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저자, 번역가, 편집자, 마케터에게 물었습니다. 2017년 당신이 쓴 책, 만든 책, 판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인가요? 너무나 고마웠던 책들의 흔적을 독자 분들께 전합니다.
이서희(작가)
『이혼일기』(이서희 저 | 아토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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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이메일을 뒤지다가, 편집자님과 주고받은 이메일 중 한 대목에 멈춰 섰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아니, 사랑하는 건 알았지만 외면하려던 마음을 이제 받아들이려고 해요.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또 어디선가 성장하겠지요. 우선은 충실하려고요. 지금 여기에. 그래서 글도 더 열심히 쓰려고요. 안녕, 비 오는 정오를 안녕": 『이혼일기』는 지난여름의 장마 속에서 쓰인 글이었다. 술에 취해 강남의 비린 거리를 헤매던 나날을 뒤로 하고 친구의 한남동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새벽이면 부름을 받듯 눈이 떠지던 곳. 거실의 통유리 창을 마주하고 어둠 속에 글을 쓰다 보면 동이 트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차분히 숙제를 다 하는 여고생처럼, 매주 정해진 분량을 써서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냈다. 피드백을 읽고 다시 원고 속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은 꿈결처럼 행복했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길, 내 짧은 호흡에 맞춰 숨을 들이쉴 때면 편집자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산소처럼 허파에 들어찼다. 아이들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나고 하루의 일과가 시작될 때까지, 나의 아침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 자체로 충만했다. 나는 감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저자일 거라고 생각하며 『이혼일기』를 썼다. 진심과 성의와 능력을 모두 갖춘 편집자와 일할 수 있었고 다시 만난 연인과 온 존재가 사랑으로 열리는 경이를 느끼는 중이었다.
문창운(푸른숲 마케터)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주진우 저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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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의 주력 도서였다.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를 읽은 분들의 반응은 열 받는다는 의견과 무섭다는 의견이 대부분인 상황. 이럴 때 홍보는 반대로 가면 어떨까 싶어, '최대한 경박한 재미를 주자'고 생각, 저자를 응원하는 독자들이 SNS에 인증을 안 하고는 못 배길 굿즈를 준비했다. 주진우 기자의 시사인 실제 명함 (앞면)과 일수 대출 명함 같은 가짜 명함(뒷면)을 제작하여 초판 한정 이벤트로 사용했고 프로모션 중간에 문재인 대통령 우표가 매진된 이슈를 패러디해 '언니들의 대통령 주진우 우표'를 만들었다.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고 희귀템으로 여겨줘서 판매와 홍보에 도움이 되었다. 최근 출판계에서 나오는 굿즈들은 거짓말 많이 보태서 다이소를 위협한다. 종류도 많고 퀄리티도 좋아졌다. 그만큼 서점과 출판사는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굿즈에 사용하게 됐다. 출판계가 당면한 굿즈 2.0 시대의 전략과 과제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고민해주길 기다려 보자. 다만, 느낀 점은 간단한 인쇄물이라도 누구에게는 보물이더라. 누군가를 찾는 게 일이더라.
김희진(반비 편집장)
『걷기의 인문학』(레베카 솔닛 저 |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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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은 2003년 민음사에서 『걷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던 책을 '대폭' 수정해서 펴낸 한국어판 개정판이다. 초판 번역 당시, 나는 번역 작업을 돕느라 몇 달을 이 책과 함께했다. 깊이 있고 명징한 문장과 영감으로 가득 찬 페이지들에 반해, 나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이 책을 '내 인생의 책' top5 리스트에서 빼 본 적이 없다. 1년 반 전, 번역자인 김정아 선생님께 이 책을 다시 펴내자고 했을 때, 선생님 역시 간단히 교정 교열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그런데 웬걸, 번역자는 거의 모든 문장을 고치셨고, 작업은 속절없이 미루어졌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책은 생전 처음 보는 듯 낯선 내용이라 당황스러웠다.(수정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을 잊어버린 것. ㅠ.ㅠ) 결국 편집부 전체가 힘을 모은 끝에 저자 방한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겨우 마감을 했다. 간혹 온라인상에서 구판과 번역자도 같고 표지도 똑같으니 달라진 게 없지 않겠냐는 리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이 자리를 빌려 아니라고, 진짜로 아니라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씀드린다.
박준(시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박준 저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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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소설-서사의 독법에 비해 시집은 보다 자유로운 독법을 갖는다. 시집을 역순으로 읽어도 무방하고 혹은 책이 펼쳐지는 대로 한 편씩 읽어도 된다. 혹은 절반 정도만 읽고 책장에 꽂아놓았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남은 시들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쓴 후, "산문집이 분명한데, 꼭 시집처럼 여겨지고 읽힌다"는 말을 독자분들에게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 크게 기뻤다. 산문집의 원고를 구성하고 개별 작품들을 배치하면서 품었던 나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산문과 다른 한 편의 산문 사이에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시간을 담아두고 싶었다. 그리하여 개별 텍스트의 내용과 함께 책에 깃든 시간까지 읽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김보희(휴머니스트 편집자)
『안 부르고 혼자 고침』(완주숙녀회, 이보현 저/안홍준 그림 |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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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꾸려진 지 14개월 만에 책이 나왔다. "잘 지내냐, 책은 나왔냐"라는 인사보다 "그렇게 책을 안 내고도 회사에 다닐 수 있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은 시간이었다. 그 14개월 동안 '자기만의 방'(이하 자방)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었다. (『82년생 김지영』 씨의 동생인) 86년생 김시영 씨를 위한 시리즈다. 물론 시영 씨는 가상인물이다. '자방'은 김시영 씨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고, 그걸 책에 담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엄마보다 시영 씨를 더 자주 생각한 한 해였다. (죄송해요, 엄마!) 그런 생각도 자주했다. 이 시리즈가 100권까지 이어지면 좋겠다고. 가능할까? 일단은 마감부터 해야겠다. 곧 '자방'의 세 번째 책이 나온다. 앞으로 97권 남았다.
