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인과 수지 중에 누가 더 예쁘냐고요? 이런 질문 말고요.
영화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과 ‘서연의 집’ 건축가 구승회가 지난 1월 7일, 서울 동교동 상상마당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 출간기념 ‘향긋한 북살롱’이 열린 시간. 책을 통해 다시 만난 <건축학개론>과 영화의 공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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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관객 410만 명을 동원한 영화 <건축학개론>. 첫사랑의 기억과 아련함을 끄집어낸 덕분에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누군가에겐, 특히 어떤 남자들에겐 ‘첫사랑개론’과도 같았던 영화였다. 1990년대의 감성을 길어 올렸다는 점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은 불을 부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건축 혹은 공간이었다. 기억을 품은 공간이 불러오는 감성이 관객들의 심성을 건드렸다. 정릉의 골목, 한옥, 계단, 서연의 집 등 공간은 사람과 사랑을 싣고 있었다. 건축가 출신의 감독(이용주)와 그의 건축가 친구(구승회 ㈜크래프트 대표)가 스태프들과 함께 만들어낸 공간이자 작품이었다.
우리도 납득이와 승민이처럼 편의점 앞에서 늘 만났다
각각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이용주, 이하 주) : 지금 다른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피폐한 상태다.
(구승회, 이하 회) : 영화를 찍느라고 만든 서연의 집은 세트였고, 항간에는 태풍 때문에 무너졌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태풍 때문이 아니다. 미디어가 과장했다. 세트여서 스스로 무너졌고. 원래도 영화가 끝나고 이 집을 헐고 카페로 가자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갤러리카페가 2월 말~3월 초 오픈 예정이다. 영화 속 모습과 약간 다른데, 제주도에 가면 볼 수 있다. 영화가 대박 나서 나도 바빠졌을 거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책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있었고, 한가하게 지내고 있다.
두 분, 대학동기로 알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회) : 20년 좀 넘었다. 이 감독이 나보다 1살 많다. 같은 중학교를 나왔는데, 대학 다닐 때는 그걸 몰랐고, 말을 깠다(웃음).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오래 지내는 거 보니 친하긴 친하다.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고 책까지 대박나면 더 고마운 친구가 될 거고(웃음).
(주) : 건축 일을 하다가 구 소장이 미국에 유학가고 나는 영화로 갔다. 이후 구 소장이 돌아왔고, 내가 입봉을 준비하면서 금치산자 수준으로 살 때, 모든 술과 밥을 제공하고, 거둬 먹여줬다. 고마운 친구다. 언젠가는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늘 나를 응원해준 친구였고. 다만 영화 찍을 때 구 소장이 시나리오에 간섭을 해서 트러블이 심했다(웃음).
책 서문을 보니, 이용주 감독이 첫 사랑도 아닌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었나?
(주) : 2003년부터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를 쓸 때, 구 소장은 외국인 설계사무소에 있었다, 이걸로 감독이 되겠다고 하자, 구 소장은 믿지 않았다. ‘영화 속 집을 지을 때 네가 할래?’라고 했더니, 그때 구 소장의 태도는 ‘네가 영화감독이 되면 해줄게’였다. 영화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세트를 짓는다는 게 농담처럼 들렸나보더라. 빈정상해서 다른 건축가에게 맡기려고도 했다. 구 소장이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오픈하고 월급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 그때는 (구 소장이) 유연한 자세여서 만나줬다.
(회) : 배고파서 했다(웃음). 배고픈 건축가를 도와준다는 이 감독의 선의가 있었고, 나도 도와주겠다는, 둘 다 도와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영화에 나온 집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어려운 건축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선의는 선의인데, 달지 않은 사탕? 친구가 주니까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 재미있는 만큼 힘들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 감독이 영화가 잘 되면 작업도 많이 들어올 거라고 했는데, 나는 믿지 않았다. 네이버에 내 이름을 치면 이제는 이름이 나온다. 예전에는 BMW 판매왕인 동명이인만 나왔는데, 이젠 누굴 만나도 내가 누구라는 걸 인식시킬 수 있어서 고맙다. 이제 남은 숙제는 영화 속 집을 만든 건축가 구승회를 지우는 거다. 10년 동안 이걸 우려먹을 순 없으니, 앞으로 그게 과제다.
