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의 새로운 조류, 피펑크(P. Funk)의 탄생! - 펑카델릭
팝 역사에 있어 펑카델릭의 등장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절묘하게 결합한 P-funk는 당대 음악 세계의 저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난 아티스트들에게도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 에디 헤이젤이 뽑아내는 기타 연주는 록 팬들을 만족시키기 충분했으며 나중에 더욱 댄서블 해지는 밴드의 리듬 진행 방식은 1970년대에 성행했던 디스코 음악의 원류로도 평가받는다.
201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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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Funk)음악이라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시나요. 아프로 펌 헤어스타일을 하고 몸을 흔들며 기타를 치는 흑인 기타리스트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흥에 겨운 몸짓으로 드럼을 치는 드러머의 역동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여기, 펑크의 그런 이미지를 알리는 데 기여한 그룹이 있습니다. 이 주의 명반, 피펑크(P-Funk)의 태동을 알린 펑카델릭의 데뷔작, < Funkadelic >입니다.
펑카델릭(Funkadelic) < Funkadelic > (1970)
1960년대 말은 팝의 황금기가 움트기 시작한 때였다. 영미권 전역에 퍼졌던 사이키델리아의 잔향은 여전히 화려했고 하드 록의 맹렬함이 기지개를 막 켜고 있었다. 록에 클래식을 대입했던 프로그레시브 주자 킹 크림슨(King Crimson)이나 예스(Yes) 등이 곧 이어 등장했으며 ‘소울의 대부’이자 ‘펑크(funk)의 선구자’인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레코드 회사 모타운이 이끄는 흑인 음악 진영은 활발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어떤 음악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수많은 밴드들이 앞다퉈 등장했기에 대중음악 판도에는 매일같이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명작이라 손꼽힐 음반들이 쏟아져 나왔고 명연이라 회자될 공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늘날 전설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당대의 시류에 과감히 뛰어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펑크(funk)의 저변을 넓혔다고 평가받는 펑카델릭(Funkadelic) 또한 이러한 아티스트들 중 하나였다.
펑카델릭(Funkadelic) [출처: 위키피디아]
두왑(doo-wop) 그룹 팔리아멘츠(The Parliaments)를 이끌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은 백 밴드 세션들의 군 입대로 생긴 빈자리에 새로운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훗날 「Maggot brain」에서 엄청난 기타 연주를 들려줄 에디 헤이젤(Eddie Hazel)과 베이시스트 빌리 넬슨(Billy "Bass" Nelson)이 공석을 메웠으며 이윽고 또 다른 기타리스트 루시우스 로스(Lucius "Tawl" Ross)와 드러머 라몬 펄우드(Ramon "Tiki“ Fulwood)가 추가 영입으로 힘을 보탰다.
재정비를 마치고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에 반기를 든 것은 음반사 레빌롯 레코드(Revilot Records)이었다. 빌보드 차트 3위의 히트 싱글 「(I wanna) Testify」를 제작했던 음반사는 재계약을 거부한 조지 클린턴에게 그룹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밴드는 더 이상 팔리아멘츠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심술궂은(?) 전 소속사의 결정은 옆에 제쳐둔 채 이들은 새 명칭을 구상해야 했다.
펑카델릭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은 빌리 넬슨이었다. 펑크(funk)와 사이키델릭(psychedelic)을 결합한 이 단어에는 「Good old music」 등으로 전부터 보여주었던 음악적 관심사와 환각제 LSD을 통해 흥미를 가졌던 문화적 관심사가 모두 담겨있었다. 그룹의 특성을 드러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했다.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이들은 곧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레이블 웨스트바운드(Westbound)와 계약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0년 첫 선을 보인 것이 바로 이 셀프 타이틀 앨범 < Funkadelic >이다. ‘당신이 내 영혼을 빨아들인다면 난 당신의 펑키한 감정을 핥겠다’는 괴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조지 클린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음반에는 펑카델릭이 지향하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식(Sly And The Family Stone)의 펑크 사운드와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식의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가 모두 담겨있었다.
첫 곡 「Mommy what's a funkadelic」에서 조지 클린턴과 백 보컬의 합창 너머로 들리는 오르간과 와와(wah-wah) 기타의 구성은 밴드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적잖이 드러냈으며 팔리아멘츠 시절에 보여주었던 펑크 넘버 「Good old music」은 펑카델릭의 메소드가 덧입혀지며 8분이 넘는 싱글로 재탄생되었다. 특히 그루비한 베이스 리듬 위로 기타와 키보드, 보컬이 시종일관 교차하는 「I bet you」는 이들의 P-funk(Parliament-Funkadelic 또는 Pure funk) 스타일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트랙이었다.
펑카델릭 멤버들 외에도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작품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I got a thing, you got a thing, everybody's got a thing」에는 밴드의 두 번째 앨범부터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명 키보디스트 버니 워렐(Bernie Worrell)과 모타운의 레코드 세션 펑크 브라더스(The Funk Brothers) 출신인 백인 기타리스트 레이 모넷이 가세한 트랙으로, 둘이 빚어낸 오르간 사운드와 기타 솔로의 조합은 앨범에서 가장 환상적인 곡을 주조하는데 성공했다.
팝 역사에 있어 펑카델릭의 등장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절묘하게 결합한 P-funk는 당대 음악 세계의 저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난 아티스트들에게도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 에디 헤이젤이 뽑아내는 기타 연주는 록 팬들을 만족시키기 충분했으며 나중에 더욱 댄서블 해지는 밴드의 리듬 진행 방식은 1970년대에 성행했던 디스코 음악의 원류로도 평가받는다. 또한 투팍(2pac)의 「Young black male」이나 D.O.C.(The D.O.C.)의 히트 싱글 「The D.O.C. & the doctor」의 샘플링 소재로 쓰였던 「Good old music」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의 음악은 1990년대 힙합 뮤지션들에게도 여파를 남겼다.
