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가 쓴 장편소설 『열광금지, 에바로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바’)>에 열광하는 사람이다. 극장판 흥행을 위해 제작사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스탬프를 찍어주고, 이 스탬프를 모두 모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는 이벤트를 연다. 놀랍게도 모든 스탬프를 모은 참가자가 나왔는데, 흥미로운 점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 『열광금지, 에바로드』다.
지금도 도쿄 아키하바라에 가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피겨가 에바 등장인물인 레이와 아스카다.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나 지난 작품인데도 에바의 생명력은 여전하다. 정작 나는 에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 단순화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신지가 사도를 무찌르는 이야기인데 이런 단순한 이야기가 26부에 걸쳐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내게는 서사가 너무 엉성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명작이라고 하기에 억지로 보긴 했지만 다음 이야기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하고, 그림체도 썩 예쁘지 않은데다 오프닝과 엔딩 곡도 귀에 착착 감기지 않았다.
대신 내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은 <기동전함 나데시코>였다. 지구를 침략한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와 전쟁한다는 서사,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과 표정과 대사가 거의 없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인물 설정은 ‘에바’와 같은지라, 에바 짝퉁이라는 비판도 많이 들은 작품이다. 이런 비판과는 상관 없이, ‘나데시코’는 상업적으로는 상당히 성공했고 한국에서도 공중파에서 ‘기동전함 나데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에바’보다 유쾌한 분위기에, 나름대로 서사도 완결성이 있고, 등장 인물마다 개성도 뛰어났다.
오프닝을 일본어로 그대로 따라 부를 정도로 지겹게 봤던 작품이나, 지금은 기억이 희미해서 정확히 어떤 점에 끌렸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두 가지 정도가 여전히 인상에 남아 있는데, 첫째는 최첨단 우주전함 나데시코의 함장 미스마루 유리카라는 존재였다. 미스마루 유리카가 세계 최정예 우주 전함 함장에 임명되는 이유는 그야말로 원초적이다. 지구연합대학사관학교 수석 졸업에 재학 중 시뮬레이션 전투에서 무패라는 이력도 영향을 끼쳤지만 무엇보다 외모가 월등했다. 고도로 자동화된 전함에서 함장이란 어차피 기호일 뿐, 누가 해도 상관 없으니 호감형을 뽑겠다는 게 사측의 인사 방침이었다.
둘째는 지구에서 가장 좋은 우주전함이 민간 기업 네르갈 중공업 소속이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국가다. 스텔스 전투기, 아파치 공격 헬기, 항공모함, 핵잠수함을 운용하는 주체도 당연히 국가다. 이런 상식에 반대되는 설정을 ‘나데시코’는 택한 셈인데, 원작자가 의도했든 안 했든 민간 기업이 전쟁에 참여하는 양상은 세기가 바뀐 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나타났다.
『용병』(교양인)은 민간군사기업(PMC)인 블랙워터(현 Xe), 다인코프, 트리플 캐노피 등등에 소속된 보안 청부인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로버트 영 펠튼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용병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취재를 시작한다. 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면서 PMC가 어떻게 돈을 벌어들이는지, 이곳에 소속된 보안 청부인은 어떤 사람인지를 밝혀냈다. 이쪽 업계를 잘 아는 군사 전문가에게는 그리 색다른 내용이 없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미 10년이 지난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PMC가 돈을 버는 구조는 다른 기업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미국 정부가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많은 경우 분쟁 지역 치안 유지가 주 업무지만, 정부 요인 경호 등의 프로젝트도 있다. 성격이 다른 프로젝트라도 보안 청부인이 무장을 하고 때에 따라 총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러한 프로젝트에 여러 PMC가 입찰에 참여한다. 시장 논리에 따라,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하는 업체를 선정해 프로젝트를 준다. 프로젝트를 따낸 회사는 해당 프로젝트를 실현할 보안 청부인을 보낸다. 물론 보안 청부인을 선발하고, 그들을 훈련하는 역할은 PMC 몫이다.
보안 청부인이 일하는 곳은 총알과 폭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다. 목숨을 건 업무다. 당연히 임금도 높다. 하루 평균 500달러 이상(10년 전 기준이니 지금은 그보다 많이 받을 듯하다)을 받는다. 이쪽 업계가 급속히 커지면서 보안 청부인으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다. 주로 군이나 경찰에서 퇴직한 사람으로 구성되나, 일반인 중에서도 지원자가 있다고 한다.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트리플 캐노피 사례(240쪽)처럼 훈련장으로 보내진 60명 중에서 1/3은 채용 받지 못하고 집으로 보내진다.
