고 현대인의 경쟁사회와 정서적 허기, 그리고 식품산업등등이 과식이란 키워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안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한 샐러리맨이 무려 23년동안 먹은 음식을 세밀한 만화로 그린 노트를 책으로 엮은 『시노다 과장의 삼시 세끼』까지 이어지면서 음식, 먹는 것의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3월에는 『센서티브』가 큰 인기를 얻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한국에서 이처럼 반응이 좋을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숨어있는 예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용기와 삶의 대처방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랬다. 저자 본인도 센서티브한 면 때문에 사회생활이 어려웠던 심리상담가였기에 더욱 공감을 얻었던 것이라 짐작한다. 이 시기에 추천사를 쓴 『어른의 의무』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만화가인 저자가 10년간 200명의 성공한 어른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쓴 책인데, 어른이라면 “불평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를 지키라는 핵심 세 가지가 기억에 오래 남는 책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화로 가득 차 있지 않고,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나름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가 얼마나 자기가 잘 살았는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아도 후배들이 “멋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게 마련이다.
4-5월에는 심리서로 『수치심의 힘』’이 베스트였다. 벌을 주고, 겁을 주기보다 수치심을 자극하는게 사회적 무언의 압력으로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이론과 실험, 사례를 제시한 책이었다.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의 행동을 집단의 기준에 맞춰서 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집단 구성원들이 일부 개인의 일탈을 막아내고 전체 사회의 건강함을 지켜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심리 블로거 서늘한 여름밤의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도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불안, 우울, 외로움을 공감적이면서도 동시에 직설적이고 조금은 냉소적인 관점으로 웹툰으로 펼쳐낸 책이었다. 요즈음 자기 길을 자기가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메인트랙에서 벗어난 불안과 걱정은 있지만 ‘어떻게 되겠지’라는 낙관적 자신감과 실천은 결국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여러 번 다시 읽어보게 하는 책
6-7월에 기억에 남는 책은 조승원의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이다. MBC현직기자로 조주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저자는 음악광이자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다. 저널리즘에 덕후적 열정이 만나서 만들어진 책이다. 유명한 팝스타의 뒷얘기와 이에 얽힌 술 이야기. 음악을 들으면서 술 한 잔 하기에 딱 좋은 글이었다.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날 기억이 하나도 안나 죄책감이 든다. 이때 속상해 하지 말라고 나온 책이 바로 『망각의 기술』이다. 망각이란 새로운 기억을 위해서 꼭 필요한 프로세스임을 세계적 신경학자가 쉽게 알려준다. 몇일 동안 주차했던 곳의 장소를 잊어버려줘야, 어제 주차한 곳을 기억해낼 때 헷갈리지 않는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란 표현이 망각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정수였다.
8-9월에는 더워서 그런지 어려운 책보다 편한 책을 읽고 싶었는데, 편하게 느껴져서 펼쳤지만 훅하고 깊이 들어가버린 책이 바로 『여중생A』이었다. 연재 웹툰을 5권의 단행본으로 한번에 발간되었는데, 지금 내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십대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재생되는 것 같아 너무나 놀랐다. 그들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외로움, 정글같은 교실의 무서움, 그리고 우정과 친밀에 대한 욕구와 동시에 거절에 대한 불안 등이 그대로 가슴 가운데로 던져지는 책이었다. 이 시기에 다시 나온 강상중 선생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은 올해의 베스트 중 한 권. 워낙 내가 좋아하는 저자이기도 하지만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던져주는 메시지가 좋았다. 한 가지 일에 이제는 올인하지 말 것을,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욕망의 기대치를 낮추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적당한 기대와 실망을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생존 확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은 여러 번 다시 읽어보게 하는 구절이었다.
10월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힌 김승섭 교수의 『아픔의 길이 되려면』이 아무래도 베스트였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의사 저자’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겸손하면서도 올곧은 힘으로 뚜벅뚜벅 써내려 간 글이 한숨에 읽히는 책이었다. 이 책이 나와 같은 의료계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 책의 저자의 첫 책임을 감안할 때, 편집자와 출판사의 기여도도 상당히 컸을 것이라는 것이 내 짐작이다. 어쨌든 다음 책이 곧 나오기를 기대하는 올해의 발견상을 받을만한 책이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도발적 제안을 하는 뤼트허르 브레히만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도 묻혀지기에는 아까운 책이었고, 세상을 사로잡은 히트작을 만들어낸 법칙이 있는지 알아본 『히트메이커스』’는 컨텐츠 생산자라면 한 번 읽어보고 검토해보고, 지금 내가 하는 방법이 옳은지 생각해볼 때 큰 도움이 될 책이었다. 무척 두껍지만 그만큼 다양한 사례와 분석이 포함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결론은 “일단 많이 생산해야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는 터질 것이다”, “영향력 있는 사람 근처에 있고 그가 퍼뜨려주면서 타이밍이 맞으면 의외의 대박이 터진다”는 것. 글 쓰는 것에 지쳐있던 나에게 분발을 하게 해준 책이었다.
11~12월은 박선영 기자의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를 보면서 염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지 말자’는 마음을 다잡았고,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기만의 정상성을 지키기위해서 얼마나 비정상적인 행동과 판단을 하는지, 나조차 그런 면이 얼마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의 문제의 시발점은 가족인데, 가족이 똘똘 뭉쳐 팀플레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사회가 뒤를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 책을 덮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읽고 있는 책은 『마션』의 저자 앤디 위어의 『아르테미스』와 브랜드 디자이너 사토 오오키의 『문제 해결 연구소』다. 이렇듯 어찌 보면 계통없이 책을 구매해서 읽어왔다. 나는 앞으로도 한 길만 파기보다는 눈이 가는 대로, 손이 닿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가면서 내 마음의 지평을 깊고 넓게 만들어가려고 한다. 격주 월요일에 연재하는 ‘마음을 읽는 서가’의 독자들도 부디 2017년 한 해 충만한 독서를 하셨기를 바라고, 2018년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잡스러운 독서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풍만한 독서 여정을 해나가시기를 바란다. May the book-force be with you.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