앞선 영화였던 <불신지옥>과 달리 멜로영화를 고른 이유가 있었나?
(주) : 원래는 반대다. <건축학개론>을 준비하다가 진행이 잘 안 돼서 <불신지옥>을 먼저 찍었다. 멜로영화를 준비하다가 하도 안 되니까, 감독은 돼야겠고 전략적으로 공포영화로 입봉했다. 캐스팅이 너무 어려웠다. 공포영화가 캐스팅 저항을 별로 안 받는다. A급 배우가 아니라도 제작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론 늦게 나왔지만, 먼저 추진한 것은 <건축학개론>이 먼저다.
첫사랑은 어떠했나? 수지와 닮았나?
(회) : 초등학교 2학년 때 옆 반이었다. 운동회에서 매스게임을 하는데, 한 여자애가 있기에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움직이는데 나만 안 움직이니, 선생님이 때리고 그랬다(웃음). 여자애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애만 바라보고 서 있던 기억만 난다.
(주) : 나는 구 소장의 첫사랑을 잘 알고 있다. 대학 때 그 여자가 내게 소개팅도 해 주고 그랬다. 재작년 결혼을 했는데, 구 소장은 안 가고 나만 갔다.
수지만큼이나 눈에 띄는 캐릭터가 납득이였다. 주옥같은 대사는 감독의 경험담인가?
(주) : 난 정상적인 사람이다(웃음). 납득이 말투가 내 말투에 섞여있다고 하더라. 자연스럽게 들어간 캐릭터다.
스무 살, 각자 어느 캐릭터에 가까웠나? 서로에게 상담해주던 친구였나?
(주) : 둘이서 신촌 술집에서 이문세 ‘옛사랑’을 들으면서 폭음하고. 서로에게 승민이면서 납득이였던 것 같다. 구 소장이 과거 얘기를 꺼리는 이유가 있다. 구 소장이 압도적으로 많이 놀아서. 구 소장은 연애를 열심히 하려고 하던 학생이었다. 뚜렷했다.
(회) : 이 감독이 아주 디테일하게 기억력이 좋다. 그 힘이 영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친구로서는 폭로전이 나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내가 밀린다.
납득이와 승민이가 계단에서 상담을 하고 부둥켜안는다. 두 분도 힘든 그런 시절이 있었나?
(회) : 같은 동네에 살아서 편의점 앞에서 늘 만났다. 절대 부둥켜안지는 않았고(웃음). 이 감독이 좋아했던 연대 앞 술집에선 늘 술을 마셨고. 이 감독과 만난 공간하면 떠오르는 곳들이다.
캐스팅이 힘들었던 역할이 있다면?
(주) : 쉬운 캐스팅은 없었다. 캐스팅은 정말 힘들다. 배우들이 생각 이상으로 스케줄이 많고, 서로 하고 싶어도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두 편을 찍으면서 캐스팅을 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적 같다고 생각한다. 거절을 굉장히 많이 당했고, 10년 동안 거절당한 배우가 50명도 넘는다. 다 기억하고 있다(웃음).
한가인과 수지, 누가 더 이상형에 가깝나?
(주) : 내 첫사랑이 훨씬 더 예뻤다. 사귀었던 사람보다 그들을 이상형이라고 할 순 없지.
한가인과 수지, 누가 더 예쁜가?
(주) : (한숨 쉬며) 아~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영화 작업을 하는 건, 나에겐 이성을 보는 게 아니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라서, 이 사람이 예쁜지 아닌지 감상할 시간이 없다. 배우와 연애하는 감독도 있던데, 나는 배우와 일 얘기하기도 급급한 긴장관계랄까. 알게 모르게, 배우와 감독은 생산적인 긴장관계가 있다.
건축이 내게는 첫 사랑이었다
서연의 집이 영화에서 중요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있었다면?
(주) : 서연의 집에서 무엇을 허물고 남기며 새로 짓느냐가 중요했다. 집에 있는 기억들, 키를 잰 낙서나, 아버지가 만들었던 세면대에 있는 서연의 발자국, 그런 것이 멜로의 테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돋보이게 할까 고민했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더라. 이견도 있고.
