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올리버는 돌아오라.
내 주장에는 근거가 있었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하지 않나? 일곱 개였나? 많을수록 좋으니 아홉 개라고 치자. 그런데 왜 올리버는 한 번에 죽었을까? 역시 뭔가가 이상했지만, 어쩌면 아홉 개를 다 썼는지도. 나의 큰 고양이가 여덟 번 죽고, 여덟 번 살아나서 나를 찾아왔다면, 내가 그 애를 집어들어 먹이고, 씻기고, 재워서 가족으로 삼은 거라면, 내 곁에서 맞이한 것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아홉 번째 죽음이라면,
그래서 나는 나의 주장을 물렀다.
*
폴의 죽음을 놓고,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이라는 다섯 가지 단계 중 앞의 네 단계를 나는 끝도 없이 오갔다. 하루빨리 우울해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음 단계가 있다고 하니까. 우울은 우리가 잘 아는 감정이다. 폴이 그것 때문에 죽었으니까.
부정:
폴이 진짜 죽은 게 아니라는 생각. ‘폴 생존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건 D였다. D는 말이 안 되는 걸 옳다구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어디 살아 있는 거 아님?” 그럴 수도.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폴이 살아 있는 꿈을 간혹 꾼다. 죽은 친구는 사실 죽지 않았고, 그 꿈속에서 그 사실을 나만 모른다. 어떤 꿈에선 모두가 합심하여 폴이 살아 있다는 걸 내게 숨기고(왜냐하면 우리는 절교한 상태였으니까), 다른 꿈에선 그가 죽었다고 믿고 몇 년을 살아온 나만 이상한 사람이다. 어떤 쪽이건, 꿈속에서 살아 있는 폴을 만난 순간 나는 안도한다. 기뻐한다. 속아도 상관없다.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속은 척 할 것이다. 다시 친구가 될 수 없어도 상관없다. 진짜 살아 있었구나. 아, 정말 다행이야!
분노:
왜 하필이면 폴이 죽었지? 세상엔 나쁜 놈들도 많은데.
협상:
D 는 협상의 명수이기도 했다. “솔직히, 막상 죽고 나면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한 번의 기회를 더 줘야 되는 거 아니냐? 살면서 딱 한 번씩은 자살 취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조금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축키를 한 번 눌러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왜 안 돌아오지? 후회하지 않았나? 아니면… 너도 취소권을 다 썼니?
우울…
다시 부정(죽음을 가장하고 신분을 세탁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되짚으며)-분노(이토록 부당할 수가!)-협상(제가 뭘 하면 되나요?)-나는 샤워기 밑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집안에서 미지근한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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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거의 모든 심리상담가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담자님은 부정적인 감정을 구체화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잉크 반점 검사를 하던 내가 어느 순간 이 얼룩이 여자로 보이는지 나비로 보이는지 판별하길 그만두고 ‘잘은 모르겠지만… 뭐가 됐건 기분 나쁜 형상이네요’ 대답하기 시작했을 때 검사자가 한 말이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건 정확히 어떤 감정인가요?’
‘너무 기분이 나빠서 계속 보기 싫고, 빨리 다음 그림으로 넘기고 싶다는 감정이요.’
폴의 죽음과 함께 쏟아지는 감정들을 분간해 보려고 미약한 노력이나마 해본 건, 감정에 이름 붙이기가 중요하다는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나한테 넘길 페이지가 더는 없어서였다. 없었다, 다음 그림은커녕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조차도.
나는 여태까지 친구들과 다음 페이지를 같이 구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땅콩집이 등장하지만 뜬구름 같은 소리가 아닌 구체적인 청사진을. 공상과 계획의 차이를 누군가는 모를지 몰라도, 나는 알았다.
우리가 살기로 한 삶은 백지 위에 대충 쏟아 놓은 얼룩처럼 보이지 않는 삶, 거기선 아무도 우리가 진짜 가족인지 아닌지 판별하라고 검사실에 앉혀놓지 않는다.
아마 절교 또한 가족의 특권이었던 건지도 모르지. 가족은 서로 미워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절교한 직후에 죽는 건… 미친 걸까. (미친 것과 죽은 것 중 뭐가 더 나쁠까?)
아무리 그래도 좀… 선 넘은 거 아닌가? (자살한 사람을 가리켜 선을 넘었다고 표현하는 건 좀 마음에 걸린다.)
이건 무슨 저세상 매너인가? (이번에는 저세상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
집 안에서 혼자 빗방울, 색종이, 총알 같은 걸 내내 맞고 있는 동안, 나는 주로 그런 생각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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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길 페이지가 더 이상 없으니까. 잡다하게 엉킨 나쁨 또는 매우 나쁨을 계속 노려보며 이름을 알아내면 덜 나빠지기는 하나?
한참을 허우적거린 뒤에야 나는 고작 두 가지 감정을 가려낸다.
처음으로 찾아온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면, 다음에 찾아온 감정은 배신감이다. 물론 새로운 감정이 찾아온다고 해서 이미 있던 부끄러움이 자리를 내주고 물러가지는 않는다. 두 감정은 줄곧 나와 함께 있다.
부끄러움은 매우 나쁨, 배신감은 더더욱 나쁨에서 최악의 나쁜 사이에 있다고 나는 결론 내린다.
