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은 범죄행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하게 될 서른 번째 쉼터의 생일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는 피해 경험담으로써가 아니라 생존의 증언으로써 훗날 어떤 글의 견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삶의 견본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은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삶을 증언하고 그 삶을 구해낼 겁니다.
글ㆍ사진 신연선
201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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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명.

 

2016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 당하거나 살해위협을 받은 여성의 숫자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월 14일 발표한 내용으로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였다. 살해 당한 여성은 최소 82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05명이었다. 끝이 아니다. 피해여성의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소 51명이었다.


이것은 오직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만 분석한 수치라는 점을 새겨본다. 이 충격적인 숫자, 채 이틀이 되지 않는(약 1.95일) 시간 동안에 한 명, 그 수많은 여성이 살해를 당하거나 살해위협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잊을 수 없는 날짜, 작년 5월 17일 강남역에서 이유도 없이 여성이 살해 당했을 때 여성들이 마치 제 일처럼 공분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도 같을 것이다. 핵심은 ‘제 일처럼’이다. 여성은 실제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은폐된 폭력의 공간, 가정 안에서 남편에게 폭행 당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생생하고, 뚜렷하다. 그 목소리는 울부짖음인 동시에 고발이다. 고백이며 동시에 치유이기도 한 목소리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지난 3월 14일 창비 서교빌딩에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의 저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집담회를 열었다. 이야기는 저자들의 과거, 저자들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은 어려움, 미흡한 정책과 제도 등에 대한 제안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자리는 한국여성의전화 쉼터 3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기도 했다. 본격적인 집담회에 앞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자리한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 제주여성인권상담소시설협의회 허순임 회장, 김영자 작가 등의 축하 인사를 들었다. 특별히 한국여성의전화 회원이자 2013년 기획팀으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는 김현 시인이 감동적인 축사를 전했다.

 

"저는 여자 같다고 놀림 받던 학창시절에 혼자서 공공도서관에 드나들면서 저에게 견본이 되어줄 이야기를 찾곤 했습니다. 한국에서 남자와 남자가 만나서, 여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룩하는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어떤 글이 어떤 글의 견본이 될 수 있을지 혹은 어떤 작가가 어떤 작가의 견본이 되어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까지도 책의 힘이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책 한 권이 얼마나 오랜 시간 살아남아 무언가를 증언할 수 있을까요. 책 한 권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책 한 권은 어떤 인간보다도 오래 살아남아 무언가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은 단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글을 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하게 될 서른 번째 쉼터의 생일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는 피해 경험담으로써가 아니라 생존의 증언으로써 훗날 어떤 글의 견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삶의 견본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은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삶을 증언하고 그 삶을 구해낼 겁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말하고, 기록하고 있을 모든 여성들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한 권의 책이 가진 힘을 믿고 함께 해온 분들과 혼자만의 생존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삼 한국여성의전화가 제 삶의 견본이 되어주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환대와 열기가 가득한 자리였다. 집담회의 사회를 맡은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사무처장은 “저자들의 경험을 존중해주시면서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 얘기를 경청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해주세요.”라며 당부의 말을 전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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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


먼저 저자 ‘마린’은 책의 의미부터 따졌다. “부모님께 책을 드리지는 못했어요. 책의 내용만큼은 아직까지도 부모님이 모르시거든요. 엄마는 그냥 ‘네가 이제 책도 쓰고 돈은 많이 벌겠다’(웃음)고 하셨는데요. 지금 저는 자녀들과 같이 있지 않은데요. 나중에 자녀들이 어른이 되거나 했을 때 엄마가 이런 일들로 인해서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할 이야기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글쓰기 과정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저자 ‘에스더’는 “제가 폭력으로 인해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떠나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상처들이 글쓰기를 통해 인생의 정리를 할 수 있었어요. 쉼터에 올 때 일곱 살짜리 딸과 함께 왔었는데요. 딸도 상처가 많았는데 쉼터에서 놀이치료와 여러 치료를 병행하면서 많이 치유가 됐어요. 지금은 정말 밝게 자랐어요.”라며 웃었다. 

 

그러나 솔직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이에 저자 ‘해나’는 “글이 안 써져서 몇 줄 쓰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낸 적도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쓰면서 느낀 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니까 내 속에서 비워지는 게 있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보면 나의 아픔인데 그걸 드러내 말로 하고, 글로 쓰고 하면서 많이 치유도 되었고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


저자 ‘사랑’은 경찰을 통해 한국여성의전화 쉼터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경찰서에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신고를 해도 경찰이 계속 저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더라고요.”라며 경험담을 전했다. 이 같은 어려움은 다른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문제였다. 저자 ‘붉은노을’ 역시 자녀가 신고를 해 경찰이 집으로 왔을 때 황당한 경험을 했다.


