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코탄 블루와 니세코의 별 헤는 밤(上)
어느 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바다만 응시하는 때가 있었다. 아마도 각자가 가지고 온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던 순간이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글ㆍ사진 송인희
201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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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팔아 하는 놀이

 

몇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놀이가 있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추억 팔이’ 말이다. 그중에서도 대학 시절 기억을 불러 보면, 늘 노천극장이나 도서관 앞 광장이 떠오른다. 캠퍼스의 낭만과 객기 속엔 여대생 네 명이 종종 등장한다. 현재의 나와 그녀들은 다크서클과 팔자주름을 기어이 받아들이고야 말았지만, 그때는 바야흐로 싱그러웠다. 그리고 노천극장에서 자장면에 소주를 시켜먹던 공강 시간이 있었다. 도서관을 드나드는 남학생들을 흠모하느라 밤이 새는 줄 모르던 시험 기간도 있었다.

 

그녀들과 나는 졸업 후에도 만나며 추억을 벗삼아 수다를 떨었고, 마침내는 계를 하기에 이르렀다. 모임의 이름도 지었다. ‘아마곗돈’. 브루스 윌리스 아저씨가 소행성을 폭파했던 장면이 떠오르지만, 영화와는 별 관계 없다. ‘아마도 곗돈으로 뭐라도 할 수 있겠지’ 하는 소망을 담아 지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불어난 돈을 밤거리에 흥청망청 쏟아 부은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아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떠나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비틀거리는 유흥가보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저 그런 사정들로 돈을 모으는 일은 지금은 중단됐다. 어쨌든 아마곗돈의 최후를 별천지 분지마을에서의 사흘로 멋지게 장식했다. 기꺼이 홋카이도를 찾아와준 계원들을 이끌고 샤코탄과 니세코로 갔다. 그곳에서 시원한 여름휴가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홋카이도

 

샤코탄 블루의 절벽

 

삿포로에서 북서쪽에 있는 오타루를 지나면 바다가 펼쳐진다. 곧이어 나오는 서쪽 지역은 ‘샤코탄’이다. 이곳의 바다는 특유의 밝고 맑은 빛깔로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색을 ‘샤코탄 블루’라고 부른다. 서쪽 끝까지 가면 아찔하게 튀어나와 있는 기다란 절벽이 하나 있다. ‘카무이미사키’다. 낭군에게 버림받은 열녀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나무 울타리에 몸을 맡기고 삼십 분 정도를 걸어야 절벽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절벽의 비경은 아슬아슬한 산책길의 보상으로 충분했다. 샤코탄 블루를 머금은 바다와 웅장한 해안선을 바라 보며, 우리는 예쁜 척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바다만 응시하는 때가 있었다. 아마도 각자가 가지고 온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던 순간이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잠시 뒤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들을 떠밀어 보내고, 아이스크림이나 핥아 먹으며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렸다.

 

홋카이도

 

여름 제철 성게 덮밥 (우니동)

 

따다닥, 따닥. 성게 껍질 벗기는 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실은 주방 아주머니의 급한 마음만이 느껴질 뿐, 속도는 전혀 빠르지 않았다. 자칫 한눈을 팔거나 힘을 과하게 주면 뭉개져 버리기 때문에 음식은 느리게 나왔다. 빈 물잔 주둥아리만 만지작거리며 앉아있길 삼십 분, 심심풀이 대화도 엇나간 지 오래였다. 뱃속으로 무언가를 집어넣고 싶은 허기와 ‘얼마나 맛있는지 보자’는 오기가 여러 번 다녀갔다. 드디어 나온 황금빛 성게 덮밥(우니동)을 눈앞에 마주하니 뭉클하기까지 했다. 몽글몽글하고 신선한 샤코탄의 성게가 수북했다. 입안에 넣으니 크림처럼 녹아내려 감칠맛이 돌았다. 몸속으로 시퍼런 여름 바다가 스며들었다. 종일 입가에서 바다 내음이 가시질 않았다. 제철 재료 하나로 단순하게 만든 음식을 산지에서 맛보면, 자연과 내가 발맞춰 걷고 있는 느낌이 절로 드는 것이다.

 

홋카이도

 

밀크 공방 빵순이들

 

“전부 여기서 드시고 가는 건가요?” 라고 점원이 물었다.

“네.” 라고 대답했다.

 

우리 앞엔 두 종류의 슈크림 빵과 카스텔라 한 덩이, 또다시 두 종류의 푸딩과 아이스크림, 치즈 케이크 상자와 롤케이크 반 토막이 가지런히 놓였다. 니세코의 명소인 ‘밀크 공방’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만장일치를 보았다. 기꺼이 이곳의 빵을 모두 먹어 보기로 말이다. 빵 굽는 냄새는 인간의 식탐을 시험했고, 그것은 분명 지는 싸움이었다. 홋카이도의 들판에서 난 밀가루에 니세코의 목장에서 얻은 우유와 버터, 치즈와 크림이 잘 섞여 있었다. 미치도록 완벽한 비율이었다. 달콤하지만 너무 달지 않았고, 입에 넣으면 곧 사라져서 감질이 났다.

 

빵을 잔뜩 먹은 ‘빵순이’들은 공방 앞의 들판에서 민들레 홀씨를 불어대며 뛰어다녔다. 당분과 밀가루를 과하게 섭취했는지, 발바닥이 폴짝폴짝 잘도 올라갔다. 들꽃을 꺾어 귓등에 꽂고는 뻥 뚫린 초원을 만끽했다. 홋카이도의 후지 산으로 불리는 요테이 산이 정면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고, 뒤로는 안누푸리 산악이, 사방으론 물결 모양의 경사진 언덕이 둘러싸고 있었다. 한 바퀴 삥 둘러보고 나니, 청승맞게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마냥 신 나기만 한 상황이었던 지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전 읽은 에세이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할 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던 공간이,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질 거라는 어쩔 수 없는 예감 때문이란다.
(윤대녕,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다시 갈 길을 다시 재촉했던 건 첫날의 숙소가 산중턱 외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자연인이다!’ 라고 외치고 싶게 만드는 노천 온천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저녁 메뉴는 무려 60일 전에 예약해서 할인 혜택을 받은 가이세키 요리(일본식 연회 요리)였다.

 

* 아마곗돈 계원들의 니세코 여름휴가 이야기는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 카무이미사키

- ‘카무이’는 신(神)을, ‘미사키’는 곶을 뜻한다. 신령이 깃든 곳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 오타루에서 카무이미사키까지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이 구간에 특별한 관광지는 없지만 샤코탄 블루가 만들어내는 해안가의 절경이 이어진다.

 

* 샤코탄 성게 덮밥(우니동)


- 여름철(6월~8월)의 샤코탄엔 성게가 제철이다. 넓게 펼친 밥 위에 신선한 성게알을 듬뿍 올린 우니동은 비리지 않으며, 부드럽고 고소하다. 해안 도로와 마을 곳곳에 우니동을 하는 식당이 여럿 있으니 골라 들어가면 된다.

 

* 니세코 밀크 공방


- 니세코 지역 목장에서 얻은 신선한 우유와 유제품, 갓 구운 빵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ㅇ 홈페이지: http://www.milk-kobo.com/
ㅇ 주소: 北海道?田郡ニセコ町?我888-1
ㅇ 영업시간: 오전 9시 30분 ~ 오후 6시 (동절기 5시 30분)



[관련 기사]

- 홋카이도 남동부 해안도로 1박 2일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오페라 하우스
- 홋카이도 함박조개를 넣은 카레와 무로란 8경
- 스위스 파노라마
- 홋카이도에서 지진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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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