책에서는 주로 ‘보안 청부인’이라는 점잖은 표현을 썼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군인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이들의 근무지가 전장이기 때문이다. 수시로 교전이 일어나고, 적군이 쏜 총알이나 폭탄에 신체 일부가 훼손되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규군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2004년 4월 4일, 블랙워터 시큐리티 청부인들은 미군이 전혀 지원을 하지 않는 바람에 적군과 교전하다 궤멸에 빠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보안 청부인들이 전장에서 벌이는 활동도 문제다. 교전 수칙이 있기는 하지만, 반군과 현지 주민은 보안 청부인이 때로 지나치게 월권을 행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적개심은 2004년 4월 팔루자 전투에서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슬람 무장 세력은 블랙워터 직원 4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끌고 다니며 거리를 활보하다 유프라테스 강에 매달았다. 미군은 이들 시체를 회수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여야 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지만 전쟁을 외주화함으로써 정부, 민간군사기업, 보안 청부인은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다. 정부는 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 정규군의 희생, 전쟁 비용 등을 줄일 수 있어 좋고 민간군사기업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돈을 번다. 보안 청부인이라는 직업은 퇴직한 군인ㆍ경찰에 훌륭한 일자리다.
미야기가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두고 말하는 품이 여느 때처럼 철학적이었다. “그것을 신념이라고 부르죠.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하는 거죠.” 자신이 큰 부상을 입고 많은 친구가 죽었는데도 미야기는 여전히 보안 청부인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중략) 지난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다. 보안 청부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돈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내가 돌아다니며 본 바로는 대다수가 ‘가족을 부양하려고’ 일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미야기가 LA 경찰청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경찰의 월급으로는 주택 담보 대출금을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에 자신의 기술을 찾는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안다. 다음에는 그가 정확히 어디서 일할지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용병』, 470~471쪽)
주택 담보 대출금… 역시 본질은 부동산인가! “문명이 인간의 생존 상태를 본격적으로 개선했다고 단언하려면 값을 올리지 않고도 더 좋은 주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49쪽)” 라고 『월든』에서 일갈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가족을 위해 살인 면허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토 역시 인간성의 퇴보라고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국가가 전쟁을 할 때는 표면적이나마 명분이 있다. 세계평화라든지 자유민주주의라든지 인권이라든지 평등이라든지 그러한 거대 서사 말이다. 하지만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민간 기업이 전쟁에 뛰어든다면, 그 전쟁의 양상은 더 비참해질 개연성이 크다. 게다가 파견, 외주 등으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면 거리낌 없이 살상하고 파괴할 것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 결재 라인이 많아질수록 인간이 더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증명했다. 물론 홀로코스트 원인은 관료제 외에도 많지만.
『용병』은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다. 게다가 10년 전 벌어진 일이라, 지금 대한민국과는 그다지 상관 없는 논의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미국 같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나라가 아니라 분쟁 지역에 개입할 일이 많지 않고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지 않으니까. 다만 외부 요인보다는 오히려 내부 변화가 군사적인 면에서 PMC가 활동할 여지를 넓힐 수는 있겠다. 인구학자 조영태 서울대 교수가 쓴 『정해진 미래』는 저출산 고령화가 어떻게 한국의 미래를 정할지를 논한 책이다. 교육, 취업, 부동산 등 다방면에서 개연성 높은 예측을 논하는데 그 중 주목할 부분이 군대다.
2014년 현재 약 220만 명 가운데 20%가량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대체복무하는 경우는 포함하지 않았다.) 만일 국방부가 현재 수준의 현역병 규모를 유지한다면 20~25세가 모두 저출산 세대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2027년에는 이 연령대 남자들의 31%가 군대에 가 있어야 한다. (중략) 20세 남성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15명이 군대에 가고 나머지 35명이 사회를 유지하게 된다. 만약 15명으로는 국방이 위태로워진다며 기존대로 30명을 징집한다면 사회에 남게 되는 인구는 20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를 유지하는데 당연히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다. (『정해진 미래』. 94~95쪽)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카드가 바로 민영화, 외주화일 것이다. 부족한 인력을 퇴직한 군인이나 경찰 혹은 일반인에서 채우려는 시도가 생길 테다. 민영화, 외주화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국가가 주도하고 책임져야 할 부분인 군사적인 부분을 민영화, 외주화하는 데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주택담보대출 때문에 적에게 총구를 겨눠야 한다면, 삶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용병’이라는 존재, 단어는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 만나면 매우 매혹적인 단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는 접하고 싶진 않다. 주택담보대출이라는 말도 신문 기사로만 읽고 싶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아마 은행 창구에서 말했거나, 해야 한다. 나 역시도. 용병도 아닌데 참 슬픈 삶이다.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거너스
201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