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1학년 봄 학기를 맞았다. 10대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아침에 눈을 떠 잠들기 직전까지 앞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될지에 대해 모든 관심을 쏟아 부었다. 나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실 미술사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학문이었다. 그렇지만 미술은 어쩐지 내가 가장 이해하고 싶은 분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미술관이라고는 그 지역 출신 카우보이 화가 찰리 러셀Charlie Russell의 작품을 전시한 곳이 유일했던 고장, 몬태나 고원에서 자란 내가 미술사에 뛰어들었다.
그해 봄, 수강 과목들이 마침내 미국 현대미술을 포함해 20세기로 접어들자 나는 몹시 기뻤다. 신들과 누드, 왕과 성자, 센강의 선상 파티 등으로 이뤄진 3000년을 보낸 후, 나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미국 현대미술 수업의 시작은 토머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과 그랜트 우드Grant Wood 같은 지역주의 화가들이었고, 그들의 편안한 묘사는 내가 보고 자란 그림들과 궤를 같이했다.
담당 교수는 내가 수강하는 과목 교수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텍사스에서 온 교환교수로 붉고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긴 머리를 하고 남성용 셔츠와 청바지, 카우보이 부츠 차림으로 다녔다. 평소 지팡이를 짚고 걸었으며 단조롭지만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텍사스 팬핸들 사투리로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교수님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가 “이래서 추상화가 훌륭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거죠”라고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받아 적고 그대로 믿었다. 난생처음 나는 그 커다란 계단식 강의실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본 미술작품들이 이 시대, 혹은 저 예술가를 설명하는 기표가 아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물로 빛을 발하는 것을 경험했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뭐랄까, 인류 전체와 소통하려는 인간 개개인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창백하고 아무 생각 없는 나,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코에 새로 피어싱을 한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한 여자와도 소통하고 있었다. 나는 로맨스와 같은 그 소통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런데 뭔가 있었다.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신경을 긁는 어떤 것이 있었다.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어야 어떻게든 해결을 할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미국 현대미술 수업 두 번째 주, 우리는 뉴욕에 집중했지만 잠깐씩은 유럽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엿보았다. 뒤샹이나 달리, 몬드리안 등 유럽을 떠나 맨해튼으로 몰려온 수십 명 예술가들의 뒤를 좇았다. 때때로 그들의 아내나 여성 모델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드문 경우였다. 나는 필기를 했고, 내가 본 것들이 대부분 좋았기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우리 빨강머리 교수님이 스크린에 불을 밝히지 않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팡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노트에 시선을 던지며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이야기를 즐겁게 전달했다. 폴록은 와이오밍에서 태어났고 캘리포니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미국 서부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를 한 명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안경을 쓰고 미소를 짓더니 폴록이 어린 시절, 내 나이 정도였을 때 어느 설문지 답변으로 쓴 글을 읽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에 관해 말하기란 어렵다. 그것은 일종의 예술가다.”
온 세상이 연단에 선 교수님이라는 한 점을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신경을 긁던 무언가가 꼼지락거렸지만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짚어내려 애쓰는 순간 불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오며 정말 매혹적인 그림 두 점을 밝혔다. 한 점은 폴록, 다른 한 점은 리 크래스너라는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의 아내였지.” 교수님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리 크래스너는 여성이었고 화가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훌륭했다.
신경을 긁던 무엇이, 어떤 소리가 내 뇌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되었고, 너무나도 격렬했기에 나는 나머지 수업 내용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전투적인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예술도서관으로 향했고 잭슨 폴록에 관한 책을 세 권 대출했다. 리 크래스너를 직접 다룬 책이 없어 그녀의 남편을 통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아야 했다. 어떻게 그녀가 그보다 앞서 아트스튜던트리그에 다녔는지, 그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루었기에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독일 태생의 미국 추상주의 화가.이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라 여성이 그렸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는지 등의 이야기도.
