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그 길에 근대사가 있다
“지난여름부터 꾸준히 산복도로를 걸었다. 거닐거나 배회하거나 산책 하기엔 길이 너무 협소했으며, 정처 없이 걷기에도 주변이 녹록지 않 았다. 이상하게도 한 번 발걸음을 떼면 중간에 잘 멈춰지지 않았다. 마 치 물길인 듯 걸음이 흘러가는 듯했다. 지나가면서 바라보고 떠밀려가 면서 생각하고 걸어가면서 글을 썼다. 산복도로를 걸으면서 뚜렷한 기 억으로 남아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시점부터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였다는 점이다.”1)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부산 영주동 산복도로를 이리저리 걸어 다닌 《산 복도로 모노로그》의 저자 은래 씨의 고백이다. 처음 걸을 때는 주변을 본다.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멋진 상품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즐 긴다. 사실 거리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들고 걷는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마냥 걷는다. 카메라도 내려놓고 생각도 접어 두고 그냥 걷는다. 그다음에는 나와 대화하기 시작한다. 내가 보인다. 멋지다. 참 잘했다. 조금 지나니 왜 이리도 아쉬운지, 왜 그렇게 망설이고 주저했는지……. 그래서 걸으면 치유된다. 역사산책자만의 경험은 아니다. 걸으면 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걷기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거리는 온갖 매력적인 것들 로 유혹한다. 걷는 사람은 기실 아무것도 아닌데 대단한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얄팍한 주머니를 탐하기도 한다. 때로 걷는다는 것은 내 땅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의식과도 같아서 무고한 사람들이 정복자의 무자비한 칼날에 무력하게 죽어 나자빠지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뿌리 깊은 나무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에서 북학사상으로 이어진 민족의 자주적 의지는 개화사상에 이르러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간다. 우리 임금이 신분을 위장한 채 왕궁을 버리고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치고 무력하게 국권을 침탈당한 현장,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해서 죽은 후에도 조선에 묻히기를 원했던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 잘 가르쳐서 인재로 길러 달라고 직접 이름 짓고 근대식 교육을 시작한 곳, 길 위에 있는 역사박물관 정동을 걸었다.
몹쓸 오랑캐 앞잡이가 조선중화를 짓밟은 자리에 만든 송석원의 흔적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나 박노수미술관은 우리 민족의 푸른 기개를 한껏 뽐낸다. 나라를 팔아 제 자식에게 지어준 집을 되사들여 기증하고 돌아가신 남정 박노수 화백의 높은 뜻을 본다. 새봄에 가장 늦게 잎을 내지만 찬 겨울 가장 늦게까지 잎을 간직하는 선비목의 지조를 잃지 않았던 조선남 종화의 산실 청연산방靑硯山房 청전화옥에서 조선 선비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한다.
전통시장에서 패션과 디자인 전당으로 거듭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간송문화전을 보고 동산을 넘어 일제강점기 문화보국文化保國한 조선 사람들의 신도시 동촌성북동까지 걸었다.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면서 끊임없이 남을 해치는 남쪽 오랑캐 왜의 야만과는 품격이 다른 조선중화의 극치를 본다.
군산이나 인천과 달리 자주적으로 개항한 목포 개항장거리에서 넘쳐흐르는 흥과 한을 오늘에 되새기고 비로소 나를 발견한다. 눈물이 쏟아지는 가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 일러주신 우리 조상들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민족을 되찾는다.
남쪽 오랑캐 왜를 어르고 달래려고 만들어줬던 왜관이 화근이 되어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있었더니 결국은 강제로 개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항장 부산을 걸었다. 지친 몸 뉠 수 있는 조그만 땅이라도 비집고 들어가서 어느덧 판잣집이 산을 가득 메운 달동네에서 개항장으로 이어지는 거리에 널려 있었던 오랑캐 흔적을 싹 쓸어버 렸다. 모질고 독한 부산 사람은 흥남 사람, 서울 사람, 남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앞집이 뒷집 햇볕을 가리지 않는 속정 깊은 산동네 가파른 계단에서 사통팔달 잇고 소통하는 부산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다. 청년실업, 조기퇴직, 노숙자 등 생소했던 신조어들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신자유주의시 대에 꼭 필요한 지혜를 발견한다. 삶을 되찾는다.
