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서 벗어나는 자유
편집매장 안에서 팝업 서점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일회성 이벤트를 위해 책을 입고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매장에 책을 들인다고 하더라도 어떤 손님에게 어떤 책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글ㆍ사진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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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제드스컬프

 

‘서점’ 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책을 판매하는 공간을 떠올린다. 책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없는 서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서점이 있다. 공기책방이라 불리는 ‘이카분코’(오징어문고)가 그 주인공이다. 서점 주인이 되고 싶은데 장소와 책을 마련할 비용이 없었던 가스카와 유키 씨는 기타 없이 연주하는 시늉을 내는 ‘에어 기타’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공간도 없고 판매하는 책도 없는 공기책방을 만들었다. 유키 씨는 실제로 가게가 존재하는 것처럼 매일 트위터에서 “책방 문 열었습니다”라고 개점 인사를 하고, 프리 페이퍼 ‘이카분코 신문’을 발행한다. 이카분코는 점점 유명해지면서 오프라인 서점의 의뢰로 서점 책장을 빌려 ‘이카분코 페어’를 개최하거나, 가게가 없다는 이점을 살려 잡지와 인터넷에 지점을 여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공간을 마련하고 책을 입고해서 서점을 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카분코는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님을 알려 주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서점 수익구조의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오픈 계획을 잠시 미루고, 비파크에서 일하는 틈틈이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합정동에 위치한 ‘뮤제드스컬프’Musee De Sculp는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는 뮤즈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편집매장이다. 주택 건물을 개조한 아늑한 공간에서 수입 브랜드 의류와 잡화,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책을 주제로 한 이벤트를 열고 싶어 하던 오새롬 대표님과 책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궁리하던 내가 우연한 기회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표님과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나누다가 ‘북파마씨’ 팝업 서점을 열기로 했다. ‘북파마씨’book pharmacy는 약국처럼 맞춤형 책을 처방하는 서점을 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내가 지은 서점 이름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방식의 서점을 이용해 줄지, 내가 즉석에서 책을 골라줄 능력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오 대표님의 응원에 힘입어 팝업 스토어 형식으로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편집매장 안에서 팝업 서점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일회성 이벤트를 위해 책을 입고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매장에 책을 들인다고 하더라도 어떤 손님에게 어떤 책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책을 입고했다가 남은 재고는 어떡하고? 재고를 보유하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다시 한 번 일본의 공기책방 이카분코를 떠올렸다. 서점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말자. 그러다 문득 책을 즉석에서 고르지 않고 나중에 보내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 손님에게 맞는 책을 고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도 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책을 골라준 경험은 많았지만 책값 이외에 큐레이션 비용을 받는 건 처음이라 적어도 한 시간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 대표님과 상의 끝에 한 달 간 매주 토요일 저녁에 한 분의 손님과 한 시간 동안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일주일 뒤 책을 보내는 방식으로 팝업 서점을 진행하기로 했다. 최종 가격을 책정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SNS 에 모집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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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제드스컬프

 

당신을 읽는 시간, 북파마씨 팝업 스토어

 

가만히 있어도 늘어지는 여름, 축 처진 당신의 몸과 마음을 위해 쉼표 같은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해 질 녘 풍경, 뺨에 닿는 바람, 노래가 잔잔히 흐르는 공간에서 천천히 당신을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10일 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책 한 권과 고요한 여름밤 숲 속에서의 산책처럼 싱그럽고 차분한 향이 담긴 트래블 캔들이 배달됩니다. 초를 켜고 편지 대신 그은 밑줄을 쫓아가며 책을 읽어주세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잔잔한 위로가 당신의 여름밤을 채워줄 거예요. (주의사항: 독서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나 이미 읽었던 책이 배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신청해주세요.)

 

손님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어떤 분이 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손님이면 어쩌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 손님이면?’ 막상 일을 저질러 놓고 나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벼락치기 공부를 하듯 독서 에세이를 여러 권 사서 뒤적거리던 와중에 ‘띵동’ 알림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예약 손님이 나타났다. 과연 이런 방식의 서점을 이용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몇 달을 넘게 고민하고 있었던 나를 구원하는 동아줄이 내려오는 소리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 프로그램을 신청한 이유를 물었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고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나의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했어요. …… 어떤 일에 대해서 정말 내 마음이 어떤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해도 이게 내 진심인지 다른 사람들 말에 휩쓸리는 건지 계속 너무 헷갈려요. 실은 ‘아, 모르겠다. 사주나 보러 갈까.’ 하다가 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와서 신청하게 된 것도 있어요.”

 

‘책’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손님의 진심이 담긴 솔직한 답장을 받고 나니 내가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마음 졸이며 고민하던 시간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편견 없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이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고르면 되는 일이었다.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사라진 자리에 설렘이 자리 잡았다.

 

책보다는 고민 상담이 목적인 손님, 책을 가려 읽는 편이라 다른 장르의 책에 도전해보고 싶은 손님,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대화와 책을 통해 작은 여유를 가지고 싶어 신청한 손님, 책이 좋은데 언젠가부터 독서가 일처럼 느껴져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신청한 손님까지 모두 네 분을 만났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대화를 이어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손님과 헤어지고 나서는 그분의 취향과 사연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책을 골랐다. 이 책이 그분에게는 어떤 의미로 읽힐까. 한 사람을 위한 책을 고르는 일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것처럼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추천할 책을 고민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행위다. 여행지에서 그 사람을 생각하며 엽서를 쓰는 것과 같다. 오랫동안 책을 멀리한 사람도 먼 곳에서 보내주는 엽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낸 한 권이 요즘은 책을 안 읽는다는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독서라는 즐거움으로 이끌 수 있을지 모른다.
- 하바 요시타카, 『책 따위 안 읽어도 좋지만』에서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하는 서점을 열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풀지 못한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낯선 형태의 서점을 이용해줄까? 즉석에서 책을 처방하려면 엄청난 내공과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한데,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런데 북파마씨 팝업 서점을 진행하는 동안 이 두 가지 고민이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책을 큐레이션 하는 능력보다 중요한 건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7월 한 달 동안 팝업 서점을 진행하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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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