(회) :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방법이 다르면 되지 않느냐 했는데, 이 감독은 머릿속에 바라는 그림이 명확히 있었다. 내가 의견을 내면 시나리오를 왜 건드리느냐고 버럭 화내고. 영화 다 찍을 무렵엔 알았다. 이 감독이 얘기했던 것 자체가 영화였고, 그런 이야기 거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했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어지간하면 건축주와 싸우지 않는데, 이 감독과 자존심 싸움 같은 것도 있었다.
“감독의 머릿속엔 얼추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집의 모습이 존재했고, 건축가는 여전히 여러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영화에 나오는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길 바랐고, 감독에게 이 집은 결국 영화의 배경으로서 제대로 기능해야 했다.”(p.16)
(주) : 다른 건축주는 따라주는데, 왜 나는? (웃음) 구 소장은 나를 건축주로 보고 제안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시나리오가 있었던 거지. 영화 현장을 모르는데, 스태프가 된 거지. 스태프가 시나리오를 바꿀 순 없지 않나. 그래서 내가 ‘왜 의뢰했지’하며 후회했던 순간도 있었다.
(회) :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건축가 역할을 하자고 생각했었다. 넌 영화하니, 난 건축하거든, 이런 생각도 했었다. 영화라며 알아서 기는 건 아니라고 봤다. 건물을 짓는 것처럼 스텝을 밟아나가자는 합의도 있었고, 세트로 지어졌지만, 실제 건물로서 작용하는 걸 생각해서 디자인했었다. 어쨌든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소연의 집을 건축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회) : 감독 의견도 있었고, 덧붙여서 넣고 싶었던 것은 걸터앉는 턱 하나는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르겠는데, 창문을 열고 앉는 행위에 대해 미련이 있었다. 그런 장소를 조금 다르게, 의자나 창턱보다 조금 더 디자인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서연이 승민의 CD를 듣는 턱, 일부러 그런 턱을 만들어봤다. 주변에서 딱 한 분이 영화에서 앉을 수 있는 그 턱이 마음에 들었다고 얘기해줘서 기뻤다.
“창은 열리고 닫히며 안과 밖을 나누고 연결한다. 그런 창턱에 앉아 밖을 보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곳에 앉을 수 있는 배려를 해주는 순간 경계는 모호해지며 밖도 안도 아닌, 어떤 곳에 있는 조금 다른 경험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었다.”(p.145)
이 감독은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주) : 한 맺힌 게, (구 소장이) 왜 내 시나리오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였다. 시나리오 상에서 2층에 잔디가 있었는데, 구 소장이 빼라고 했다. 그걸 지켜내느라 굉장히 힘들었다(웃음).
서연의 집이 제주도에서 명소가 됐다. 영화와 다르게 건축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변화하나?
(회) : 영화 세트는 대지 경계선을 넘어가 있었다. 즉, 도로를 점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를 위해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지을 땐 원래 법대로 맞출 수밖에 없다. 2층이 커지고, 실제보다 통통해졌다고 해야 하나. 비례감이 바뀌었고, 옥상 잔디는 살릴 것 같은데, 잔디 아닌 다른 것이 올라갈 것 같다. 폴딩도어 등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는 그대로 갈 것 같다.
집짓기와 주인공 감정선을 연결한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구상한 계기가 있다면?
(주) : 당시로선 자연스러웠다. 건축을 하다가 영화를 했는데, 건축을 소재로 한 영화를 잘 할 자신도 있고, 특화되는 의미도 있고. 시나리오 처음 쓸 때 20대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하나가, 건축이 내겐 첫사랑이었다. 영화인으로서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설계사무소 다닐 때 집을 못 지어봤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집을 지으면서 건축과 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었다.
정릉집, 아파트 옥상, 한옥빈집 등 일상의 공간이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주) : 모두 내겐 의미가 있는 공간인데,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건축학과에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 승민처럼 나도 한 집에 오래 살았다. 물론 아파트였지만. 집에 대한 불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건축학과에 갔을 정도니까.
(회) : 글을 쓰게 된 경위는 처음 글을 쓰고자 한 게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 전화가 와서, 자기는 시나리오를 너무 오래 썼고, 글 쓰는 건 별로라면서 내게 쓰라고 하더라. 넙죽 받았다. 그때까지도 무슨 이야길 쓸지 몰랐다. 이 감독이 하고자 한 공간이야기가 영화에 많이 나왔고 이를 생각하다보니 해석이 아니라 내가 할 이야기가 연상이 되더라. 영화에 나온 공간들을 들여다보게 된 거다. 어떤 이야길 끌어낼 수 있을지 생각했고, 그게 글로 나왔다. 영화 전체가 내게 소스를 주고 이슈나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줬다. 나도 처음엔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였지만 다시 보면서 건축, 도시 등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갔다. 내게도 의미가 있었다.