나는 책을 덮으며 내가 자라면서 보았던 예술 관련 서적들을 떠올렸다. 우리 가족은 타임라이프사에서 나온 중요한 예술가들에 관한 전집 한 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서재 책꽂이에 꽂힌 그 책들은 모두 회색 표지였고, 책마다 다른 화가나 조각가를 조명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책들을 좋아했다. 그러다 열 살 정도 되었을 무렵 문득 그중에 여성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른들만의 또 다른 무서운 진실 하나를 캐냈다고 믿었다. 여자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진실 같은 것 말이다. 그 후 나는 그 책들을 볼 때면 슬퍼졌다.
나는 예술도서관의 내 사물함으로 가서 우리 강의의 주교재인 H. W. 잰슨의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두꺼운 책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500쪽에 이르러서야 17세기 초 이탈리아 바로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 예술가를 만나지 못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노트에 옮겨 적은 후, 그다음부터는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끝까지 읽었다. 뒤표지까지 왔을 때 여성 화가들 열여섯 명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 완성되었고, 그중 한 사람이 리 크래스너였다. 800쪽이 넘는 책에서 단 열여섯 명만이 ‘공식적’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전부였다. (잰슨의 여성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았다. 등장 순서대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 로자 보뇌르, 베르트 모리조, 메리 커샛, 게르트루데 케제비어, 조지아 오키프, 리 크래스너, 헬렌 프랑켄탈러, 주디 파프, 오드리 플래크, 바버라 헵워스, 마거릿 버크화이트, 도로시어 랭, 버레니스 애벗, 조앤 레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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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수 면담 시간에 잰슨 책에 소개되었던 여성 예술가들을 교수님에게 언급했다. 메리 커샛과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수업 중에 알게 된 크래스너 외에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들이었다. 애연가 교수님은 살짝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새 판본을 갖고 있군요! 우리 판본에는 옷을 입은 여성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는데.” 교수님은 담배연기를 흐트러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부죽한 손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정말 그런 건 아니지만, 내 말뜻 알죠? 여성 ‘예술가’는 없다는 거 말예요.” 교수님은 내가 크래스너로 리포트를 써도 좋다고 허락하며 자료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사정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려웠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잰슨 목록에 있는 여성들에 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뒤지고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젠틸레스키와 크래스너, 자신감 넘치는 19세기 동물화가 로자 보뇌르 등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그 과정에서 잰슨의 책에는 없는 다른 훌륭한 여성들도 발견하게 되었다. 에드모니아 루이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치페와Chippewa 부족과 아프리카 흑인 혼혈로 남북전쟁 기간에 성년이 되었고, 성인 시절 상당 기간을 로마에서 성공한 조각가로 보냈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당시 대학 캠퍼스에서 라틴계 활동가들이 프리다 칼로와 체 게바라가 나란히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칼로 역시 잰슨 책에는 없었지만 그녀의 첫 영문판 전기가 몇 년 앞서 출간되었고, 나는 (예술도서관이 아닌) 중앙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했다.
당시에도 나는 지금처럼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이들 예술가들에 대한 내 집착은, 설령 그것이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다고는 해도, 페미니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이들 화가들과 조각가들에게서 내 친구들이 록 밴드 조이 디비전, 더 클래시, 허스커 듀 등에게서 느끼는 어떤 동질감을 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그들과 나는 동류의 사람들이었다.
잰슨이 그의 미술사 바이블을 쓴 것은 뉴욕 대학의 인스티튜트오브파인아츠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였고, 나는 그곳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이 대학원에서 독일 표현주의에 관한 게르트 시프Gert Schiff, 독일 출신의 미술사가. 잰슨의 소개로 뉴욕 대학에서 19세기 영국 및 독일 회화와 중부 유럽 바로크에 관해 강의했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화가 파울라 모데르존베커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녀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작품은 독일 모더니즘의 대담한 전위대 중에서도 최선봉에 위치했다. 그녀의 회화와 영어로 번역된 일기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간신히 낙제를 면한 나의 형편없는 독일어 점수가 새삼 후회스러웠다.
