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인문 발칙한 인문] 해방인가 진열인가
지금이 모든 청년에게 헬조선이 아니듯, 모든 중년이 꿀세대 청년이었던 것도 아니다. 헬조선이라는 말 앞에서 조용히 웃는 소수의 청년이 있듯, 꿀세대라는 말 앞에서 늘 고달팠던 삶을 반추하는 상당수 중년이 있다. 청년 문제는 결국 세대문제의 외피를 쓴 계급문제다.
글ㆍ사진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1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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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근래 청년 문제는 급변했다. ‘노력을 안 한다’고 호통치고 ‘청춘은 원래 아픈 거’라고 설레발치는 자칭 멘토들 앞에서, 청년들이 반성과 깨달음의 눈물을 흘리고, 없는 형편에 그들의 책까지 팔아주던 기막힌 풍경이 불과 한두 해 전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호통과 설레발(흔히 꼰대질이라 표현되는)에 대한 청년들의 반감이 팽배해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급진적 언어들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노오력의 배신』은 하자센터가 서울연구권(‘서울의 다양한 도시 문제를 연구하고 서울의 미래를 기획’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서울시 산하 기구라 한다)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청년 문제 연구의 결과물이다. 조한혜정, 엄기호 등 열명의 필자가 참여 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멘토들의 활약과 급변을 시기적으로 함께 하며 기획되고 집필되었다. 그리고 주로 헬조선 담론의 본격화에 기대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헬조선, 흙수저 등은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급진적인 말이다. 봉건적 지옥, 신분 사회라는 뜻이니 말이다. 이상한 일은 그 급진적 언어들을 우익 언론에서조차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성 세대는 호통과 설레발을 일제히 ‘미안해하는 얼굴’로 바꾸었다. 청년들의 급진성을 언어의 차원에서 한껏 용인함으로써 행동의 급진성으로 나아가는 걸 차단하려는 체제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진 전략은 성공적인 듯하다.

 

대신 청년들은 너나 없이 벌레가 되어 서로를 공격한다. 일베충, 급식충, 한남충, 메갈충… 흔히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을 ‘소비적 동물’이라 자조한다. 소비, 혹은 남과의 소비 능력 비교가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주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비적 동물조차 되지 못할 때 인간은 벌레로 전락한다. 기성 세대의 경우 체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으로 분리지배의 틀을 짰다. 그러나 청년들은 갈등하는 인간이 아니라 아예 벌레가 된 것이다. 벌레를 지배하는 건 손쉬운 일이다.

 

『노오력의 배신』은 오늘 청년 문제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담고 있다. 청년 현실의 실제와 세부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런 현실의 본질을 무엇이며 대안은 무엇인가. 그 지점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토론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부터 해보자. ‘청년 문제는 과연 세대 문제인가?’

 

오늘 청년들이 모두 88만원 세대인 건 아니다. 대다수의 청년이 88만원 세대인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청년은 88억원 세대다. 한국 사회의 부의 편중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에 이르렀다. 거칠게 요약하면, 한국의 한 해 예산은 350조원가량인데 최상위계층 1500명이 300조원의 자산을 독점하고 세습한다. 그게 바로 88만원 세대의 핵심이다. 한국은 극소수의 88억원 세대 청년들을 위해 대다수 청년이 88만원 세대로 살아야만 하는 사회다.

 

이른바 꿀세대가 알맹이를 다 빼먹어 버렸기 때문에 청년들이 헬조선을 살게 되었다는 생각도 사실과 다르다. 지금이 모든 청년에게 헬조선이 아니듯, 모든 중년이 꿀세대 청년이었던 것도 아니다. 헬조선이라는 말 앞에서 조용히 웃는 소수의 청년이 있듯, 꿀세대라는 말 앞에서 늘 고달팠던 삶을 반추하는 상당수 중년이 있다. 청년 문제는 결국 세대문제의 외피를 쓴 계급문제다.

 

청년들이 인간적 존엄을 갖기 어려운 가장 주요한 이유로 일자리 문제를 든다. 그런데 그런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지난 20여년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의 골간은 비정규직화였다. 임금 부담을 줄이고, 고용 안정성을 파괴하여 노동자의 조직력을 약화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기존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는 건드리기 어려우니 신규 채용이 그 대상이었다.  그렇게 온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세대로 나뉘게 되었다. 세대는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 본질은 아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현재의 노동 계급 문제’다.

 

일자리, 혹은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밥벌이 자체가 아니라,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니, 1%는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부러움은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부러움보다 강력한 복종은 없다. 1%를 부러워하는 나는 1%가 정해주는 질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1%가 내 밥을 앗아가는 일은 갈수록 더 용이해지며, 내 밥벌이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밥벌이 외의 다른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밥벌이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기획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386세대가 청년들에게 ‘왜 현실에 대한 사회의식을 갖고 싸우지 않느냐’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386이 그런 꼰대질을 할 처지인가와, 청년들이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있는가는 다른 차원이다. 어떻든 간에, 스스로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의 현실은 절대 변화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조한혜정은 현실 인식에서 아시아 청년들이 가장 낫다는 울리히 벡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 중에서도 헬조선 담론을 만들어낸 한국 청년들이 감탄스럽다고 말한다. 조한혜정은 책의 다른 곳에서 한국 청년들을 “부지런하고 기획력이 뛰어난 부모 세대의 과잉보호로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이 책에서 일관하는 그런 분리에서 나는 ‘한국엄마’ 느낌’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요.’라고 말하며 아이를 제 주관대로 끌고가려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 말이다.

 

조한혜정은 책의 결론부에서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해방적 파국’으로 두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청년 국민/시민 배당제도’와 ‘자치 협치의 공간 만들기’가 그것이다. 최소한의 생존을 하게 해주고 주체적으로 살 능력을 키우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지만, 특히 두 번째 방법은 체제의 기획으로, 청년들을 보호 시절에 넣어 야성을 거세하는 기획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체제의 목표는 청년이 불온해지지 않는 것,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나 모양은 두 번째 문제다. 대안적이고 희망적인 자생적 삶을 살고 있다는 만족감을 갖게 해주는 건, 현실에 자꾸만 문제를 느끼고 꿈틀거리는 부류의 청년들에겐 꽤 괜찮은 대책일 것이다. 지원금을 주어 육성하고 ‘우수 사례’로 진열하는 것도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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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배신조한혜정,엄기호,강정석,나일등,이충한,이영롱,최은주,천주희,이규호,양기민 공저 | 창비
1년간 청년 연구자들 간의 집중토론, 20~30대 청년 심층 인터뷰, ‘헬조선 포럼’을 비롯한 비공개 세미나를 진행하며 청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이 책 『노오력의 배신』은 그들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청년 연구자들이 ‘현실’에서 찾은 대안을 폭넓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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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j314

2016.06.03

지금은 청년 문제지만 곧 사회의 가장 핵심 역할을 하고 이끌어나가야할 사람들의 문제가 되겠죠. 좌절하고 준비하지 못하고 기회를 잃은 청년들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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