‘전람회의 노래 선곡’ 인기 예상하지 못했다
‘기억의 습작’,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알았나?
(주) : 예상 못했다. 영화 작업이 그렇다. 영화 만드는 사람은 늘 좌불안석이다. ‘기억의 습작’의 완성도와 기억 때문에 영화가 반사이익을 누린 거 같다. 잘 맞겠다 싶어서 선택했는데, 반응이 뜨거워서 선곡을 잘 한 것 같다. 2003년도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1992년이 배경이었는데, 제작이 미뤄지면서 배경이 1994년을 넘기면서 전람회 노래가 들어갔다.
건축가에서 영화감독이 되면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주) : 건축가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했다면, 영화감독은 있는 공간에 대한 기억, 감수성을 이용한다. 건축할 때보다 영화하면서 낯선 곳을 더 돌아보게 되더라. 설계사무소에서 도면만 만들다가 영화를 하면서 실재 장소에 가서 영화의 질감에 맞는 정서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흥미로웠다. 영화를 하면서 지금 다시 건축을 하면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분야에서의 창작활동이 이런 식으로 자극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쓸 때 자주 가는 공간이 있나?
(회) :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가 글을 써야 하니까 죽을 것 같더라. 정말 힘들었다. 또 하는 일이 있으니, 술집에 가서 글을 썼다. 담배를 못 끊었는데, 글 쓰는 스트레스를 받으니 담배도 펴야 하고, 담배를 핑계로 술집에 가서 글을 썼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즐겼다. 너무 시끄럽거나 조용하지 않은 곳에서 글을 썼는데,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잘못된 이야기를 쓰면 탄로 나지 않겠나. 그래서 많은 것을 들여다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공부를 시작하게 해 준 좋은 기회였다.
(주) : 나는 집에서만 쓴다. 다른 곳에선 못 쓴다. 외부에선 못 쓰고 집의 책상에서만 쓴다.
“글을 쓰는 과정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일을 하고 일상을 살아가며 공간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툭툭 떠올리고 이내 잊어버리곤 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고, 새로 발견하듯 그것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p.11)
요즘 나만의 공간, 내 집 짓기 등이 트렌드다. 집 지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회) : 많은 분이 찾아오진 않았고, 그런 트렌드는 느껴진다. 주변 건축가들도 주택 일을 많이 하고, 관심도 많은데, 그 이유가 첫 번째는 아파트가 더 이상 값이 오르지 않는다. 값이 오를 땐 저걸 사놔야 달라지는데, 그런 시대가 지난다는 느낌이다. 삶의 모습을 담는데 아파트 말고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아파트 구입이 서울에선 불가능한 시대가 되고 있다 보니 다른 생각이 시작되고 집에 대한 현실적 욕구가 생기며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가치의 추구가 따라온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겨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부분은 건축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듣고 싶은 부분이다.
좋아하는 건축가나 눈여겨볼만한 건축이나 공간이 있다면?
(회) : 우리 세대는 윗세대를 부정하려는 게 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보니, 저만큼 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한 두 건축가를 얘기하기보다, 어렸을 때 환기미술관에 갔는데 굉장히 좋았다. 건축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공간 중의 하나였다. 환기미술관의 조그만 마당에 한국의 기와를 모티브로 한 담장이 있었다. 좋았다. 그런 좋은 건축물이 우리나라에 많다. 유명함의 여부가 아니라 내가 좋다고 느낀 공간이 최고의 건축물일 수 있다. 그런 열린 시각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
내 인생의 책이나 영화는 무엇인가?
(회) : 내 인생까지는 아니고, 나는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은 아닌데, 여러 번 샀던 책이 있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 사기도 했었는데,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인데 『Welcome to the Monkey House』이다. 얼마 전에도 샀다. 젊은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같다.
