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찰스 부코스키를 소개합니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 열린책들
번역가이자 프로페셔널 독자로서 작가를 만나는 방법에는 지극히 간단하게도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직업적 대상으로서 작가의 작품을 소개받는 길이다. 편집자나 에이전시 쪽에서 추천하거나 나 스스로 기획 번역할 텍스트로 작가를 선정하고 읽어보다가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아마 이것이 “최초의 독자”라는 의미에는 가장 잘 맞는 번역가의 특권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줄을 서서 한 작가를 읽어오고 알아오다가 행운의 별이 인도하여 작품을 번역하는 기회를 얻는 길이다. 내가 서가에서 갑자기 발견한 작가라는 최초의 독자로서 자부심보다는 오래 잔잔하게 품어왔던 애정을 보답 받은 듯한 기쁨이 있는 경우다. 찰스 부코스키는 내게는 두 번째 길에서 만난 작가다.
존 르 카레와 이언 뱅크스가 이끈 인연
내가 찰스 부코스키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작가의 안내가 있었지만, 번역가로서 만나게 된 데에는 존 르 카레와 이언 뱅크스의 도움이 컸다. 2010년경, 나는 열린책들에서 출간할 존 르 카레의 『영원한 친구』에 이어 이언 뱅크스의 『비즈니스』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 작업 때문에 당시 평창동에 있었던 출판사에 방문했다가 책꽂이에 꽂힌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 『우체국』과 『여자들』을 보았다. 출간을 준비한다는 말에 나는 평소의 애정을 고백하며 그 역할에 자원했고, 운 좋게도 번역을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맺은 부코스키와의 인연은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번역하고, 그 후 다른 작품을 작업하고 있는 지금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번역가로서 작가에게 느끼는 감정이 처음 독자로 만났을 때의 감정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를 읽던 초기에 매혹당했던 점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설명하기 힘든 아득한 느낌이 든다. 부코스키를 묘사하기 위한 시도를 할 때면, 나는 약간은 뜬금없게도 부코스키만큼 위대한 시인인 딜런 토머스의 자기 설명이 생각난다. 딜런 토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 나는 웨일스 인이다. 둘, 나는 술주정뱅이다. 셋, 나는 인간 종족, 특히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찰스 부코스키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 나는 독일계 미국인이다. 둘, 나는 술주정뱅이다. 셋, 나는 인간 종족 모두를 혐오하지만, (어떤) 여성들을 사랑했다.”
술 때문에 타자기를 팔아치우다
1920년 독일 안데르나흐(Andernach) 출생인 부코스키는 세 살 때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면서 하층민의 삶을 살아온 그는 어릴 적부터 문학에 대한 뜻이 있었고, 간간이 문예지에 단편과 시를 기고하기도 했으나, 그가 시인과 소설가로 알려지게 된 건 40대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였다. 그 사이, 그는 잡역부, 도살장, 철도 노동자, 집배원 등 각종 육체노동을 전전했으며, 그 사이에 술 때문에 타자기를 팔아버리기도 하고, 그로 인해 거의 죽을 뻔한 병에 걸려 병원으로 실려 갔다가 간신히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를 평생 위로해주었던 것은 술과 경마였고, 여자들을 사랑했으나 그에게 그들은 언제나 영원한 문제이기도 했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의 역자 후기에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찰스 부코스키를 “미국 하층 계급의 삶을 노래한 계관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그가 직접 겪은 미국 노동자의 삶이 그대로 그의 소설에 녹아들어 있고, 이 작업을 어떤 작가보다도 잘해냈기 때문이었다.
부코스키는 시인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훌륭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국내에 출간된 찰스 부코스키의 장편소설 네 권 『우체국』, 『팩토텀(문학동네 출간)』, 『여자들』, 『호밀빵 햄 샌드위치』는 찰스 부코스키의 페르소나인 헨리 치나스키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부코스키의 자서전적인 묘사와 소설의 내용은 구분이 모호하고, 모든 인물은 허구면서도 현실에 바탕을 둔다. 그가 교류했던 비트 세대의 시인들은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과장은 확인할 수 없다 해도 그 어떤 미화도 없이 현실의 비참함과 장엄함, 유머와 고통을 그대로 담아낸 부코스키의 소설은 아직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출간된 네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가가 창작한 연도대로 따라서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1971년에 쓰인 『우체국』을 필두로 해서, 1975년 작 『팩토텀』, 1978년 작 『여자들』, 1982년 작 『호밀빵 햄 샌드위치』의 순서가 된다(국내 소설 출간은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 『호밀빵 햄 샌드위치』의 순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고 싶은 독자는 헨리 치나스키의 유년 시절부터 스무 살 초입까지의 삶을 그린 『호밀빵 햄 샌드위치』,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에 입대하려다 거절당한 이후 육체노동 잡역부로 살아가는 이야기인 『팩토텀』, 어쩌다 취직한 우체국에서 12년 동안 반복 노동을 하며 살아오다가 결국은 문학의 삶으로 돌아서는 치나스키의 작가 등단기인 『우체국』, 작가로 성공한 헨리 치나스키에게 찾아온 여러 여성에 대한 성적인 묘사가 생생한 『여자들』의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다. 역자이자 애독자로서는 그 후의 순서야 어떻든 간에 부코스키에 처음 입문하는 독자라면 『우체국』이나 『호밀빵 햄 샌드위치』로 시작해볼 것을 조심스레 권하는 편이다. 밑바닥의 삶을 거침없이 묘사하는 부코스키의 스타일은 그의 문학의 본질이긴 하지만,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지나치게 솔직해서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대담함에 익숙해지고 나면, 가련하고 한심하며 위대한 치나스키를 발견할 수 있다.
터프 가이들은 시를 쓴다
부코스키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87년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션 펜이 그를 인터뷰하고 쓴 글 『터프 가이들은 시를 쓴다』에 나오는 얘기다. 부코스키는 경마장에서 겪는 희열과 좌절의 순간에 대해서 묘사한 후 션 펜에게 물어본다. “모든 날이 좋을 수만은 없지 않소?” 션 펜은 동의한다. “어떤 날은 좋지 않은가?” 션 펜은 그렇다고 한다. “많은 날이?” 션 펜은 여전히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찰스 부코스키는 놀랐다는 듯 웃으면서 말한다. “당신이 ‘아주 며칠은 그렇죠….’라고 할 줄 알았는데. 참 실망이로군!”
인생에서 좋은 날은 고작 며칠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깨를 누르는 가난, 반복되는 노동의 고통, 삶의 지리멸렬한 문제들, 어떤 구원도 없는 듯 보이는 날 중에도 아주 며칠은 좋은 날이 있고, 눈물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웃음,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부코스키의 책들은 이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웃을 수 있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부코스키는 특별한 찬양도, 거창한 위로도 주지 않지만 삶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가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찰스 부코스키 저/박현주 역 | 열린책들
부코스키의 분신 [헨리 치나스키]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생생하게 그려 낸 성장 소설이다. [헨리 치나스키]는 떠돌이, 술주정뱅이, 호색한, 경마 도박꾼으로 밑바닥 삶 그 자체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는 치나스키의 남다른 인격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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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수필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제드 러벤펠드, 페터 회, 존 르카레 ,트루먼 카포티, 찰스 부코스키, 레이먼드 챈들러,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집 『로맨스 약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