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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냐고 물으니 잘 지낸다고 답할 수밖에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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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얼굴의 12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요? 좋다는 말을 혼자 하고 혼자 듣나요? (2017. 12. 15.)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실패한 얼굴의 12월 사람들. 천 원짜리 지폐를 쥐고 구세군 냄비를 향해 다가가는 아이의 뒤뚱거림은 12월의 것이고,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는 흐뭇한 얼굴도 12월의 것이지만, 코트 깃을 여미고 그 곁을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의 서늘한 마음이야말로 12월의 것이다. 12월의 사람들은 한해의 장례를 준비한다. 정성껏 구덩이를 파고 과거의 기억을 밀어 넣는다. 희망이 지척에 있음을 가까스로 믿기에,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12월이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한해의 공수표를 더듬어보는 것이 나의 버릇이다. 언제든지 밥 먹자.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 보자. 시간 날 때 차라도 마시자. 불가능의 약속으로 마무리하던 안부들. 나는 불가능의 문 앞에서 열심히 노크하고, 애초에 열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돌아서기를 반복하며, 12월에는 우리가 맹세한 불가능의 사소함에 깜짝 놀란다. 우리는 언제든지 만나서 밥을 먹을 수도 있었고, 마른 낙엽들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차를 마실 수도 있었겠지. 별일도 아니다. 별일 아닌데 못했다. 약속한 건 나인데, 어쩐지 그 약속을 이행하는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이의 몫인 것만 같다. 12월에는 마음의 달력에 차곡차곡 적어둔 다짐들을 폐기하며, 나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깜짝 놀란다.


이따금 날아오는 안부 인사에 늘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잘 지내냐고 물어서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엉터리처럼 살고 있냐고 물었다면 여전히 엉터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는 꼴이 잘 지내는 건지, 엉터리인지 잘 몰라서, 당신의 마음이 짐작하는 그쯤이 정확하다고 대답하는 일이다. 기쁨도 슬픔도 사소해서, 목을 쥐고 흔드는 고통까지는 오지 않아서,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그래서」 전문(『수학자의 아침』, 16~18쪽)

 

어느 날의 반가운 안부 인사에 대답 대신 위의 시를 보냈다. 휴대폰으로 페이지를 사진 찍어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한 자 한 자 옮겨 적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답장은 두 자로 돌아왔다. 좋다. 시가 좋아서 좋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잘 지내는 걸로 보이니 좋다고 대답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의 안부가 너의 말라가는 슬픔을 깨웠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안부를 건네고 대답을 기다릴 때, 마음속으로 위의 시를 떠올렸다. 나도 알아, 우리의 삶에 ‘잘’은 없다는 것. 단지, 환희와 탄식의 교차점에 엉거주춤 서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잠시 기우뚱거려보는 중이라는 것. 그 어떤 실패에 쓰러져도 뱃속에 담긴 삶이라는 무거운 추가 우리를 우뚝우뚝 일으켜 세운다는 것. 당신이 최선을 다해 돌려주는 잘 지낸다는 대답을, 나도 알아.


실패한 얼굴의 12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요? 좋다는 말을 혼자 하고 혼자 듣나요?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만 눈물을 흘리던 버릇으로 방안의 사물들까지 의식하게 되었나요? 오후 내내 공들인 모래성을 파도가 무너뜨려도 모래성일 뿐인가요? 허리 고부라진 아코디언 악사의 가슴께에서 바람통의 주름이 접혔다 펴지는 것을 볼 때에도, 악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도무지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아해할 때에도, 당신의 말라가는 슬픔을 깨울 수가 없나요? 혼자서 놀고 있는 어린애가 자신이 배운 것을 허공에 중얼거리는 것을 볼 때, 바람의 손바닥이 어린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상상하면서 슬픔을 애써 말리나요?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지 오래 되었어요. 우리는 불가능의 문 앞에 서서 부지런히 노크할 것입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서로 들어주자. 가벼운 기쁨과 사소한 슬픔이,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냥 돌아서 버리지 않도록.      

 

 

 


 

 

수학자의 아침김소연 저 | 문학과지성사
“깊은 밤이란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란 말은 없는 걸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조금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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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계영(시인)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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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던 것들’을 포착해내는 아침의 감각 1993년 등단한 후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서늘한 중에 애틋함을 읽어내고 적막의 가운데에서 빛을 밝히며 시적 미학을 탐구해온 시인 김소연이 네번째 시집 『수학자의 아침』을 출간했다. 시인은 묻는다. “깊은 밤이란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란 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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