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위한 弔詩
외국에서 변을 당한 壎에게
- 마종기
1. 入棺式
어릴 때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대학에 가서는 작은 아랫방을 나누어 쓰고
장가든 다음에는 외국에까지 나를 따라와
여기 같은 동네 바로 뒷길에 살던
내 동생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
동생이고 친구고 내 의지처였습니다.
싸움 한번도, 목소리 한번도 높이지 않은
들풀처럼 싱글거리며 착하게 살던 내 단짝,
하느님, 당신밖에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관을 덮고 나면 내일 하늘이 열리고
내일 지나면 이 땅에서 지워질 이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귀염둥이 내 자식이라고 받아주세요.
엄마와 언니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껴온 동생이 언니에게
어쩌면 정말 치사하게 들릴까 봐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언니에게 꼭 한 번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말이 있어.
뭐든 똑 부러지게 잘하고 최선을 다해서 많은 것을 이룬 언니를 보면 항상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워. 어려서부터 누구 동생이구나 하면서 날 쳐다보는 시선들이 한편으로는 날 우쭐하게 할 때도 있었어. 그런데 갈수록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지겹고 싫어졌다는 것을 언니는 알까.
공부, 그림, 음악,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언니에 비해 나는 항상 뭔가 2퍼센트 부족한 아이였어. 성적도 그냥 중간, 그림이건 음악이건 두각을 나타낼 때도 없었고. 다만 언니보다 친구가 많고 명랑하고 또 살짝 언니보다 멋내기나 잘하는 정도라서 난 항상 뭔가 부모님한테 뒷전이었잖아.
언니는 그래서 외국으로 어학 연수도 갔고, 엄마가 좋아하는 의사 사위도 보게 해 줬고. 난 그에 비해 전문직도 아니고 남편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고.
사실 언니네 부부랑 부모님이랑 같이 밥을 먹으면 항상 체하는 것 알아? 어떤 때는 이제 언니네 부부하고는 자주 보지 않고 살면 좋겠다 생각할 때도 있어. 특히 아직도 엄마가 언니네와 우리를 비교하고 노골적으로 우릴 무시할 때는 더 그렇지. 언니가 만약 조금이라도 내 기분을 이해한다면 지금처럼 그렇게 배려 없이 언니네 식구들 자랑은 하지 않아줬음 좋겠어.
엄마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언니가 동생에게
난 오히려 내가 훨씬 더 엄마 때문에 인생이 어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사실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얼마나 내 성적, 내 학교, 내 연애, 심지어는 내 결혼까지 다 관여를 했니.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나도 너처럼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정해주는 대로 약대를 갔고, 정말 아무 재미도 의미도 없는 공부를 하고 졸업하느라고 얼마나 내가 힘들었는지 아니. 그래서 약사 자격증을 땄어도 어디 가서 열심히 일한 적도 없잖아. 난 약국에서 하루 종일 아픈 사람들 상대하면서 지루하게 제 자리 지키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싫어. 넌 약사 자격증만 있으면 노후는 보장되니 좋겠다고 빈정대지만, 나는 하루를 살아도 너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왜 엄마는 내 인생에는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개입을 했으면서 너한테는 그렇게 관대하게 대해 주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을까. 나는 정말 네가 항상 부러웠거든.
너는 지금 내가 의사 남편이랑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엄마 때문에 강제로 헤어져야 했던 기억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어. 그렇다고 의사가 뭐 대단한 지위도 아니고, 부족한 것 없이 돈 갖다 주는 것도 아니잖아. 다만 엄마야 어디 가서 우리 사위는 어느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누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좋으시겠지.
그렇다고 내가 우리 식구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형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면 좋겠니. 그냥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내 삶에 만족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제발 이 언니에게 늘 그렇게 날카롭게 대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나미’s comment - 가족 안에서 나만 힘들다는 건 착각이다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는 흔한 이유 중 하나는 남과의 비교이다. 특히 가족들끼리 그런 경쟁관계가 되면 더욱 힘들어진다.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말이다. 남들은 결혼식을 어디에서 하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다는 이야기부터 남편의 연봉, 아내의 체중, 재테크 성공률, 자식의 교육까지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사실 내 관계의 망이 주는 기쁨들은 사라진다. 경쟁논리에 사로잡힌 무서운 기업 같은, 무늬만 가족이 된다.
사실 내 주변 사람은 다 나보다 더 많이 받았고 나 혼자만 무시당하고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본인이 더 힘들다. 당신이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상대방도 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며느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자신이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 눈치 보느라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내가 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희생자 놀이는 드라마 보는 것으로 간접 체험하고 말자.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포장하는 그 시간에 모두가 존중받으며 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도 “질투는 가장 무익하고 고통스러운 질병”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질투하는 상대가 가족이라면 쉬지도 않고 그 통증을 느껴야 될 것이다.
