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학원에 학생이 아닌 직원으로 다닐 무렵, 서른네 살의 삶은 너무 무료했습니다. 일본에서 요리를 배워왔는데 나는 어느 정도의 셰프가 될 수 있는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마스터셰프 코리아>가 아니라, 그보다 2년 전 일본의 어느 요리대회에 출전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어느 요리사단체에서 주최하는 것이라 일본인들만 지원을 하는 대회였습니다. 제한된 시간에 요리를 완성해서 그 자리에서 심사를 받는 일종의 ‘요리 백일장’인데요. 저는 후쿠오카 지역예선에 참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후쿠오카 항공권이 제일 쌌기 때문이지요. 그해의 주제는 시금치, 무, 도미를 이용해 요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선은 그 요리를 각자 집에서 만들어 사진을 찍은 다음 서류와 함께 보내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1차 심사는 통과. 참가 통보를 받고 나서는 잠깐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교통비, 숙식비만 백만 원이 들 텐데, 지역예선을 거쳐 교토에서 개최되는 결선에서 1등을 해야 상금이 천만 원인데... 그래도 결국 후쿠오카로 갔습니다.
대회 날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제가 최초라고 다들 신기해하면서 후쿠오카 지역방송에서 인터뷰도 했습니다. 재료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조건은 하나, 세 시간 동안 3코스 4인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요리는 도미맑은국, 오리고기와 시금치무침, 두부와 채소조림, 제가 할 수 있는 요리 중 최고의 난이도로 골랐습니다. 도미맑은국, 오리고기와 시금치무침은 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문제는 두부와 채소조림이었습니다.
레시피는 이랬습니다. 우엉을 삶아서 맛을 들인 다음, 바늘로 파내서 빨대처럼 만듭니다. (그냥 예쁘게 보이려고요.) 그리고 두부의 물기를 빼고 나서 마를 넣고 절구에 갈아 (그냥 부드럽게 하려고요.) 페이스트 상태로 만든 뒤 간을 합니다. 거기에 속을 파낸 우엉과 새우살을 넣고 김발에 말아 찜통에 찌면 우엉의 모양이 살아 있는 둥그런 두부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만 50분이 넘었습니다. 특히 두부를 절구에 가는 데 시간이 참 많이 걸렸습니다.
결과는 타임오버. 담다가 끝났습니다. 제출은 했지만 실격이 됐습니다. 백만 원을 쓰고 실격이 되어서 온 겁니다. 한국에서 연습할 때는 됐는데, 두부는 대회 주제도 아니었는데, 그놈의 두부를... 그놈의 절구에만 안 갈았어도... 그날 밤, 창피하고 속상해서 술을 엄청 먹었습니다. 주변에도 그냥 떨어졌다고만 얘기했지, 실격당했다는 사실은 차마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주최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습니다. 다시 도전해보라고요. 그 연락을 받은 게 하필 <마스터셰프 코리아> 결승 당일이었습니다. “저기, 제가 지금 거기에 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두부는 저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교훈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대회가 계기가 돼서 두부를 좀더 공부해보게 됐습니다. 두부는 맛도 담백하고 다루기도 쉬워서 다른 재료들과도 두루두루 어울려 응용하기도 편합니다. 그러고 보면 성격이 좋은 재료 같습니다만, 사실 금방 쉬기 때문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예민한 재료이기도 합니다. 식당에서 일할 때 여름에 더운 주방에 두부를 꺼내놓고 잠시 다른 요리를 했는데, 그동안에도 쉬더군요.
