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몸이고 정신이다. 그리고 말을 번역하는 것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옮기는 작업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늘 작가의 언어에 집중해왔지만, 그것을 옮기는 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의 생각을 가장 근접하게 파악하는 이가 옮긴이일 터인데 말이다.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는 2015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에 대한 교황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담아낸 책이다. 2016년 1월 전 세계 86개국에 동시 출간한 후, 지난 3월 31일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번역은 당연히 ‘교황 전문 번역자’ 국춘심 수녀가 맡았다.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과 서민성을, (글을 통해) 교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봐 온 국춘심 수녀의 이야기로 확인해 보았다.
수녀님은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번역자로 손꼽힙니다. 로마 교황청립 라테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국내에서 본격적인 번역 작업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첫 서원 후 80년대 후반에 출판사에서 편집소임을 하면서 출판사 이름으로 성서교재나 영성서적 등의 번역을 했어요. 유학 중에도 수도회 창립자 전기와 수도자들을 위한 책을 번역했지만 제 이름으로 알려진 책은 많지 않아요. 교회 안팎에 제 번역이 나타난 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과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강론을 주로 번역해서 SNS를 통해 나누었고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사목연구소의 부탁으로 매일 강론을 번역하여 주교님들에게 보내다가, 나중에는 홈페이지에 올려 공유했는데 너무 바빠 1년 하고 그만두었어요.
특히 교황 전문 번역자로 정평이 나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했던 2013년 3월 13일 아침의 충격적 희열이 출발점이었지요. 선출 후 백성을 만나시는 첫 순간부터 보여 주신 그 겸손과 친근함과 서민성이 준 기쁨과 감동이라니요.... 매일같이 그 말씀의 맛과 힘에 끌려 기쁘게 바빴고, 개인적으로 저희 공동체도 영적 삶에 영향을 받았어요. 매일의 강론과 모든 기회에 쏟아내시는 말씀으로 제가, 저희 공동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사랑스럽고 자상하게 간섭하신다고나 할까요? 이런 것이 신바람이겠지요. 교회에 불어온 신(神)바람(風), 신에게서 나오는 바람이 바로 성령이죠. 그분의 파격적 행보와 소식들을 혼자 알기 아까워서 공동체 자매수녀들에게 나누고 강의를 통하여 신자들, 수도자들, 신학생들에게도 나누었죠. 반응이 대단했어요. 그걸 모아 자료집을 만들어 저희 수도회를 도와주시는 분들과 원하는 분들에게 선물로 배포하고 그 후로는 강론 중심으로 그분 말씀을 번역하여 제2집, 제3집을 만들어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라는 책의 번역을 맡았고, 교황 방한 전 1년간 그분의 행보와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바쁘기도 하고 바티칸 라디오 한국어판이 나와서 매일 교황의 말씀을 따라가며 번역하지는 못하지만, 매달 교황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기 위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리플릿을 만들어 수도회 후원자들과 원하는 분들에게 보내고 있지요.
모든 번역 작업이 중요하시겠지만 이번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를 번역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과 번역 과정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최대한 그분의 의향대로 전해지도록 적절한 어휘 선택은 물론 토씨 하나까지 신경 썼습니다. 특히 대상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신앙이 없는 일반인 독자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이 어려운 점이었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역주(譯註)를 붙이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어요. 사실 천주교의 용어와 개념은 전문용어라고 할 만큼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특수한 것들이 적지 않거든요.
기억에 남을 만하기도 하고 중요한 점이기도 한 사실 하나는 바로 제목입니다. 서양언어는 ‘신(神)’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하나이지요. 대문자로 쓸 경우는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거든요. 소문자로 쓰면 일반적인 개념의 신으로 여럿일 수 있지요. 이 책에서는 당연히 ‘하느님’으로 번역되어야 해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교 신자이고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인이 믿는 신의 고유명사니까요. 그런데 일반 독자까지 생각한다면 천주교의 특징이 드러나는 제목은 조금 민감하지요. ‘하느님’과 ‘신(神)’이라는 표현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면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보편적인 언어를 선택하실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겸손하게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그저 하나의 일반적 개념이기를 감수하는 거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많은 도서가 출간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가 그간 출간된 도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간의 책들 대다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관한’ 책들이 많았지요. 그분께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고 그분의 훌륭함과 말씀을 드러내려는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교황 자신이 자기 사목의 핵심이 되는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이야기하신다는 것이 특징이겠지요.
