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된 김한민 작가의 칼럼 ‘감수성 전쟁’을 애독했다. 현대인들의 처절한 삶을 한 장의 그림, 넉 줄의 글로 비판한 칼럼은 재밌으면서도 상시 마음이 찔렸다. 2013년 6월 7일자에 실린 ‘셀카 시대’라는 글을 보자. “사람들은 더 이상 아름다운 대상에 매료되지 않는다. 그 대상에 매료된 자신에게 매료된다. 셀카를 찍고 ‘자뻑’하고, 찍었다 하면 에스엔에스(SNS)에 올릴 생각부터 한다. 자기 중계에의 중독, 나르시시즘의 보편화, 전국민의 연예인화. ‘자기’계발(self help)과 셀(self)카… 모두 나, 나, 나뿐이다.” 한동안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셀카 사진 열풍에 멀미를 하고 있던 터라(사실, 현재도 진행 중), 기사에 ‘좋아요’를 눌렀던 기억이다.
최근, 다시금 셀카 사진에 멀미 증상이 심해져 페이스북에 넋두리를 했다. “셀카를 밥 먹듯, 찍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 나르시시즘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다”라고. 뚜렷한 대상이 없는 글은 아니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를 가장 멀미 나게 만드는 아저씨 페친께서 냉큼 ‘좋아요’를 눌러주셨다. “멋있게라도 찍으시면 또 모르지, 왜 자신의 근황을 실시간으로 셀카에 담을까? 제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나 좀 올리시지”라고, 댓글을 달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버렸다.
2012년에 출간된 『카페 림보』를 다시 꺼내 읽은 건, 며칠 전 받은 한 페친의 쪽지 때문이다. 오래 전 내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카페 림보』에 나온 ‘바퀴족 식별법’을 보았다며, 대뜸 자신을 “바퀴족이라고 생각하냐?”고 다소 황당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다. 스스로를 바퀴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바퀴족이 아닐 수 있다고 저자는 말했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착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바퀴족 문제는 다르다. 바퀴족이 도대체 뭐냐고? 김한민이 말하는 ‘바퀴족’ 식별법을 곰곰이 살펴보자.
바퀴족 식별법(1) 행동생태 구분
1. 예능 프로나 드라마 중독(중독의 기준: 자발적으로 10분 이상 시청이 가능할 시)
2. 나이, 결혼 여부, 출신지, 출신학교 등의 정보를 대뜸 물어보는 케이스
3. 소음을 발생시키거나 소음에 둔감
4. 흥행작과 베스트셀러를 꼬박꼬박 챙겨 봄
5. 악을 쓰며 우는 자기 애를 사랑스럽게 보고만 있음
6. 대화 시 성별로 유형화된 화제만 골라 입에 올림
(남자: 정치/자동차/골프/스포츠/최신기기. 여자: 명품/먹꺼리/연예계/가십)
7. 자신의 블로그에 다녀온 카페의 커피잔 사진을 스스럼없이 올림
8. 젊을 때는 진보 성향 / 늙으면 보수 성향
(본인 스스로는 균형 잡힌 중립이라고 여길 경우, 더 의심할 필요가 있음)
9. 유행 상품(기기, 옷가지, 미용, 패션)을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소지하고 다님
10. 명절이나 기념일에 단체 문자 발송
11. 자기 아이 사진을 3장 이상 보여주거나, 자식 얘기를 3분 이상 할 경우
12. 회사 관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계속 다님
13. 특종 종교의 방언을 타 종교인에게 당연한 듯 사용
14. 5분 이상 줄 서서 음식을 먹음
15. 오전부터 신파 음악 청취
『카페 림보』는 바퀴족이 되기를 거부하는 집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의 임시 명칭 ‘림보족’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노블이다. 바퀴족이 점령한 82국에서 멸종 위기에 내몰린 림보족은 바퀴족과 싸우기 위해 잠정적으로 ‘잠시정부’를 결성한다. ‘림보(Limbo)’는 중세시대 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머문 곳,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한 영혼들이 가는 곳을 뜻한다. 림보족은 34세가 되면 죽는 운명을 막기 위해, 참된 자신을 비춰줄 거울을 찾아 나선다. 과연 그들은 성공할까?
다시, 페친의 쪽지로 돌아간다. 페친은 “난 15개의 리스트 중에 3개만 해당되는데, 바퀴족이 맞냐”고 채근했다. 나는 “3개? 적어도 5개는 맞는 것 같은데”라고 썼다가, “글쎄~”라는 대답으로 면피했다.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요즘, 내가 깊이 깨닫는 게 ‘누구에게도 진짜 솔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인데 ‘내가 무슨 덕을 쌓겠다고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까?’ 자문했다. 솔직하게 답하지 않은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15개 리스트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명백히 내가 해당되는 건, ‘5분 이상 줄 서서 음식을 먹는’ 일. 앞으로 두려운 건, 11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바퀴족으로 살면 안 된다는 거냐?고 태클을 걸 것이다. 『카페 림보』에 나오는 바퀴족 FAQ를 참고하자.
Q. 바퀴족으로 살면 행복한가요? 바퀴족도 나름의 고민이 많다던데.
A. 바퀴족은 고민도 상품화/유형화된다. 좀 힘들면 울보가 되고, 좀 형편이 풀리면 금세 안주하는 패턴. (예컨대 거창한 고민을 늘어놓다가도 잘난 이성 친구가 생긴 순간, 만사형통이라는 식.) 평생 고민이 단 한 치도 깊어지지 않은 채, 수면 언저리에서 뻐금거리는 식. 즉, 고민은 인생의 양념이기에 그들은 행복하다.
Q. 바퀴족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던데, 어떤가요?
A. 바퀴족의 단기적 사고 패턴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자식조차 사랑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 가령 (자손들이 살아갈) 지구가 급속도로 망가지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넋 놓고 TV만 보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자식 없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듯하고, 바퀴족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자식을 낳은 후, 육아 양성을 통해 포괄적 대리만족 또는 본능이행 욕구를 해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페 림보』는 불쾌한 책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등장해, 마음을 괴롭힌다. 바퀴 같은 모습이 좋으면? 그래, 그렇게 살면 된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 규정된 틀 속에서 어긋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스스로를 대면할 때, 후회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나는 바퀴족을 혐오하거나 바퀴족 인생을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적령기’가 사라진 시대라지만, 여전히 ‘적령기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림보의 행동 강령을 전한다. “나인 것이 되어라(Become what I am).”, “나는 ‘곧 죽어도 내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림보족이 선포한 전쟁은 ‘그냥 있을’ 자유를 위한 전쟁이자 자신이 느끼는 대로 느끼려는, 좋아하는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싫어할 수 있는 감수성 독립 전쟁이다.
덧, 『카페 림보』 에 나오는 글귀 하나를 마음에 담자. 명언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
- 카페림보 김한민 글,그림 | workroom(워크룸프레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기존의 고정된 틀을 깨는 다채로운 실험을 보여준 김한민. 그가 이번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만화는 괜스레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으며, 실없이 웃지도 않는다. 흑과 백으로 이뤄진 강렬한 그림만큼이나 뚜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이끌어가는 시적인 내러티브와 시각적 상상력은 김한민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감수성을 드러낸다. 정색을 하고,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도 그 안에 숨어있는 작가의 소통에 대한 갈망은 읽는 이의 마음 속에 번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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