(주) : 이런 질문에 저항한다. 내 인생의 책이나 영화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서 나를 표현하는데 저항이 있다. 구 소장이 이번에 책을 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구 소장이 글을 잘 썼다. 이번에도 잘 썼더라. 뿌듯하고, 이게 4천만 부가 팔리면 구 소장이 꽤 많은 돈을 번다. 그것까진 아니라도 5쇄까지 찍었으면 좋겠다. (웃음)
우리도 납득이와 승민이처럼 편의점 앞에서 늘 만났다
각각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이용주, 이하 주) : 지금 다른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피폐한 상태다.
(구승회, 이하 회) : 영화를 찍느라고 만든 서연의 집은 세트였고, 항간에는 태풍 때문에 무너졌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태풍 때문이 아니다. 미디어가 과장했다. 세트여서 스스로 무너졌고. 원래도 영화가 끝나고 이 집을 헐고 카페로 가자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갤러리카페가 2월 말~3월 초 오픈 예정이다. 영화 속 모습과 약간 다른데, 제주도에 가면 볼 수 있다. 영화가 대박 나서 나도 바빠졌을 거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책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있었고, 한가하게 지내고 있다.
두 분, 대학동기로 알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회) : 20년 좀 넘었다. 이 감독이 나보다 1살 많다. 같은 중학교를 나왔는데, 대학 다닐 때는 그걸 몰랐고, 말을 깠다(웃음).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오래 지내는 거 보니 친하긴 친하다.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고 책까지 대박나면 더 고마운 친구가 될 거고(웃음).
(주) : 건축 일을 하다가 구 소장이 미국에 유학가고 나는 영화로 갔다. 이후 구 소장이 돌아왔고, 내가 입봉을 준비하면서 금치산자 수준으로 살 때, 모든 술과 밥을 제공하고, 거둬 먹여줬다. 고마운 친구다. 언젠가는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늘 나를 응원해준 친구였고. 다만 영화 찍을 때 구 소장이 시나리오에 간섭을 해서 트러블이 심했다(웃음).
책 서문을 보니, 이용주 감독이 첫 사랑도 아닌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었나?
(주) : 2003년부터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를 쓸 때, 구 소장은 외국인 설계사무소에 있었다, 이걸로 감독이 되겠다고 하자, 구 소장은 믿지 않았다. ‘영화 속 집을 지을 때 네가 할래?’라고 했더니, 그때 구 소장의 태도는 ‘네가 영화감독이 되면 해줄게’였다. 영화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세트를 짓는다는 게 농담처럼 들렸나보더라. 빈정상해서 다른 건축가에게 맡기려고도 했다. 구 소장이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오픈하고 월급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 그때는 (구 소장이) 유연한 자세여서 만나줬다.
(회) : 배고파서 했다(웃음). 배고픈 건축가를 도와준다는 이 감독의 선의가 있었고, 나도 도와주겠다는, 둘 다 도와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영화에 나온 집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어려운 건축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선의는 선의인데, 달지 않은 사탕? 친구가 주니까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 재미있는 만큼 힘들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 감독이 영화가 잘 되면 작업도 많이 들어올 거라고 했는데, 나는 믿지 않았다. 네이버에 내 이름을 치면 이제는 이름이 나온다. 예전에는 BMW 판매왕인 동명이인만 나왔는데, 이젠 누굴 만나도 내가 누구라는 걸 인식시킬 수 있어서 고맙다. 이제 남은 숙제는 영화 속 집을 만든 건축가 구승회를 지우는 거다. 10년 동안 이걸 우려먹을 순 없으니, 앞으로 그게 과제다.
앞선 영화였던 <불신지옥>과 달리 멜로영화를 고른 이유가 있었나?
(주) : 원래는 반대다. <건축학개론>을 준비하다가 진행이 잘 안 돼서 <불신지옥>을 먼저 찍었다. 멜로영화를 준비하다가 하도 안 되니까, 감독은 돼야겠고 전략적으로 공포영화로 입봉했다. 캐스팅이 너무 어려웠다. 공포영화가 캐스팅 저항을 별로 안 받는다. A급 배우가 아니라도 제작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론 늦게 나왔지만, 먼저 추진한 것은 <건축학개론>이 먼저다.
첫사랑은 어떠했나? 수지와 닮았나?
(회) : 초등학교 2학년 때 옆 반이었다. 운동회에서 매스게임을 하는데, 한 여자애가 있기에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움직이는데 나만 안 움직이니, 선생님이 때리고 그랬다(웃음). 여자애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애만 바라보고 서 있던 기억만 난다.
