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은 지나가도 사랑은 영원하리
연인의 이야기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주제이다. 혹자는 사랑타령에 일찍이 질려버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낡은 ‘사랑 이야기’는 있을 수 있어도 낡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사랑에 대해 쓰려 할 때, 어떤 작품들은 진부함으로부터 구제되어 빛을 발한다.
글ㆍ사진 김보경(예스24 대학생 리포터)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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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속죄』, 마르그리트 뒤라의 『연인』,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묶는다면 무엇으로 묶일 수 있을까. 우선 세 작품 모두 그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며, 그래서 원작의 부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훌륭한 영화로 각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이 세 작품들은 다음과 같이 압축할 수도 있다: 셋은 모두 특정한 시대적 조건을 배경으로 어떤 연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기사 제목의 ‘시대극’이란 표현은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 가져온 것일 뿐 장르 문법상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압축이 실제 작품의 진면목을 가리는 장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작품들은 모두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두 남녀의 사랑의 길은 그러한 외적 조건과 더불어 어떤 내면의 소용돌이 때문에 평탄하지 못하다(하기야 사랑이라는 것이 어찌 평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배경을 읽고 소용돌이의 궤적을 따라가보는 과정에서 겹겹이 드러나는 의미와 작품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이를 정리하며, 영화가 미처 혹은 일부러 그려내지 않은 것들과, 소설이 아닌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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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_ 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언 매큐언의 『속죄』


현대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은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 되는 『속죄』 이외에도 『첫사랑, 마지막 의식』, 『암스테르담』, 『체실 비치에서』 등의 저서를 발표했다. 『속죄』 뿐만 아니라 단편집에 실린 몇 작품들이 영화화되기도 했지만, 특히 <어톤먼트>가 호평과 함께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하며 원작 『속죄』도 덩달아 더욱 유명해졌다.


작가는 한 소녀(브라이오니)와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 그리고 로비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과 사랑을 중심 소재로 삼으면서도,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2차 대전 당시의 정황 역시 소설 전개 과정의 중요한 축으로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소설에서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는 통제할 길 없는 혼란한 세상도 정돈된 세상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설을 통해 정리정돈에 대한 욕구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속죄』 19쪽)


위 인용구처럼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의 단면을 임의대로 정리하려는 브라이오니의 욕망은 소설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핵심적인 기폭제가 된다. 그녀에게 세상의 무질서함은 아직 그 자체로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잡혀야 한다. 이 욕망은 로비와 세실리아를 분리시키는 비극을 낳고, 이어 2부에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비극 속에서 더욱 애틋해진다. 다시 3부에서는 브라이오니의 시점으로 돌아와 그녀가 로비와 세실리아를 위한 속죄로서의 글쓰기라는 과제에 매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로비와 세실리아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 전쟁의 참상 등을 잘 다루고 있지만, 소설이 브라이오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뻗어간다는 느낌이 강한 반면 영화의 경우 로비와 세실리아에 대한 묘사의 비중이 더 높다. 그것은 아마 브라이오니의 내면을 소설처럼 담아내기에는 영상으로서 가지는 한계 때문에 초점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설이 던지는 문학관에 대한 질문은 소설 속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과감히 간략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빼어난 영상미와 사운드트랙을 자랑하며 영화적 연출이 훌륭하게 이루어져 영화로서 성취를 분명히 이뤄냈다. 시얼샤 로넌,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의 호연 또한 영화에 빛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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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_ 네이버 영화 스틸컷

 

마르그리트 뒤라의 『연인』


노인이 된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들을 복구하며 글을 써내려 간다. 1930년대 프랑스령인 베트남으로 이주해 간 열 다섯의 프랑스 소녀, 그리고 그곳에 땅을 소유한 부유한 어느 연상의 중국인은 그렇게 소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전위적인 문학 실험을 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당대 이러한 전위적인 소설들을 가리켜 ‘누보로망’(nouveau roman)이라 불렀는데, 뒤라는 스스로 이 그룹에 속하기를 거부했지만 관습에서 벗어난 독특한 스타일을 소설에 펼쳐낸다는 점에서 그녀의 문학들은 누보로망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인 『연인』에서도 그녀만의 독특한 문체와 개성적 구성이 돋보이는데, 인과적 서사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묘사, 과거-현재/베트남-프랑스를 넘나드는 서술, 1인칭과 3인칭 시점의 혼동 등의 장치들은 현재 읽기에도 낯선 소설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을 끌고 가는 중요한 내용은 소녀와 중국인 청년과의 사랑이지만 그와 동시에 다양한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특히 어머니-큰오빠에 대한 증오, 작은오빠-엘렌 라고넬에 대한 사랑 등이 드러나는 대목은 기억을 복구하려는 그녀(노인이 된 소녀이자 뒤라 자신이기도 한 그녀)에 의해 순서 없이 분출하고 서로 교차하다가도 또 겹친다.


