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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지진을 만났을 때

이곳은 지금 축제의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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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여행하지 못했습니다. 이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글을 쓸 뿐입니다.

나의 삶이 어디까지 이를지 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폭풍 속을 거닐고 있는가. 물결이 되어 연못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이른 봄 추위에 얼어붙은 창백한 자작나무일 뿐인가?

 

 -릴케 「나의 삶」

 

홋카이도

 

견딜 수 없이 잘 돌아가는 세상

 

이 칼럼의 토대는 여행이다. 동시에 한 여자의 수다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콤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 쓸 여력이 없었다. 하여 솔직해지기로 했다. 머릿속에 터질 것 같은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했다. 여행 정보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했을 분들에겐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이번 화에선 갑자기 지진을 맞닥뜨린 한 인간의 마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는 말아달라. 지금은 너무 버거우니까.

 

홋카이도에 겨울이 떠난 자리를 채우는 건 ‘축제(마츠리)’다. 연예인 초청 공연이나 잡상인이 아니라 실제로 동네 사람들이 몇 달씩 준비해서 참여한다. 어딜 가든 춤을 추고, 풍악을 울리고, 맥주를 마시며 구경한다. 그중에서도 ‘요사코이 소란’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옛사람들이 부르던 뱃노래가 기원인데, 수십 수백 명이 뭉쳐서 힘차게 춤을 추고 노래했다. 모두 일반인이었지만, 공연은 뮤지컬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 박력 넘쳤다. ‘삿포로 마츠리’ 때에는 시내 곳곳에서 전통 의상과 악기를 둘러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축제를 채우는 건 단연 함성과 열기였다. 나는 그 속에서 무척 외로웠고, 메말라 있었다. 손뼉을 치면서 시선은 허공에 고정돼 있었다. 어느 날엔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왔다. 실컷 울어 버리라고 하늘이 보내준 시간 같았다. 거리는 축제를 구경하는 사람들과 행인들이 받친 우산으로 금세 혼잡해졌다. 면으로 된 옷이 흠뻑 젖었고 아이라인이 검게 번졌지만, 결국 울지 못했다. 세상은 견딜 수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여진이 다가온다고 말했던 나였다. 삿포로의 여름은 예감이 좋다고 분명 그렇게 썼다. 내가 틀렸다. 인생의 반전은 절대 여진으로 오지 않는다. 고요한 평온을 즐기던 중에 거대한 쓰나미가 오는 것이다. 눈앞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고 기둥이 송두리째 뽑히는 것이다. 그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다. 오로지 자신, 내가 살아남는 일뿐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무엇이 최선이자 최고인지 모른다. 당장 눈앞의 삶이 갈라지고 무너졌다.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려 기도한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온몸의 핏기가 일순간에 빠져나간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눈앞의 길이 무참하게 엉클어지고 있다. 돌이켜보니 불길한 기운이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모르는 척 했던 게 이제 와 후회스럽다. 내 삶은 평탄하다는 자만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홋카이도

 

세상 모든 게 나에게 건네는 말

 

차가운 밤 공기가 뺨을 때렸다. 반쯤 눈을 감은 달이 구름 뒤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두 날개가 겹쳐진 채로 짓밟힌 하얀 나비를 보았다. 무참히 짓밟혀있었다. 가여운 녀석에 나를 투영해 봤다. 닮았다. 녹음이 한창인 나무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은 곧 벌거벗을 거라고 했다. 열매도, 나뭇잎도 다 떨어뜨릴 거라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왔다. 비 부딪히는 소리는 맹렬했다. 흠뻑 젖은 세상 속에서 뻐금대며 겨우 숨을 쉬었다. 온 세상이 내가 믿었던 모든 것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만이 그 예언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믿음의 찌꺼기가 들러붙어 있었다. 오래된 시간과 추억이 눅진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내게도 순서가 다가왔다. 배반과 믿음의 줄타기에서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 결국, 내가 버틸 힘은 지독함뿐인가. 내 속에 돌덩이가 하나 굴러 들어와 앉았다.

 

돌이켜보면 다 스스로 한 선택이다. 오로지 내 의지로 누군가를 만나고, 회사를 그만두고, 신나게 놀고, 원 없이 돌아다녔다. 선택의 순간에 내가 했던 말이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가 전했던 이야기, 별것 아니게 보이는 인연을 지금 와서야 붙잡고 싶다. 선택지에 매겼던 번호를 고쳐 쓰고 싶다.


식상한 결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

 

홋카이도

 

위로는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아래로는 남몰래 얕보는 나쁜 습관을 가지기도 했다. 입버릇처럼 ‘나는 너무 평범해.’라고 말하곤 했다. 감히 삶을 농담조로 비아냥댔기에 벌 받는 건지도 모른다. 이 지진엔 분명 진원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 만물이 돌고 돈다는 이치가 옳다면, 내 안에 틀어박힌 돌덩이도 빠져나갈 날이 오긴 올 거다. 진심을 왜곡하고 낭비한 사람도 훗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거라 믿는다. 살아남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지를 머리 숙여 고민하면 알게 될 거란 결론에 이른다.

 

오늘은 글로 수다를 떨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진심에 관해 횡설수설했다. 나를 찾겠다는 결의로 결말을 내는 것도 식상하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어려운 마음속 이야기가 지면을 낭비한 게 아니길 빈다. 여러 가지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이번 글을 마친다.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홋카이도 여행엔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다. 이 지진이 멈추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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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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