그나마 프랑스어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대학원 2학년 때 들었던 자크루이 다비드에 관한 로버트 로젠블럼 교수의 세미나에서 나는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라는 초상화가에 관한 발표를 맡았는데 영어로 쓰인 자료가 거의 없었다. 길 건너 위치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그 넓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서면 한 전시실에 라비유귀아르와 그녀의 여성 제자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기념비적인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 그림을 보러 가 화가를 응시했다. 캔버스 속 화가는 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녀 뒤편에 있는 학생들과 나를 위한 롤모델 이상의 존재가 되어주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조사를 했다. 물론 이 일을 잘해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라비유귀아르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역사에서는 잊혔지만, 거장의 풍모를 지닌 이 강인한 여성은 과연 누구인가? 당시 내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부끄럽고, 심지어 병적인 욕구였음에도―나는 그냥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어느 날, 하루 종일 대학원 도서관에 앉아 18세기 프랑스어와 씨름을 하며 자료 조사를 하던 중이었다. 라비유귀아르가 그녀의 가장 야심에 찬 작품들을 강제로 불태워야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방의 조명을 모두 끄고 길모퉁이 잡화점에서 산 봉헌용 양초에 불을 밝혔다. 촛불이 깜박거렸고, 내 카세트 라디오에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맥주와 함께 초콜릿 칩 쿠키를 먹으며, 창밖으로 사람과 차, 불빛을 내다보며 내가 왜 미술사를 공부하기 원했던 것인지를 생각했다. 여섯 개들이 맥주―그것도 큰 캔으로―절반을 마시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을 두 번째 들은 후에야 마침내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예술가들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뉴욕에 온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인생은 영감을 준다.
위대한 예술은 인생을 바꾼다.
뒤에 이어지는 예술가 15인의 경력을 살펴보면 명예를 얻은 사람도 있고 철저하게 무명으로 남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와 작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우리는 예술과 성공을 이해하는 방식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그것을 정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있었던 칵테일파티에서 한 친구가 내게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어떤 예술가들?” 친구가 활짝 웃더니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아마도 그녀는 투지 넘치는 벽화가나 반나체 행위예술가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바로크’라는 한마디 외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학 때 내가 들은 최악의 강의가 미술사였어. 너무 지루했지.”
“선생님을 잘못 만났던 건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말한 후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만한 미술사 한 토막을 덧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내 어깨 너머로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은 충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 책의 첫 장부터 ‘케케묵은 미술사’에 관한 꺼림칙함을 내려놓고 가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까? 부디 내려놓자. 떨쳐버리자. 그리고 우리 모두 코르셋도, 젖을 먹이는 구세주들도, 실크해트를 쓰고 스카프를 맨 남자들도, 엄청나게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복숭앗빛 허벅지들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자.
우리가 더 많이 알 때까지 판단은 잠시 유보하기로 하자.
학부 시절 나의 첫 조교는 내기 당구에서 받은 상금으로 대학원 등록금을 댔다. 그는 내기 당구계에서 샌타바버라 짐(SBJ)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 별명은 애처로울 정도로 진부했지만 그는 평균적인 대학원생보다는 나은 생활을 했다. 그는 세련된 리넨 재킷을 입고 코냑 색깔의 윙팁스wingtips, 끈으로 묶는 가죽 구두. 앞부분에 구멍이 뚫린 덧가죽을 댄 형태가 많다.를 신었다. 그는 당구의 달인이었고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자산을 결합시킬 줄 알았던 그는 윤택한 생활을 누렸다. 게다가 SBJ는 예술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훌륭한 예술을 보면 그는 언제나 흥분해서 발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놀리려는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나는 그 표현이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공책을 펼쳐 전작oeuvre, 全作과 스푸마토sfumato의 정의를 적어둔 메모 옆에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나는 그가 예술에 대해 음란한 말을 하는 것이 좋았다. 고상한 대학생이었다면 특정 성性을 배제하는 언어에 반발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발기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위대한 예술은 지적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훌륭한 성적 충격은 훌륭한 감식안에 상응한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자신을 흥분시킬지는 흥분을 느끼게 되는 순간까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jijiopop
2017.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