(주) : 나는 구 소장의 첫사랑을 잘 알고 있다. 대학 때 그 여자가 내게 소개팅도 해 주고 그랬다. 재작년 결혼을 했는데, 구 소장은 안 가고 나만 갔다.
수지만큼이나 눈에 띄는 캐릭터가 납득이였다. 주옥같은 대사는 감독의 경험담인가?
(주) : 난 정상적인 사람이다(웃음). 납득이 말투가 내 말투에 섞여있다고 하더라. 자연스럽게 들어간 캐릭터다.
스무 살, 각자 어느 캐릭터에 가까웠나? 서로에게 상담해주던 친구였나?
(주) : 둘이서 신촌 술집에서 이문세 ‘옛사랑’을 들으면서 폭음하고. 서로에게 승민이면서 납득이였던 것 같다. 구 소장이 과거 얘기를 꺼리는 이유가 있다. 구 소장이 압도적으로 많이 놀아서. 구 소장은 연애를 열심히 하려고 하던 학생이었다. 뚜렷했다.
(회) : 이 감독이 아주 디테일하게 기억력이 좋다. 그 힘이 영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친구로서는 폭로전이 나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내가 밀린다.
납득이와 승민이가 계단에서 상담을 하고 부둥켜안는다. 두 분도 힘든 그런 시절이 있었나?
(회) : 같은 동네에 살아서 편의점 앞에서 늘 만났다. 절대 부둥켜안지는 않았고(웃음). 이 감독이 좋아했던 연대 앞 술집에선 늘 술을 마셨고. 이 감독과 만난 공간하면 떠오르는 곳들이다.
캐스팅이 힘들었던 역할이 있다면?
(주) : 쉬운 캐스팅은 없었다. 캐스팅은 정말 힘들다. 배우들이 생각 이상으로 스케줄이 많고, 서로 하고 싶어도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두 편을 찍으면서 캐스팅을 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적 같다고 생각한다. 거절을 굉장히 많이 당했고, 10년 동안 거절당한 배우가 50명도 넘는다. 다 기억하고 있다(웃음).
한가인과 수지, 누가 더 이상형에 가깝나?
(주) : 내 첫사랑이 훨씬 더 예뻤다. 사귀었던 사람보다 그들을 이상형이라고 할 순 없지.
한가인과 수지, 누가 더 예쁜가?
(주) : (한숨 쉬며) 아~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영화 작업을 하는 건, 나에겐 이성을 보는 게 아니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라서, 이 사람이 예쁜지 아닌지 감상할 시간이 없다. 배우와 연애하는 감독도 있던데, 나는 배우와 일 얘기하기도 급급한 긴장관계랄까. 알게 모르게, 배우와 감독은 생산적인 긴장관계가 있다.
건축이 내게는 첫 사랑이었다
서연의 집이 영화에서 중요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있었다면?
(주) : 서연의 집에서 무엇을 허물고 남기며 새로 짓느냐가 중요했다. 집에 있는 기억들, 키를 잰 낙서나, 아버지가 만들었던 세면대에 있는 서연의 발자국, 그런 것이 멜로의 테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돋보이게 할까 고민했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더라. 이견도 있고.
(회) :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방법이 다르면 되지 않느냐 했는데, 이 감독은 머릿속에 바라는 그림이 명확히 있었다. 내가 의견을 내면 시나리오를 왜 건드리느냐고 버럭 화내고. 영화 다 찍을 무렵엔 알았다. 이 감독이 얘기했던 것 자체가 영화였고, 그런 이야기 거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했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어지간하면 건축주와 싸우지 않는데, 이 감독과 자존심 싸움 같은 것도 있었다.
“감독의 머릿속엔 얼추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집의 모습이 존재했고, 건축가는 여전히 여러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영화에 나오는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길 바랐고, 감독에게 이 집은 결국 영화의 배경으로서 제대로 기능해야 했다.”(p.16)
(주) : 다른 건축주는 따라주는데, 왜 나는? (웃음) 구 소장은 나를 건축주로 보고 제안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시나리오가 있었던 거지. 영화 현장을 모르는데, 스태프가 된 거지. 스태프가 시나리오를 바꿀 순 없지 않나. 그래서 내가 ‘왜 의뢰했지’하며 후회했던 순간도 있었다.