영화 <연인>에선 이러한 어머니나 오빠들에 대한 대목이 대폭 생략되고 뒤라의 소설적 장치들도 영화 상의 플래시백 기법 정도로 최소한으로 남겨진다. 대신 장 자크 아노 감독은 영화적 연출에 집중하며 소녀와 중국인 청년에 초점을 맞춘다. 소녀의 성숙(이자 조로)과 욕망을 상징하던 남성용 중절모, 낡은 원피스와 금박 장식의 구두는 영화 연출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특히 영화 <연인>을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내뿜는 관능을 잊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관능은 단지 둘이 정사를 나누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불타고 짓눌리고 또 타오르는 둘의 욕망이 이미지를 관통하며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혹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자동차 안에서 서로 손이 맞닿던 그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렇게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은 소녀의 조숙과 욕망 그리고 중국인의 무력과 사랑과 얽히며 영화 속 이미지는 이미지 이상의 것을 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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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네이버 영화 스틸컷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등 18세기에서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국 시대극 로맨스물은 이를 각색한 로맨스 영화 내에서도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할 정도로 작품이 풍성하다. 특히 이 작품들은 영화나 연극, 드라마로도 수 차례 각색됐는데, 그 중에서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각색한 <오만과 편견>(2005)은 개봉 당시 영화의 흥행으로 소설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렇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떠올릴 때 같이 대열에 오르는 작품으로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분제와 가부장제의 압력에 맞서는 주체적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처럼,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도 역시 역시 한 여성이 자신의 존엄과 사랑을 지키는 일이 곧 당대 권력의 압력에 맞서는 일과 다름 없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주인공 제인이 손필드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며 저택 주인 로체스터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지만, 19세기 영국 사회를 비추어 볼 때 ‘사랑에 빠지는 일’은 단지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내리는 결단에서 비롯한다. 더욱이 괴팍한 성격의 로체스터가 당당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서로의 계급 차를 극복하는 과정은 이들의 사랑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손필드 저택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저택들과 달리 어딘지 음침하며 비밀을 품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소설 후반부 음침함의 비밀이 드러날 때 이들의 사랑은 위기에 닥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 전반의 분위기를 아우르면서 후반부엔 중요한 서사적 전환을 야기하기도 하는 손필드 저택의 이 음침함은 『제인 에어』를 영화로 각색할 때에 언제나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수 차례 각색이 있어왔지만 대표적인 작품으로 1996년 개봉작 프랑코 제페렐리의 <제인에어>(샬롯 갱스부르 주연)와 2011년 개봉작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에어>(미아 와시코브스카 주연)를 들 수 있겠다. 제페렐리 작품의 경우 원작의 음침함이 다소 걷혔던 반면 후쿠나가의 경우 그 음침함을 잘 살리면서도 고전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는 주된 평이 있었다. 제인 오스틴 작품들의 명랑한 기품과는 또 다른 매력이 펼쳐지는 <제인 에어> 속 두 인물의 사랑은 어쩐지 더 애틋하고 뜨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연인의 이야기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주제이다. 혹자는 사랑타령에 일찍이 질려버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낡은 ‘사랑 이야기’는 있을 수 있어도 낡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어떻게 진부함으로부터 구제하고 의미를 끌어올릴 수 있는지 예증하는 작품들을 보아 왔고, 또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속죄』『연인』 그리고 『제인 에어』가 우리에게 계속 읽히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속죄』『연인』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훌륭한 원작을 가져와 이를 토대로 어떤 작품을 만들면, 이 결과물에는 그 훌륭함의 빛이 물들어 있지 않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나 각색의 작업이 보장된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 훌륭하고 다채로운 원작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다듬어 내놓을 것인가라는 고민의 결과에 따라 매우 다른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고 원작을 찾아 읽거나,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단지 그때의 그 감동을 또 한번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원작을 이해하는 어떤 시선의 경험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는 작품을 ‘한 번 더’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누군가와 ‘함께’ 감상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감상의 폭을 넓혀줄 더 좋은 감상자들에 의한 각색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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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