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들렀다가 로비에 마련된 점자 도서 전시 코너를 발견했다. 전시된 책들은 일반 묵자 그림책 위에 점자 라벨을 덧붙인 형식이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표면을 만지며 올록볼록한 감촉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책을 반납한 뒤, 도서관 옆의 근린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오래된 공원이라 그런지 화단 한가득 분홍과 흰색 철쭉이 만개해 있었다. 저기 꽃 무리를 보라하니 아이는 산책로 가장자리의 바닥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엄마, 이게 뭐야?” 하는 아이의 말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자갈을 촘촘히 세워 만든 지압길이었다. 이번에는 발바닥으로 올록볼록한 것을 느껴보겠다며, 아이는 꾹꾹 밟고 즐거워했다.
점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한 ‘손으로 읽는 문자’이고, 지압길은 혈액순환을 돕기 위함이다. 이 엠보싱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눈에 그 기능이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 역할을 다하고 있는 엠보싱(embossing)과 디보싱(debossing)이 사용된 책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형압은 종이에 열과 압력을 가해 표면을 돌출시키거나(엠보싱), 오목하게 눌러 들어가게(디보싱) 하는 후가공 기법이다. ‘후가공’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추가 작업, 즉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쇄만으로도 충분히 기본적인 그래픽 표현은 가능하지만 우리는 왜 굳이 공정을 늘리고 제작비를 더 들여가며 이러한 작업을 추가하는 것일까? 이제, 아래 소개할 책들을 함께 들여다보자.
『일의 감각』
조수용 저 | 모스 그래픽 디자인 | B Media Company
『일의 감각』은 매거진 B의 발행인 조수용의 에세이다.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리고 회사 대표까지 역임한 저자의 이력을 떠올렸을 때 이 책은 제작 과정에서도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기대는 결과물로 충실히 입증된다. 본문은 글줄 간격을 넉넉히 띄우고 왼쪽 정렬로 디자인되어 읽기 편하다. 표지는 굵은 입자로 질감이 살아 있는 ‘엔젤클로스’ 용지를 사용했으며 선명한 주황색 위에 세 개의 텍스트 덩어리와 세 개의 사각형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기초’와 ‘무게’라는 키워드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일의 감각’이라는 한글 제목은 주황색 사각형과, ‘Work and Sense’라는 영문 제목은 검은색 사각형과 각각 짝을 이루고 있다. ‘조수용’이라는 저자명은 투명 사각형과 협응하면서 균형을 맞춘다. 이 텍스트와 도형들의 위치는 지루함 없이 과하게 흩어지지도 않으며 적절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런 미묘한 균형 감각에서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드러난다!) 특히 저자명 위의 투명 사각형은 별도의 인쇄 없이 디보싱 기법으로 표현했다. 주황색 사각형과 검은색 사각형 역시 인쇄 대신 각각 안료박으로 진하게 찍어 표면에 깊은 물리적 질감을 부여했다. 세 개의 사각형 모두 압력을 받아 인쇄로 얹힌 텍스트 레이어와 뚜렷이 대비를 이룬다. 만약 모든 요소가 단순 인쇄만으로 제작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입체감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뒤표지에서는 목차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디보싱으로 처리하여 언뜻 보면 바코드만 보이도록 연출했다. 이는 앞표지와 일관된 감각을 유지한 탁월한 선택이다. 다만 심플한 도형과 달리 획이 많고 부리가 강조된 명조체 글자들은 좀 더 강한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용지의 굵은 텍스처가 글자 주변부까지 눌려 버린 점은 다소 아쉽다. 디자이너의 이상과 제작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5%쯤의 긴장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의 감각』이 갖고 있는 직육면체의 감각을 스크린이 아닌 손으로 직접 느껴보길 바란다.
『일의 감각』 뒤 표지
『탈주택』
야마모토 리켄, 나카 도시하루 저 | 김승은 디자인 | 안그라픽스
『탈주택』은 ‘1가구 1주택’이라는 전통적 사고 대신, 더 나은 방식으로 ‘공동체’를 설계하는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언뜻 보면 흰 바탕에 검은 글자들과 회색 띠지가 둘러져 깔끔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 바탕에는 글자 외에도 올록볼록한 무늬가 숨어 있고 띠지는 펄감을 띠어 각도에 따라 은은하게 반짝인다. 본문은 건축에 관한 이야기답게 여러 사진과 평면도 자료가 풍성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배치되어 있다. 디자이너는 표지 전체를 하나의 대지로 보고 공공주택 부지를 평면도 형태로 표현했다. 제목, 부제, 저자 등의 정보는 각각 별개의 주택처럼 고유한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사적 공간들은 모두 공적인 공간, 즉 중앙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제안하는 공공주택 —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완전히 구분되기도 하고, 때로는 혼합되기도 하는 — 그 복합적인 모습을 북디자이너가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한 결과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압(디보싱)으로 표현된 부지는 오히려 단단하게 꽉 차 있는 감각을 준다. 표지를 넘길 때 띠지와 면지에서 은근하게 펄감이 이어지는 것도 기분 좋은 순간이다. 형압이 정확하게 제작된 덕분에 책을 여러 권 쌓아둘 때 띠지에도 그 올록볼록한 무늬가 어렴풋이 찍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종이라는 재료이고, 나는 여전히 그 종이를 손에 쥐고 책을 읽고 싶다.
『탈주택』 표지-면지
『탈주택』 띠지
『나는 거기 없음』
곽예인 저 | 이지선 디자인 | 위고
한 사람에게 벌어졌던 불운의 연대기이지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수많은 ‘○○’들의 불운을 변주한 기록이다. 이 책은 그런 이름들을 소환함으로써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교묘한 폭력의 모습을 또렷이 그려낸다. 그래서 이 제목은 가볍게 들리지만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이 책의 제목이 이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디자이너는 제목, 부제, 저자명과 같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정보들을 모두 먹으로 덮고 그 위에 형압(엠보싱) 처리했다. 반면 표지에 쓰인 이미지와 영문 ‘im not there’는 경쾌하게 배치되어 있다. 형압을 형식적으로도, 내용상으로도 가장 군더더기 없이 지혜롭게 활용했기에 여기에 더 보탤 말이 없을 정도다. 제목이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제목이 더 명확히 보이는 디자인. 보이지 않음과 존재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 역설이 책의 본질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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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름 스티커를 간편하게 프린팅할 수 있는 기계들이 흔한데, 예전에는 라벨기로 철자 하나하나를 선택해 테이프 위에 볼록하게 텍스트를 찍어 썼던 적이 있다. 지금에 비하면 매우 아날로그적 방식이지만 글자가 튀어나온 것을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푸쉬팝을 왜 재미있어하는지 아이에게 물어보았지만 정작 나 역시 무심코 볼록한 부분을 꾹꾹 누르게 된다.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은 단순한 촉감 그 이상을 자극한다. 책을 눈으로 읽기 전에 손끝으로 먼저 읽어보는 것. 아마도 그래서 인쇄에 더해 올록볼록한 책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