펑카델릭의 리더 조지 클린턴은 이후 밴드의 음악 세계를 더욱 넓힌다. 동일한 멤버로 구성한 쌍둥이 밴드 팔리아멘트(Parliament)를 조직하며 펑카델릭과는 다른 우주적 색채의 펑크 음악을 구현했고, 더 나아가 여러 프로젝트 밴드들을 배출하는 P-funk 사단을 구축하며 팝 신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임팩트의 시작은 1970년의 첫 앨범 < Funkadelic >에 있었다.
펑카델릭(Funkadelic) < Funkadelic > (1970)
1960년대 말은 팝의 황금기가 움트기 시작한 때였다. 영미권 전역에 퍼졌던 사이키델리아의 잔향은 여전히 화려했고 하드 록의 맹렬함이 기지개를 막 켜고 있었다. 록에 클래식을 대입했던 프로그레시브 주자 킹 크림슨(King Crimson)이나 예스(Yes) 등이 곧 이어 등장했으며 ‘소울의 대부’이자 ‘펑크(funk)의 선구자’인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레코드 회사 모타운이 이끄는 흑인 음악 진영은 활발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어떤 음악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수많은 밴드들이 앞다퉈 등장했기에 대중음악 판도에는 매일같이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명작이라 손꼽힐 음반들이 쏟아져 나왔고 명연이라 회자될 공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늘날 전설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당대의 시류에 과감히 뛰어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펑크(funk)의 저변을 넓혔다고 평가받는 펑카델릭(Funkadelic) 또한 이러한 아티스트들 중 하나였다.
펑카델릭(Funkadelic) [출처: 위키피디아]
두왑(doo-wop) 그룹 팔리아멘츠(The Parliaments)를 이끌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은 백 밴드 세션들의 군 입대로 생긴 빈자리에 새로운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훗날 「Maggot brain」에서 엄청난 기타 연주를 들려줄 에디 헤이젤(Eddie Hazel)과 베이시스트 빌리 넬슨(Billy "Bass" Nelson)이 공석을 메웠으며 이윽고 또 다른 기타리스트 루시우스 로스(Lucius "Tawl" Ross)와 드러머 라몬 펄우드(Ramon "Tiki“ Fulwood)가 추가 영입으로 힘을 보탰다.
재정비를 마치고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에 반기를 든 것은 음반사 레빌롯 레코드(Revilot Records)이었다. 빌보드 차트 3위의 히트 싱글 「(I wanna) Testify」를 제작했던 음반사는 재계약을 거부한 조지 클린턴에게 그룹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밴드는 더 이상 팔리아멘츠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심술궂은(?) 전 소속사의 결정은 옆에 제쳐둔 채 이들은 새 명칭을 구상해야 했다.
펑카델릭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은 빌리 넬슨이었다. 펑크(funk)와 사이키델릭(psychedelic)을 결합한 이 단어에는 「Good old music」 등으로 전부터 보여주었던 음악적 관심사와 환각제 LSD을 통해 흥미를 가졌던 문화적 관심사가 모두 담겨있었다. 그룹의 특성을 드러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했다.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이들은 곧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레이블 웨스트바운드(Westbound)와 계약했다.
첫 곡 「Mommy what's a funkadelic」에서 조지 클린턴과 백 보컬의 합창 너머로 들리는 오르간과 와와(wah-wah) 기타의 구성은 밴드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적잖이 드러냈으며 팔리아멘츠 시절에 보여주었던 펑크 넘버 「Good old music」은 펑카델릭의 메소드가 덧입혀지며 8분이 넘는 싱글로 재탄생되었다. 특히 그루비한 베이스 리듬 위로 기타와 키보드, 보컬이 시종일관 교차하는 「I bet you」는 이들의 P-funk(Parliament-Funkadelic 또는 Pure funk) 스타일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트랙이었다.
펑카델릭 멤버들 외에도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작품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I got a thing, you got a thing, everybody's got a thing」에는 밴드의 두 번째 앨범부터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명 키보디스트 버니 워렐(Bernie Worrell)과 모타운의 레코드 세션 펑크 브라더스(The Funk Brothers) 출신인 백인 기타리스트 레이 모넷이 가세한 트랙으로, 둘이 빚어낸 오르간 사운드와 기타 솔로의 조합은 앨범에서 가장 환상적인 곡을 주조하는데 성공했다.
팝 역사에 있어 펑카델릭의 등장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절묘하게 결합한 P-funk는 당대 음악 세계의 저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난 아티스트들에게도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 에디 헤이젤이 뽑아내는 기타 연주는 록 팬들을 만족시키기 충분했으며 나중에 더욱 댄서블 해지는 밴드의 리듬 진행 방식은 1970년대에 성행했던 디스코 음악의 원류로도 평가받는다. 또한 투팍(2pac)의 「Young black male」이나 D.O.C.(The D.O.C.)의 히트 싱글 「The D.O.C. & the doctor」의 샘플링 소재로 쓰였던 「Good old music」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의 음악은 1990년대 힙합 뮤지션들에게도 여파를 남겼다.
펑카델릭의 리더 조지 클린턴은 이후 밴드의 음악 세계를 더욱 넓힌다. 동일한 멤버로 구성한 쌍둥이 밴드 팔리아멘트(Parliament)를 조직하며 펑카델릭과는 다른 우주적 색채의 펑크 음악을 구현했고, 더 나아가 여러 프로젝트 밴드들을 배출하는 P-funk 사단을 구축하며 팝 신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임팩트의 시작은 1970년의 첫 앨범 < Funkadelic >에 있었다.
글/ 이수호 (howard19@naver.co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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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