“경찰이 집으로 와서는 아무 일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아무 일 없다고 하는데 제가 아니라고 했더니 저를 그냥 병원에 데려다 주고 끝내버리는 거예요. 남편과 분리하고 뭐 이런 거 없었어요.”

 

저자 에스더는 경찰에 고발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모멸감을 느꼈던 경험을 말하기도 했다.


“7-8년 전이었는데 신고를 하니까 집안일은 집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어요. 제게서 남편을 떨어뜨려 놓지도 않고요. 경찰이 소용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어요. 후에 이혼 소송을 하려고 형사고발을 했거든요.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혼자 그런 걸 할 엄두도 안 났고요. 그때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가주셨어요. 그랬는데도 우락부락한 경찰이 저를 취조하는 것처럼 앞에 앉혀놓고 하시는 말씀이 경찰 바쁜데 이런 거 신고해서 힘들게 하느냐고, 이혼할 때 유리하게 하려고 고발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어차피 취하할 거면 힘들게 하지 말고 지금 하라고요. 그러면서 “아줌마 맞는 거 누가 본 사람 있어요?” 딱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남편이 무고죄로 걸면 오히려 아줌마가 당하니까 지금 취하하라고요.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는데 정말 모멸감이 느껴졌어요. 저는 피해자인데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어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는 피해자 혹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휴대전화에 112를 단축번호로 등록해놓고 긴급할 때 버튼만 누르면 경찰서에 주소가 떠서 경찰이 출동한다고 했다. 남편이 병원에 간 틈을 타 동네 지구대에 가서 긴급 SOS 콜서비스를 신청하려고 하니 경찰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중략)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112 단축번호를 눌렀다 꺼버렸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조금 후에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112였다. 얼른 받아보니 안내원이 112에 신고하셨느냐며 장난전화 아니냐고 물었다. 너무 황당했다. 내가 받았기에 망정이지 남편이 받았다면 나는 신고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쉼터에 와서 나와 같은 상황으로 한 여자가 남편에게 살해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82-83쪽)

 

폭력상황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가 않았다.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인 이혼 소송 과정에서 겪은 이들의 어려움은 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지원책을 고민하게 했다.


저자 마린은 “항상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고 지난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1년여 간 이어진 긴 이혼 소송 기간 동안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 남편 때문에 겪은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이혼 소송이라는 게 남들은 도장 찍으면 바로 남이지, 이러는데 혼자서 진술서 다 써야하고, 혼자 증거자료 다 찾으러 다녀야하고, 병원에 가서 자료 다 찾아야하고, 정말 쉽지 않아요.”라는 것이었다. 저자 해나 역시 “이혼 소송 중간에 판사가 한 번 바뀌고, 국선으로 하다 보니 변호사도 한 번 바뀌고요, 저도 1년 반이 걸렸어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소송 안 하고 협의이혼 하는 게 제일 좋겠다고 생각한 건 진심이었어요. 정말 금방 끝날 줄 알았거든요. 제가 피해자잖아요. 증거가 있고 다 있는데도 너무 힘들었어요. 변호사를 구하지 않고 재판을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차요.”라며 한숨 섞인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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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한편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쉼터에서 지내다가 가정으로 복귀한 저자의 경우도 있었다. 저자 ‘잎싹’은 쉼터에서 지냈던 경험을 “총알을 장착한 느낌”이라고 전했다.


“처음에는 홀로 서고 이혼하는 과정은 어렵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쉬울 거라 생각이 있었는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쉼터에서 많은 치유를 받고 힘을 키우면서 마치 전쟁터에 나갈 총알을 많이 장착하고 가는 느낌이었어요.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잘못되면 언제든지 나올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줘보겠다고요. 쉼터에 있다가 들어갈 때는 거리두기를 했던 것 같아요.”

 

폭력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애끊는 사연과 삶의 투쟁이 자리했다.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놀랍게도 관객석에 앉아 있던 한 저자의 자녀가 마지막으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책이 나오고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봤는데요.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여느 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어요. 보통 가정폭력의 정의나 상담 내용을 토대로 한 책은 많은데 이 책은 피해자들의 시점으로 매우 사실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고 가정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시고요. 한 때는 제가 문제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일이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정폭력은 범죄행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가정폭력이 얼마나 악질적인 범죄인지, 피해자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줬으면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가정폭력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한국여성의전화 편 | 오월의봄
이 책은 여덟 명의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현장의 기록이다. 한국여성의전화 부설기관인 ‘쉼터’로 탈출해온 여성들이 열두 번의 글쓰기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썼다. 1987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처음 개설한 ‘쉼터’는 여성폭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여성들의 방공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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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여성 #가정폭력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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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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