(회) :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건축가 역할을 하자고 생각했었다. 넌 영화하니, 난 건축하거든, 이런 생각도 했었다. 영화라며 알아서 기는 건 아니라고 봤다. 건물을 짓는 것처럼 스텝을 밟아나가자는 합의도 있었고, 세트로 지어졌지만, 실제 건물로서 작용하는 걸 생각해서 디자인했었다. 어쨌든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소연의 집을 건축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회) : 감독 의견도 있었고, 덧붙여서 넣고 싶었던 것은 걸터앉는 턱 하나는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르겠는데, 창문을 열고 앉는 행위에 대해 미련이 있었다. 그런 장소를 조금 다르게, 의자나 창턱보다 조금 더 디자인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서연이 승민의 CD를 듣는 턱, 일부러 그런 턱을 만들어봤다. 주변에서 딱 한 분이 영화에서 앉을 수 있는 그 턱이 마음에 들었다고 얘기해줘서 기뻤다.
“창은 열리고 닫히며 안과 밖을 나누고 연결한다. 그런 창턱에 앉아 밖을 보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곳에 앉을 수 있는 배려를 해주는 순간 경계는 모호해지며 밖도 안도 아닌, 어떤 곳에 있는 조금 다른 경험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었다.”(p.145)
이 감독은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주) : 한 맺힌 게, (구 소장이) 왜 내 시나리오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였다. 시나리오 상에서 2층에 잔디가 있었는데, 구 소장이 빼라고 했다. 그걸 지켜내느라 굉장히 힘들었다(웃음).
서연의 집이 제주도에서 명소가 됐다. 영화와 다르게 건축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변화하나?
(회) : 영화 세트는 대지 경계선을 넘어가 있었다. 즉, 도로를 점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를 위해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지을 땐 원래 법대로 맞출 수밖에 없다. 2층이 커지고, 실제보다 통통해졌다고 해야 하나. 비례감이 바뀌었고, 옥상 잔디는 살릴 것 같은데, 잔디 아닌 다른 것이 올라갈 것 같다. 폴딩도어 등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는 그대로 갈 것 같다.
집짓기와 주인공 감정선을 연결한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구상한 계기가 있다면?
(주) : 당시로선 자연스러웠다. 건축을 하다가 영화를 했는데, 건축을 소재로 한 영화를 잘 할 자신도 있고, 특화되는 의미도 있고. 시나리오 처음 쓸 때 20대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하나가, 건축이 내겐 첫사랑이었다. 영화인으로서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설계사무소 다닐 때 집을 못 지어봤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집을 지으면서 건축과 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었다.
정릉집, 아파트 옥상, 한옥빈집 등 일상의 공간이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주) : 모두 내겐 의미가 있는 공간인데,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건축학과에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 승민처럼 나도 한 집에 오래 살았다. 물론 아파트였지만. 집에 대한 불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건축학과에 갔을 정도니까.
(회) : 글을 쓰게 된 경위는 처음 글을 쓰고자 한 게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 전화가 와서, 자기는 시나리오를 너무 오래 썼고, 글 쓰는 건 별로라면서 내게 쓰라고 하더라. 넙죽 받았다. 그때까지도 무슨 이야길 쓸지 몰랐다. 이 감독이 하고자 한 공간이야기가 영화에 많이 나왔고 이를 생각하다보니 해석이 아니라 내가 할 이야기가 연상이 되더라. 영화에 나온 공간들을 들여다보게 된 거다. 어떤 이야길 끌어낼 수 있을지 생각했고, 그게 글로 나왔다. 영화 전체가 내게 소스를 주고 이슈나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줬다. 나도 처음엔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였지만 다시 보면서 건축, 도시 등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갔다. 내게도 의미가 있었다.
‘전람회의 노래 선곡’ 인기 예상하지 못했다
‘기억의 습작’,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알았나?
(주) : 예상 못했다. 영화 작업이 그렇다. 영화 만드는 사람은 늘 좌불안석이다. ‘기억의 습작’의 완성도와 기억 때문에 영화가 반사이익을 누린 거 같다. 잘 맞겠다 싶어서 선택했는데, 반응이 뜨거워서 선곡을 잘 한 것 같다. 2003년도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1992년이 배경이었는데, 제작이 미뤄지면서 배경이 1994년을 넘기면서 전람회 노래가 들어갔다.