또 자비에 관해 선출 직후부터 꾸준히 해 오신 강론이나 <복음의 기쁨> 같은 문헌에서 이미 강조한 내용들이 몇 가지 반복되어 있는데, 그 주제에 관해 중요한 내용을 이 책에 모아놓았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사실 자비의 희년 선포는 그분의 개인적 성향에 따른 기획이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처음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교회개혁 프로그램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쇄신이나 개혁은 획기적인 정책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핵심인 자비가, 교회의 얼굴이 되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은 교황의 목자다운 마음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라고 봅니다.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수녀님이 생각하시는 그 이유와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가장 눈여겨보면 좋을 부분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된 가장 원천적인 관계는 자신의 창조주와의 관계이지요. 그 관계에 기초하여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인간 사이의 관계는 사랑만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용서와 자비의 체험은 필수인 거지요. 아마 그것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주목하면 좋을 부분은 그분의 특징적 인본주의입니다. 소수자들이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넘어서서 인격체로서의 사람 자신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지요. 동성애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만 하는 여성도 그런 외적 요소들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존엄한 인격체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에요. 사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은 그 사람 자신과 구별해야 하는 요소이지요. 또 하나는, 꼭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잘못을 많이 하고 사는지 생각하고 자신을 알라며 가르침 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누구라고 남을 판단한담?” 이 문장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은 아주 중요해요. 이렇게 서로를 대할 때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해질 것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SNS 개설이나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선정되는 등 대중에게 더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님의 말씀이 주목 받고 있는데 원서를 옮기다 보면 저자의 평소 어투나 자주 쓰는 표현 등 저자만의 ‘언어의 색’이 보일 것 같습니다. 수녀님이 느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만의 언어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잘 알려진 대로 그분의 어법이 대중적이고 서민적일 뿐 아니라 준비한 원고를 제쳐두고 즉석에서 눈앞의 사람을 마주보며 문답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특징이죠. 청중에게 질문을 하시거나 질문을 예상하시면서 그에 대한 답변을 풀어가기도 하고요. 또 자신의 체험을 즐겨 인용하시지요. 놀랍고 신선한 특징 하나는 창의적인 표현들, 특히 강론이나 일반알현은 물론 가장 공식적인 문헌에서까지 신조어(新造語)와 속어까지 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느님께서 늘 우리를 앞서 가시고 미리 배려하신다는 말을 하시고자 부정적 의미의 ‘선수치다’라는 아르헨티나 속어primerear를 쓰는 것과, 이 책에서 설명하시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라틴어 분사 misericordiando를 만들어 쓰는 경우 같은 것들이지요.
그 밖에 어휘에서는 특별히 이동(移動)동사를 많이 쓰십니다. ‘길을 가다’, ‘걸어가다’, ‘나가다’ 등인데 이는 그분의 사목방식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특히 변두리로 움직여 가라는 것이 그분이 선출 직후부터 가장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명사로서는 ‘가난’, ‘백성’, ‘공동체’, ‘만남’, ‘관계’, ‘연대’, ‘다정함’, 혹은 ‘다정한 사랑’ 등의 단어들인데,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가장 적절한 이 마지막 단어를 아마도 가장 많이 쓰실 거예요. 이런 어휘들을 분석해 본다면 결론적으로 교황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관계어들을 특별히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수도자 스스로 자기 죄를 생각하거나 사람들의 어둠 속에 들어가 그들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등 상처 받은 모든 사람뿐 아니라 수도자들을 위한 이야기도 많은데요, 이번 작업을 하시며 번역자로서, 수도자로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수도자로서 다시 확인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분 자신이야말로 바로 하느님을 닮은 분이요, 하느님 자비의 현존이라고 느껴집니다. 2014년 한국에 오셨을 때 그분은 수도자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통해 ‘자비의 전문가’가 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닮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지금까지 공적인 기회에 수도자들에게 하신 거의 모든 말씀을 번역해 왔기에, 그걸 모아 번역을 마쳐 자료집을 만들고자 하는데 진척이 느리네요. 아무튼 저와 모든 수도자들이 그분의 가르침으로 양성되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자비의 전문가’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지요.
-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프란치스코,안드레아 토르니엘리 공저/국춘심 역 | 북라이프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는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과 바티칸 전문기자인 안드레아 토르니엘리와의 대담을 담은 책이다. ‘자비’라는 하느님의 빛이 시대의 아픔에 닿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관련 기사]
- 문제는 평판! 회사는 ‘갑질 사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
- 각자도생의 시대,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 세계 최고 인재들은 생각하는 법도 다르다
- 우화로 풀어 낸 비즈니스 인사이트
- 청년신춘문예 당선, 여린 마음이 뭉쳐 이야기하는 삶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