두부의 색다른 식감을 원하시면, 한번 얼려보세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친 다음 물기만 빼고 그대로 얼리는 겁니다. 얼어 있는 상태로 쓰는 게 아니라 완전히 언 것을 그대로 녹이면 표면도 거칠거칠한 스펀지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스펀지두부라고 부르는데요. 이 두부를 잘라서 튀기거나 조림을 해도 새로운 맛이 되지만, 입자가 거칠어져서 국물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저는 국물요리에 넣는 걸 좋아합니다. 한입 베어물면 입안에서 국물이 쫙 퍼지거든요. 작게 썰면 모든 국에 넣어도 되는데, 특히 육개장이나 우동 국물에 넣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제가 즐겨 만드는 두부 요리를 두 개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것들도 두부의 색다른 식감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두부덮밥
제가 좋아하는 건 부드러운 식감의 연두부입니다. 여름에 이자카야에 가면 연두부 위에 생강이나 젓갈 등 토핑을 다양하게 올린 ‘히야얏코’란 요리를 시키시는 분 많을 겁니다. 제가 식당에서 일할 때 한 끼 식사로 후루룩 만들어 먹었던 것도 바로 이 연두부로 만든 두부덮밥입니다. 그래서인지 저한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맛입니다.
가쓰오부시육수 700ml에 진간장 100ml, 청주 100ml, 맛술 100ml, 흑설탕 50ml를 섞어 조림장을 끓입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천천히 졸여서 맛을 진하게 만듭니다. 연두부는 물기를 따라내고 조심스레 2등분해서 평평한 접시에 올립니다. 그리고 끓고 있는 조림장에 미끄러뜨리듯 두부를 흘려넣습니다. (그렇게 넣지 않으면 연두부가 워낙 부드러워서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약불에서 20분 끓여서 맛과 색을 들입니다. 뜨거운 밥 위에 먼저 조림장을 적당히 뿌려준 다음 조린 두부를 올립니다. 쪽파도 올리면 좋겠지요. 저는 처음에는 밥과 두부를 함께 먹다가 반 정도 먹고 나면 국물을 부어 휘휘 저은 다음 후루룩 먹곤 합니다.
왠지 푸짐하고 넉넉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 식사입니다. 메밀차로 밥을 짓거나 쌀 대신 압맥 보리로 밥을 지으면 더 건강한 맛이 나겠지요. 물론 술 먹고 입가심으로도 좋겠다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일반 두부로 해도 상관은 없는데, 좀 퍽퍽해집니다. 입맛 없을 때, 이것저것 차려먹기 귀찮을 때 해먹기 좋습니다. 이 조림장이 남으면 반숙달걀을 하루 정도 담가두세요. 달걀장조림이 됩니다.
포도두부무침
두부로 무침을 하려면 두부의 물기를 빼는 법이 중요한데, 두부를 깨끗한 행주에 싼 다음에 깨끗한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 두부 위에 다시 도마를 올려놓은 다음 1시간 이상 그대로 둡니다. 도마가 없으면 프라이팬도 좋습니다. 이렇게 확실히 물기를 빼내지 않으면 무침옷이 묽어집니다.
그렇게 물기를 빼낸 두부 150g을 체에 내리고 설탕 1큰술, 참깨페이스트 1큰술, 생크림 1/2큰술, 소금 2g을 넣고 고루 섞습니다. 그리고 껍질째 먹는 씨 없는 포도(머스캣)을 씻고 물기를 닦은 뒤 두부에 넣고 무쳐줍니다. 그릇에 소복하게 담으면 완성.
식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손님에게 조금씩 내도 좋겠고, 포도 대신 당도가 높은 딸기나 무화과를 넣거나, 생크림 대신 크림치즈나 마스카르포네 치즈를 넣으면 디저트로도, 와인이나 청주의 안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관련 기사]
- 달걀이 변하는 시간, 3-6-9-12
최강록/(그림)권재준
일본요리 전공. 한때 조림요정이라 불리던 <마스터셰프 코리아 2> 우승자. 지금은 은둔형 맛덕후. 집에 틀어박혀서 맛을 실험해보기를 좋아함. <최강록의 맛 공작소>에서는 부엌을 구석구석 뒤져볼 예정.
정원선
2014.07.22
남궁건
2014.05.27
저는 지난주에 처음으로 요리 대회 나갔었는데 긴장해서 실수도 엄청 많이 하고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만들긴 했지만 저희 요리가 요새 스타일에 안어울리는거라 상 못타나 했는데 은상을 받아서 기분이 너무 좋더라구요. 내년 마쉐코에는 꼭 도전해서 최강록님의 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ㅎㅎ
쿤
20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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