‘가족이라면 절대로 서로에게 등을 돌려선 안 된다!Family should never turn against family!’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처럼 꽤 많은 경우 위선이고 폭력이 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종종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가족이면서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어?’라고 물으며 생각을 강요하기도 하고, 지레 자신의 다른 생각을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족은 당연히 하나의 종교를 믿고, 하나의 정당을 지지하고, 똑같은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은 곤란하다. 내가 원해서 이 가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이 가족이 내 인생 전체를 책임져 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배우자와 결혼하고 서약한 것이지, 배우자의 다른 가족들과 결혼한다고 서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배우자의 가족과 내가 모든 삶의 방식을 서로 맞춰야 한다는 것은 종종 이혼 사유가 되기도 한다. 진짜 가족이라면 질투와 분노로 설령 등을 돌린다 해도, 다름을 인정해 주고, 또 오랫동안 기다려 주면서, 손을 잡을 때가 되면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내가 성장하고 생존하는 데 이익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 가족이 행복해지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요?’ 하고 물어볼 때 ‘서로 믿고 사랑해야지’라는 추상적인 대답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라고 작은 바람을 대답하는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집이 좀 더 넓었으면, 부모님이 좀 더 잘났으면, 혹은 좀 더 간섭이 없었으면, 자녀들이 좀 더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욕심이야 물론 있겠지만, 진짜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수용 그리고 공감일 것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너무나 많은 것을 공유하는 가족이니까 서로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더 아프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복한 가족이냐 그렇지 않은 가족이냐를 결정하는 요인은 번듯한 외적 조건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을 때 유쾌하고 편안해진다는 점이다. 같이 잘 놀고, 같이 맛있게 먹고, 같이 웃을 수 있으려면 일단 서로에게 질투와 원망으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들이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실천처럼 보이지만, 자기 자신이 이미 상처가 많이 나 있는 경우엔, 말 속에 그 독기가 자기도 모르게 서리기 때문에 생각만큼 쉽지 않을 수 있다.
겉으로 보자면 가족끼리 의가 상하고 싸움을 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다. 생활비를 누가 더 버느냐, 왜 시가에 혹은 친정에 썼느냐, 쓸데없는 데 낭비한다, 하는 등 돈 문제로 싸우는데, 핵심을 들여다보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질투, 소외감, 박탈감, 열등감 등의 감정문제가 더 큰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돈 문제가 나오면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치사하게 구는 이유다. 콤플렉스는 본래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지만, 그중 돈 콤플렉스도 질긴 대상 중 하나다. 돈은 단순히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 지위의 상징, 인간성의 척도 등으로 치환된다. 가족끼리 누가 더 돈을 쓰느냐, 누가 더 책임을 지느냐에 대해 자꾸 따지게 된다면 그래서 그 때문에 서로 싸운다면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훨씬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먼저 간파하고 다루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 서로에게 따뜻한 쉼터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그 쉼터는 누가 관리하고, 내 배고프고 지친 몸은 누가 돌보는가? 결국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족이 좀 더 안락하고 쾌적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머니들이 희생자 역할을 받아들였지만 요즘엔 그런 어머니 상을 찾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설령 혼자 노예처럼 일만 하는 숭고한 어머니가 있다 쳐도, 그런 어머니가 건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제들 역시 과거에는 주로 아들을 위해 딸들이 희생한다든가, 맏이를 위해 차남이나 삼남이 희생한다든가,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든가 하는 식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부모의 결정에 아무 갈등 없이 동의하는 자녀들은 거의 없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모두가 수긍할 정도로 공평한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가족도 일종의 팀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함께하는 순간에는 어느 정도는 보조를 맞추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아이를 키울 때 개성을 존중한다며 항상 자기 멋대로만 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 어떤 조직에 가서도 적응을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인 독재자의 마음대로 가족이 휘둘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속상한 일이 있고, 나만 소외된다든가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면, 아주 짧고 간략하게 핵심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가족은 편한 상대인 듯 잘못 오해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날것으로 교환하기 십상이다. 지나친 감정의 홍수로 상대방에게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상처를 줄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는 차라리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직장 상사나 동료라고 간주한 다음, 마음속에서 핵심을 정리해 단숨에 얘기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족이니까 구구절절 감정이 과잉될 때 부담스럽던 가족들의 쓸데없는 간섭과 우려에서 벗어나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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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낯설어지는 부모와 자식
이나미
이나미 심리분석 연구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 교수
한국 융연구원 지도분석가 및 교육분석가
저서 : 『다음 인간』, 『슬픔이 멈추는 시간』, 『한국사회와 그 적들』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