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는 어떤 와인이든 냄새만 맡아도 안다고?
소믈리에는 병아리 감별사처럼 와인을 척 보고 수놈인지 암놈인지 맞히는 사람이 아니다. 감별사라는 묘한 뉘앙스의 이름으로 번역됐으니 그렇게 오해를 받곤 한다.
20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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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국에서 열린 소믈리에 대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프랑스 와인 수출을 독려하는 어떤 단체의 후원으로 열린 행사였다. 수백 명의 와인 애호가들과 결선에 진출한 소믈리에의 지인들로 행사장은 제법 후끈거렸다.
소믈리에 대회는 세계적으로 많이 열린다.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나 지역 정부에서 주최하는 것도 많고, 소믈리에 단체나 와인 생산회사에서 여는 것도 많다. 어떤 행사든 프로그램은 비슷하다. 와인에 대한 지식을 묻는 필답시험이나 구두시험, 와인과 음식의 조화에 관한 지식과 실제 추천, 와인을 마셔보고 이름과 품종, 빈티지 등을 맞히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 등으로 이뤄진다.
특별히 어떤 분야가 중요한가를 판가름할 수 없을 만큼 모두 소믈리에의 중요한 기량에 속한다.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모아지곤 한다. 이름도 모르는 와인의 냄새를 맡고 마셔본 다음 어떤 와인인지 척척 맞히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흥미로운 이벤트냔 말이다.
대회 결선에 참석한 소믈리에(물론 모두 한국 소믈리에다)가 가장 어려워하고 긴장한 대목도 역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었다. 어떤 소믈리에는 심혈을 기울여 냄새를 맡고 마셔보느라 제한시간을 모두 써버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대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심사위원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 결선 참여자 모두 하나도 맞히지 못했어요. 빵점이에요.”
그는 ‘도대체 최고 소믈리에를 뽑는 자리에 올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나도 맞히지 못했느냐’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다. 소믈리에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대개 이 정도이다. 어떤 와인을 던져주든 냄새를 맡고 마셔보면 “음, 이건 2008년산 보르도 무슨 지방 무슨 샤토에서 만든 와인이군요” 하고 맞힐 걸로 생각한다. 그래서 소믈리에를 번역한 말이 ‘와인 감별사’ 아닌가.
소믈리에는 병아리 감별사처럼 와인을 척 보고 수놈인지 암놈인지 맞히는 사람이 아니다. 감별사라는 묘한 뉘앙스의 이름으로 번역됐으니 그렇게 오해를 받곤 한다.
이 해프닝의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빵점을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믈리에는 와인 감별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와인 감별사는 와인 생산지역의 회사나 생산자 조합에 고용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의 질을 따지고 가격을 매기는 사람들이다. 또는 와인 콘테스트에 참석해서 품질을 판별하는 일을 한다. 이들의 평가는 대단히 높은 신뢰를 부여받아서 와인 가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몫을 하기도 한다.
와인처럼 비슷한 토양과 기후에서도 천차만별의 품질이 나오는 술은 이런 감별사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 증류수인 위스키 생산지역에도 위스키 감별사가 있고, 쇠고기도 축산물 감정평가사가 등급을 매기고 있지 않은가.
결국 소믈리에와 와인 감별사는 전혀 별개의 직업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같은 직업으로 오해받고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소믈리에가 겪은 우스운 일도 그래서 일어났다. 어느 날 손님이 라벨이 없는 와인을 한 병 들고 오더니 “이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맞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의 절반 정도의 책임은 언론이 져야 한다. 언론에서 무분별한 기사를 실어 와인 감별사로 오해하게 만들고 정정하거나 수정해주는 기사는 없으니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믈리에란 ‘와인 서비스맨’, ‘레스토랑의 와인 책임자’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홀 서빙을 하면서 전문적으로 와인에 대한 이해와 식견을 갖고 있는 전문가를 뜻한다.
소믈리에의 진짜 역할
와인 종주국, 즉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소믈리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와인 구매다. 우리나라처럼 100퍼센트 수입되는 와인을 놓고 구매 대상을 선정하는 나라와는 달리, 와인을 직접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구매에 따라 적지 않은 품질 차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른 구매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와인이지만 품질 대비 가격이 좋은 와인을 미리 사들여 판매하면 좋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믈리에다. 당장 현금이 급한 생산자에게 품질보다 훨씬 싼값에 대량구매를 해서 하우스와인으로 판다면 큰 이익을 내주는 소믈리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와인의 품질과 맛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10년, 20년을 묵혔을 때 가치가 올라갈 와인이라면 가능한 많이 구입해서 저장해두는 것을 판단하는 일도 소믈리에가 할 일이다. 내가 아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한 소믈리에는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큰 수입을 올려주었다.
바롤로Barolo 1990년산과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1988년산을 바리크Barrique 오크통에 담겨진 상태로 잔뜩 사들였는데, 나중에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바리크 상태로 산다는 것은 그 와인의 잠재력을 보고 산다는 뜻이다. 아직 병입하기 전의 상태이므로 최종적인 품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모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잘 고르면 큰 차익을 남길 수 있어서 소믈리에들이 심사숙고하며 매달리는 것이다.
- 보통날의 와인 박찬일 저 | 나무수
와인을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국물로 해석하는 서양 요리사 박찬일. 그가 한국인의 잘못된 와인 지식을 바로잡아 올바른 와인 상식을 알려주고 일상 속 ‘보통날에 와인 마시는 즐거움’을 전한다. 와인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와인에 대한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와인을 마시는 법을 알려주는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와인 스캔들』의 완전개정판이다. 5년 동안 달라진 와인 정보와 더불어 작가의 장점인 요리와 와인 분야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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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찬일
기자로 일하던 중 이탈리아 영화에 매혹되어 3년간 이탈리아에서 와인과 요리를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귀국해 셰프 생활을 시작했다.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제대로 권할 줄 아는 국내 몇 안 되는 요리사다. 트렌드세터들이 모이는 청담동,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 등의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음식 본연의 맛을 요리했다. 시칠리아 유학 당시 요리 스승이었던 주세페 바로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요리를 만든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 ‘동해안 피문어와 홍천 찰옥수수찜을 곁들인 라비올리’,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과 청양고추’, ‘봄 담양 죽순찜 파스타’와 같은 우리 식재료의 원산지를 밝히는 명명법은 강남 일대 셰프들에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지은 책으로는 『보통날의 와인』,『보통날의 파스타』,『박찬일의 와인 셀렉션》,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어쨌든, 잇태리』,『추억의 절반은 맛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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