배신한 사람이 (저세상 매너로 나를 두고 떠난) 상대방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감정이 먼저 내게 이름을 붙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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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내 사이가 멀어지기 직전, 폴이 죽기 직전, 내가 받던 정신치료는 마침내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삶의 덫’1에서 마침내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는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하고 있는 일이 ‘간단히 말하면 머릿속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쓰레기라니,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성인기에 내가 경험한 친밀한 관계들, 내가 연루된 폭력이나 범죄,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나의 가장 끔찍한 악몽, 무엇보다도 왜 죽으려고 했는가 등등을 하염없이 쏟아내며 일 년을 지내다 보니, 삶의 덫—즉 자기파괴적이고, 고통스럽지만, 편안하기 때문에 안주하게 되는, 일생을 통해 반복되는 패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배신자로서의 내 삶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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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것이 배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리버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문득 큰 냉장고를 샀다. 돈을 조금 벌게 되어서 고물 냉장고를 버릴 수 있게 됐다. 그 냉장고를 좋아하는 존재는 오직 고양이뿐이었다. 건강한 올리버가 훌쩍 뛰어 올라가기 좋은 높이였고, 폭발 직전이었으니 늘 뜨거웠고(고양이가 깔고 앉기 딱 좋은 온도였고), 냉장고 위에 올라가면 나를 내려다보기도 좋았다.
새 냉장고는 올리버가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고양이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새 소파까지 샀다. 이 또한 고양이들에게는 큰 상처였다. 내가 그들이 한평생 발톱으로 긁어대서 난파선처럼 변한 헌 소파를 현관 밖으로 끌고 나가는 동안에도, 올리버는 소파에서 내려가지 않고 울어댔다.
나는 서운해졌다. 너는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걸 쓰는 게 싫어? 우리가 계속 누더기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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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료에 적극적이었고, 읽으라는 책들을 모조리 읽었고, 생각하라는 것들을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전부 성에를 한없이 긁어내야 하는 폭발 직전인 냉장고나 앉을 때 목제 프레임이 엉덩이를 찔러대는 소파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조리 집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내게는 더 좋은 것, 제대로 된 것이 필요하지 않나?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있지 않나? 예컨대 문짝에 얼음정수기가 달린 냉장고라든지, 시간과 돈이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티 없이 새하얀 소파 말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질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덫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는데 (각자) 죽으려고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의사는 이제 치료를 종결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길에 폴과 나는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다퉜다.
“넌 우리가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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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내가?
죽는 이야기를 눈덩이처럼 던지고 받으며, 이미 우리한텐 죽은 친구들이 너무 많은데, 애초에 우리가 왜 자꾸 죽는지를 설명하려면 변명이, 설명이, 누락이, 포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예 말을 말아버리며(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세계에서 사는 게, 그런데 그게 우리 탓은 아닌 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밀이 많은 게, 머릿속 쓰레기를 치우라는 게, 가진 게 죄다 누더기인 게, 그런데 도저히 같이 이 덫을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게,
너도 싫잖아.
그런데 왜 내가 괜찮아질수록 너는 더 우울해져?
너는 내 삶이 망했으면 좋겠어?
물론 정말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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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D와 내가 서로를 웃기는 방식에는 좀 괴상하고 어두운 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 집 거실에 앉아 셋이서 끝없이 벌이는 토론이 그랬다.
‘만약에 (또) 죽는다면 어떻게 죽는 것이 제일 나은가?’
모두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죽을 생각은 일단은 없었지만 (인지행동치료 따위를 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또한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다. 언젠가 닥칠지도 모르는 미지의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 우리는 땅콩집을 생각하는 것과 비견할 만큼의 공을 들여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건 아마 우리 셋의 머리를 모아 만든 가장 확실한 방법이거나, 아니면 재미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뭐가 됐건 당장 쓰려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정해 놓으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삶의 덫을 갓 박차고 나온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게 웃기지가 않았다.
*
내가 저지른 배신의 목록들. 올리버 없이 맞은 첫 봄에 토끼가 그려진 초록색 이불을 산 것. 올리버 몰래 이불을 사서 혼자 덮고 잠을 자고 깨어나서 다음 계절로 나아가려 든 것. 그밖에 올리버가 할 수 없어진 모든 일을 한 것.
괜찮게 살고 싶어진 것.
죽기 싫어진 것.
그런데 우리의 우정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먼저 빠져나가지 못하게 서로 붙잡는 토끼들의 모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그래서 나 혼자만이라도 박차고 나오고 싶어진 것. 냉장고에서 펑펑 나오는 얼음을 씹어먹으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제대로 된 세계로 살러 가려고 한 것. 나중에 다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되뇌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롭다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
이 중 어떤 게 가장 나쁜 배신일까?
아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몽땅.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 어떤 것이 가장 큰 상처를 남길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몽땅.
어떤 부분에 트리거 워닝을 표시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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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워닝]
폴이 유서에 D와 나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로 존중받지 못하고 잊힐 위험에 처하고 말았지만, 간신히 그런 불명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폴이 우리가 토론해 결정한 바로 그 방법을 선택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훗날 제정신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그 선택이 지닌 의미를 놓고 또다시 토론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농담을 기억한 친구의 다정하고 끔찍한 표식인지, 아니면 이 또한 저세상 매너인지, 그저 그것이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건지, 그 중 아무것도 아닌지.
그러나 답을 알려줄 사람은 우리한테 총을 쏜 뒤에 죽었고, 우리의 몸에는 아직 총알이 뚫고 나간 상처가 있다.
1 삶의 덫은 스키마 치료 전문가 제프리 E. 영의 책 Reinventing Your Life(1994)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내가 이 책을 소개받았을 때는 한국어판 번역서 『새로운 나를 여는 열쇠』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기에, 의사한테서 빌려 복사한 책과 영어 원서를 함께 읽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2020년 『삶의 덫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열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삶의 덫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열기
출판사 | 메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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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섬별
읽고 쓰고 옮긴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자주 시를 쓴다.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물루와 올리버라는 치즈 고양이의 식구다. 옮긴 책으로 <페이지보이>, <자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