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모든 이별의 심방(心房)마다 재회의 씨앗이 감춰져 있다고 믿었다. 헤어진 존재와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보면 그건 부모가 아이에게 대는 ‘나중에’란 핑계와 비슷하게 작용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지금은, 보내주어도 괜찮아. 놓아줘도 돼. 어린 나는 내 안의 더 어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 앞에 ‘꼭’이 붙으며 약속이 됐다. ‘꼭’이 ‘반드시’로 바뀌며 구속이 됐다. 헤어진 모든 존재를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나야만 했다. 하루하루 대비가 필요해졌다. 매일 더 나아지되 한편으로는 너무 많이 달라지면 안 되었다. 음식을 남기면 나중에 지옥에 가서 다 비벼 먹어야 한다는 농담을 들을 때 나는 그게 내가 지은 세계관의 미래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생각한 나의 결말인지도 몰랐다.
올해는 갑작스레 이별을 선고받는 일이 많은 해였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일도 있었고, 매주 만나 협업하던 이가 이 일을 그만하고 싶다며 만남을 중단한 일도 있었다. 하루 만에, 일주일 만에 태도가 바뀐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배탈이 나듯 주기적으로 자연스러웠다. ‘오늘부터’, ‘내일까지만’, ‘다음 주부터는’, ‘이번 주를 끝으로’……. 등의 말로 시작되던 돌연한 선언은 나를 화나게도 했고 슬프게도 했지만, 최근 비슷한 일을 다시 겪은 뒤 나는 오래 잠잤고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깨며 사뭇 낯선 감정을 느꼈다. 지루함이었다.
일찍이 헤르베르트 플뤼게는 심장병을 앓는 아동의 특수한 자기인식 상태를 설명하며 “지루함(ennui)”1이라는 표현을 세운 바 있다. 의사였던 그는 1944년 디프테리아 환자 병상 150여 개만으로 이뤄진 병원에서 일하며 12세 이하의 아동 환자 사망률이 특히 높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책 『아픔에 대하여』2에는 당시 플뤼게가 보고 겪은 일들과 전해들은 일화가 실려 있는데, 플뤼게는 거기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낸다. “12세 이하의 아동은 심장병을 앓으면서 심각한 위협이 나타나기까지 그 증상을 깨닫지 못하거나, 어쨌든 의식하지 못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한다.”“아픔을 느끼는 능력”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활발함”이 돌연사나 병의 악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3
심각한 박동 장애를 앓던 아홉 살 소녀의 사례. “소녀는 매일 아침 활달하게 일과를 시작한다. 명랑하고 생동적이어서 친구들과 즐겁게 잘 논다. 그러나 소녀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한 시간만 지나면 놀이를 함께 할 수 없다. 그럼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눕는다. 왜 놀이를 중단했느냐고 물어보면 소녀는 ‘지루해졌어’라고 말한다.”4
이때의 지루함을 플뤼게는 “전적으로 파스칼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앞장에서 그는 이미 파스칼의 『팡세』 속 ‘ennui’를 “겉으로 드러난 기분이 아니라, 뭔가 대단히 뿌리 깊은 성정”으로 해석하며, 파스칼이 “인간의 지루함은 대단히 빠르게 불행함으로 바뀌어 결국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음을 밝힌 바 있었다.5
2차 대전 시기에 독일 의사가 쓴 이 책이 애초에 내게 곱게 읽히지도 않았었지만, 지금 구체적인 고통에서 불안으로, 다시 불행을 거쳐 마침내 최초의 지루함으로 회귀한 내 마음은 확실히 퇴행했다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아픔을 느끼는 능력”의 더 넓은 “성숙”을 체감했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활발함”을 되찾는 일이었다.
산악인 남난희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자신의 집 마당에서 온갖 풀들이 쉼 없이 올라와 “혹시 흙이 모두 풀씨가 아닌가” 생각했다는데.6 어쩌면 유난히 비 잦던 올여름 내 심장 속 씨앗 창고가 무너지며 일평생 모아둔 재회의 씨앗들이 쏟아지고, 뒤엉키고, 쌓이고 쌓여 흙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마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새싹은 태어날 때 합장을 한다는 것”7을 나도 곧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신에게 비는 대신 혼자 바란다. 이 작별에서 고통 대신 지루함을 느낄 수 있기를. 진실을 말하자면, 혹은 그 반대를 말하자면, 지루함은 내가 겪을 감정보다는 당신이 느끼기를 바라는 감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있던 자리가 빈자리 된 뒤에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는 대신 목적어 없이 그저 주어로 지루해하면 좋겠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작별과 슬픔이 별개의 일임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다. 생의 좋은 길목에서 당신과 내가 잠시 우리로 함께였듯, 작별과 슬픔도 일로(一路)를 함께할 뿐이라는 것을. 주어와 목적어가 그렇듯이. 씨앗과 꽃이 그랬듯이.
<끝>
1 파스칼의 개념을 빌려 온 것이라 밝힌다.
2 헤르베르트 플뤼게 지음, 김희상 옮김, 『아픔에 대하여』, 돌베개, 2017.
3 같은 책, 252~254쪽.
4 같은 책 281쪽.
5 같은 책 19~20쪽
6 [남난희의 느린 산] 아낌없이 내어주는 집, 월간 산, 2024.05.30.
7 남난희, 같은 기사.
현호정(소설가)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