건축가에서 영화감독이 되면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주) : 건축가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했다면, 영화감독은 있는 공간에 대한 기억, 감수성을 이용한다. 건축할 때보다 영화하면서 낯선 곳을 더 돌아보게 되더라. 설계사무소에서 도면만 만들다가 영화를 하면서 실재 장소에 가서 영화의 질감에 맞는 정서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흥미로웠다. 영화를 하면서 지금 다시 건축을 하면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분야에서의 창작활동이 이런 식으로 자극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쓸 때 자주 가는 공간이 있나?
(회) :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가 글을 써야 하니까 죽을 것 같더라. 정말 힘들었다. 또 하는 일이 있으니, 술집에 가서 글을 썼다. 담배를 못 끊었는데, 글 쓰는 스트레스를 받으니 담배도 펴야 하고, 담배를 핑계로 술집에 가서 글을 썼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즐겼다. 너무 시끄럽거나 조용하지 않은 곳에서 글을 썼는데,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잘못된 이야기를 쓰면 탄로 나지 않겠나. 그래서 많은 것을 들여다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공부를 시작하게 해 준 좋은 기회였다.
(주) : 나는 집에서만 쓴다. 다른 곳에선 못 쓴다. 외부에선 못 쓰고 집의 책상에서만 쓴다.
“글을 쓰는 과정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일을 하고 일상을 살아가며 공간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툭툭 떠올리고 이내 잊어버리곤 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고, 새로 발견하듯 그것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p.11)
요즘 나만의 공간, 내 집 짓기 등이 트렌드다. 집 지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회) : 많은 분이 찾아오진 않았고, 그런 트렌드는 느껴진다. 주변 건축가들도 주택 일을 많이 하고, 관심도 많은데, 그 이유가 첫 번째는 아파트가 더 이상 값이 오르지 않는다. 값이 오를 땐 저걸 사놔야 달라지는데, 그런 시대가 지난다는 느낌이다. 삶의 모습을 담는데 아파트 말고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아파트 구입이 서울에선 불가능한 시대가 되고 있다 보니 다른 생각이 시작되고 집에 대한 현실적 욕구가 생기며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가치의 추구가 따라온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겨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부분은 건축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듣고 싶은 부분이다.
좋아하는 건축가나 눈여겨볼만한 건축이나 공간이 있다면?
(회) : 우리 세대는 윗세대를 부정하려는 게 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보니, 저만큼 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한 두 건축가를 얘기하기보다, 어렸을 때 환기미술관에 갔는데 굉장히 좋았다. 건축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공간 중의 하나였다. 환기미술관의 조그만 마당에 한국의 기와를 모티브로 한 담장이 있었다. 좋았다. 그런 좋은 건축물이 우리나라에 많다. 유명함의 여부가 아니라 내가 좋다고 느낀 공간이 최고의 건축물일 수 있다. 그런 열린 시각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
내 인생의 책이나 영화는 무엇인가?
(회) : 내 인생까지는 아니고, 나는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은 아닌데, 여러 번 샀던 책이 있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 사기도 했었는데,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인데 『Welcome to the Monkey House』이다. 얼마 전에도 샀다. 젊은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같다.
(주) : 이런 질문에 저항한다. 내 인생의 책이나 영화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서 나를 표현하는데 저항이 있다. 구 소장이 이번에 책을 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구 소장이 글을 잘 썼다. 이번에도 잘 썼더라. 뿌듯하고, 이게 4천만 부가 팔리면 구 소장이 꽤 많은 돈을 번다. 그것까진 아니라도 5쇄까지 찍었으면 좋겠다. (웃음)
-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 구승회 저 | 북하우스
2012년 다시 보고 싶은 영화 1위로 선정된 「건축학개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해온 공간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서연의 집’을 직접 건축하며 공간에 담긴 이야기의 힘을 경험한 「건축학개론」 공간 디렉터 구승회 소장은 건축의 의미를 삶 속에 스며든 일상적이며 따듯한 모습이길 바랐고, 영화 속에서 사람과 기억을 어루만지는 공간의 따스함은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으로 다시 살아났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6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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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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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제이
201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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