1,004개로 이루어진 섬, 그래서 천사섬 신안군을 찾아 증도를 걸었다. 원불교 최고지도자 장응철 종법사,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 한국대학생선교 회 설립자 김준곤 목사 등 많은 종교지도자를 배출한 천사섬 신안에서 또 한 명의 종교지도자 문준경을 찾아 나섰다. 인민군 죽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으나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던 큰 사랑이 있다. 그 사랑으로 죽인 사람과 죽임을 당한 사람의 후손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고 있는 천사섬 증도에서 더불어 사는 민족을 발견한다.
우리 역사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골목 풍경이 달라 보인다.
오랑캐 조선 침략
1592년 조선은 남쪽 오랑캐 왜의 침략으로 7년 전쟁을 치른다. 내부적으로 구정치세력 훈구파에서 신정치세력 사림파로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고 있었던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급변기에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이다. 조명연합군의 정규전, 지방 사림 의병의 게릴라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 등으로 일본 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조선 백성의 삶은 피폐 해졌지만 민족자긍심에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조선, 명, 일본 등 동북아시아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기른 여진족은 1627년 3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형제지의兄弟之義를 요구한다. 이것을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고 한다. 이후 불과 10년 만인 1636년 또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킨다. 국호를 청이라 정한 여진족이 군신지 의君臣之義를 강요하며 재차 쳐들어 온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47일을 항전 하였으나, 결국 삼전도三田渡로 내려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를 바치는 수모를 겪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때는 전쟁의 상처는 컸지만 승리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는 패전 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께서 치욕을 당하심으로 민족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2)
겸재 정선 <청풍계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진경시대
조선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께서 주자성 리학을 집대성한 데 이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께서 조선성리학을 정립한다. 율곡학파는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는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열었으며 그로써 조선의 자긍심 을 회복한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은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장식하고,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은 순 한글소설로 국문학을 활짝 꽃피운다.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는 조선 고유 서체 석봉체를 이루고, 간이 최립簡易 崔?, 1539~1612 은 독특한 문장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을 개척한다.3)
조선 고유색 발현을 통해 민족자긍심을 회복하고 진경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을 재발견한 국토애國土愛였다. 자기애自己愛에서 비롯되는 지극한 국토애로부터 문화적 자존심이 싹트고, 문화적 자존심은 문인의 붓 끝에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되고 진경시眞景詩가 되었다. 창강 조속滄江 趙涑, 1595~1668,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 사천 이병연 ?川 李秉淵, 1671- 1751 등 율곡학파의 당대 문인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걷기 시작했다.
창강 조속은 억울하게 옥사한 아버지 풍옥헌 조수륜風玉軒 趙守倫, 1555~1612 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반정에 성공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아니하고 조선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영조 임금의 스승이었던 겸재 정선 역시 전국을 두루 걸으면서 조선의 강토 산하를 화폭에 담았고, 그 그림들은 진짜 경치를 방불케한다. 특히 조선의 화법으로 금강산을 사생함으로써 진경산수화를 완성한다.4)
삼연 김창흡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시문으로 표현하되 어순에 변화를 주어서 우리 어감 에 맞도록 함으로써 진경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겸재 정선, 사천 이병연 등 후학들에게 전파했다. 사천 이병연은 국내 곳곳을 두루 걸어서 그 지 방의 기후, 풍물, 지형, 인심과 더불어 경승을 노래하는 진경시를 쓰고 겸재와 함께 시화쌍벽을 이룬다.5)
조선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도덕적 문화국 가로 설정해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동아시 아 문화중심국가로 그 위상을 새롭게 한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북쪽 오랑 캐 청淸이나 남쪽 오랑캐 왜倭와 같은 야만국가가 아니라 인륜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담력과 지혜를 가진 문화국가 조선을 건설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한다.6)
이제 조선시대 도성 한양에서부터 부산까지 우리 역사를 걸어보자.
2015년 9월 최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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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근대사최석호,박종인,이길용 공저 | 시루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다정히 걷고 있는 연인들의 눈앞에,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정동교회 바로 옆 카페에, 서대문에서 광화문에 이어진 빌딩 숲 사이에, 정동에는 역사의 영광, 분노, 좌절,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걸 《골목길 근대사》의 저자들은 제법 진지하게 안내하고 있다. 늘 지나다니던 길, 이제 저자들의 안내를 따라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보는 역사산책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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