이재현(위고출판사 편집자)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 (이수련 저 |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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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은 어떤 식으로든 인상에 남는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저자는 강의에 상담에 무척이나 바쁜 분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무척이나, 계속, 바쁘실 것 같았다. 계약을 하고 6개월이 흘렀을 무렵 매주 원고를 받기로 했다. 매주 원고를 받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원고가 어떤 생명체의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매주 자라는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뭔가 새끼 고양이와 비슷했다(그 즈음 밥을 주는 동네 고양이 중에 어린 고양이가 있었다. 둘을 비교해보니 그랬다). 그렇게 고양이가 자라는 속도로 원고는 완성되어갔고, 그렇게 완성된 책은 이제 똥꼬발랄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고운성(돌베개 마케터)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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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을 읽은 독자라면 개정신판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 연초에 출간된 『국가란 무엇인가(2017 개정신판)』 저자 서문의 맺음말이다.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굳이 이야기 안 하셔도 되는데'하는 아쉬움으로 마케팅 기획서를 써 내려갔었다. 그럼에도 불구 연말로 치닫고 있는 지금 『국가란 무엇인가』의 판매량은 구판의 6년간 판매량을 훨씬 뛰어넘어버렸다. 유시민 선생님의 <알쓸신잡> 출연 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독자를 배려한 저자의 당부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기꺼이 책을 사서 읽은 독자들의 화답 덕분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심전심.
윤영삼(번역가)
『메시 MESSY』(팀 하포드 저/윤영삼 역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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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 일하면 의견 충돌도 없고 금방 성공할 것 같다. 그래서 회사나 군대나 늘 팀웍을 강조한다. 하지만 다른 생각, 낯선 시선, 오해와 설득이 수시로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이 훨씬 뛰어난 성과를 낸다. 팀웍을 강조하는 조직은 사실, 3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 역시 모든 구성원이 한 가지 생각만 하면 몰락한다. 낯선 관점, 의견 다툼, 이해충돌, 경쟁, 혼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사회를 발전시킨다. 혼돈을 못 견디는 사람, 정답을 못 찾으면 불안한 사람, 모든 걸 깔끔하게 정돈해야만 하는 사람,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길 바라는 조직은 머지않아 인공지능, 자동화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인간보다 기계가 훨씬 잘 하기 때문이다. 올 한 해의 키워드 '민주주의'와 '인공지능'은 이렇게 『메시 MESSY』 안에서 조우한다.
이혜진(마음산책 디자이너)
『박남옥』(박남옥 저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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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과 『노라노』. '우리 시대 큰언니들'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기운에 눌릴까 긴장하면서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두 분의 일대기에 들어갈 추억과 증거 사진들을 자료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흑백 색상 보정에 공들였다. 시대 흐름에 맞춘 거대한 삶의 이야기를 독자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비교적 아담한 크기의 판형에, 호흡을 쉴 수 있도록 여백도 계산해서 판면을 디자인했다. 두 분의 열정 넘치는 삶이 일하는 우리 세대 여성들에게 울림을 주리라 믿음을 가졌다. 디자인하면서 내가 반했듯.
남수빈(안그라픽스 디자이너)
『사임당의 뜰』(탁현규 저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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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에 출간된 탁현규 선생님의 『사임당의 뜰』을 디자인했다. 처음에는 표지에 사임당 그림의 일부를 가져와 넣으려 했으나, 구체적인 대상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한정하기보다는 좀 더 암시적인 방식을 취하고 싶었다. 독자가 책 표지의 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간다는 콘셉트로, 사임당의 그림을 떠올리며 단정하고 섬세한 선을 사용했다. 책 속 장표지에도 조금씩 다른 모양의 문들을 그려 넣었다. '들어가며'와 '나오며'에는 대문을, 그 외의 장에는 살 모양이 조금씩 다른 문을 달아 각각의 방-사임당과 매창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주려 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사임당과 매창이 살았던 시공간을 즐겁게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란다.
유리나(뮤진트리 마케터)
『우아함의 기술』(사라 카우프먼 저/노상미 역 |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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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품위 있는 '우아진'과 그녀를 바라는 '박복자'에게 빠져있다가 나올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우아하다'는 단어에 피식 웃었고, 또 모 아이돌 그룹의 "우~! 우아하게"를 흥얼거리며 부르기도 했다. 『우아함의 기술』은 우아함을 사전 그대로의 의미로 돌릴 힘이 있었고, 읽고 돌아선 나는 한번 더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아함이란 무엇이지? 우아함에도 기술이 있나? 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서 추구하는 '우아함'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우아함'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고 손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일상에서 우아함을 목격한다. 당신의 오늘은 우아하십니까?
엄지혜
eumji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