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영혼을 끌어안아 본 적이 있는가?
책꽂이 앞을 오래 서성이다 결국은 책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책을 덮은 후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다.
201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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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고 영혼의 친구가 된다는 것의 의미
거미 여인의 키스? 독특한 제목의 소설이었다. 책꽂이 앞을 오래 서성이다 결국은 책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책을 덮은 후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 쏟아지는 이과수 폭포를 배경으로 슬픈 사랑을 나누던 두 남자를 화면 가득 담던 그 영화 <해피 투게더>. 그리고 놀랍게도 왕가위 감독이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모티브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 마음을 전부 빼앗긴 사람이 과연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독재 정권하의 아르헨티나의 한 감방. 이곳에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명의 죄수가 한 방에 격리되어 있다. 정치적 행위와 이데올로기의 실천만이 생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믿는 좌익 혁명가 발렌틴과 한없이 여리고 섬세한 동성애자 몰리나. 그들은 성격도, 사상도, 성향도, 삶의 방식도 극히 상반된 적대관계에 놓인 인물들이다. 발렌틴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이성주의자인 데 반해, 몰리나는 모든 것을 감정에 의존하는 감성주의자이다. 작가는 하필 이런 두 사람을 하나의 감방에 집어넣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마치 이런 두 사람도 서로의 벽을 허물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는 듯이. 그러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은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의 영혼을 알아가게 되고, 병에 걸린 발렌틴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몰리나로 인해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적대감과 긴장감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 넌 네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그럼, 비웃어도 상관없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웃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야.
-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 게다가 혼자선 그런 일을 못해.
- 바로 그거야! 난 혼자가 아니야! …… 알겠어? …… 진실이 있고 그것이 중요한 거야! 바로 그거야,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들은 바로 그 순간 서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혼자가 아닌 이상 세상을 기꺼이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꿈을 꾼다면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상반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의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몰리나가 매일 밤 들려주는 달콤한 자장가와도 같은 영화 이야기이다. 불 꺼진 차가운 감방에서 동료가 들려주는 영화 줄거리를 듣는 냉랭한 혁명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혁명가와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비주류 인물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상처받은 영혼들이 득실거릴 감옥에서의 사랑. 그렇게 발렌틴과 몰리나는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야,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주려고 하지 않거든.
진정한 친구란 두 육체에 담긴 하나의 영혼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스하게 전해지는 서로의 마음,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그것뿐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믿었던 두 사람은 비좁은 감방 안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눈다.
- 그리고 또 어떤 것을 느끼는지 알아, 발렌틴? 하지만 잠깐만, 더 이상은 안 할게.
- 뭐야? 말해봐……
- 잠시 동안 내가 여기 없는 것 같았어…… 여기에도 아니면 저기 바깥의 어느 곳에도……
- ……
- 내가 아예 여기에 없는 것 같았어…… 마치 너 혼자인 것처럼.
- ……
- 아니면,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지금…… 내가 너인 것처럼.
결국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발렌틴과 몰리나는 결국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 진정으로 영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맛본다. 마치 내가 너인 것처럼, 네가 나인 것처럼, 그렇게.
친구란 두 육체에 담긴 하나의 영혼이라 했던가. 그들은 물과 기름 같던 두 육체를 하나의 영혼에 담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벗어던진다. 편견과 이기심과 적대감, 심지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마저 훌훌 벗어던진다. 마음을 열고 영혼을 껴안는다는 것의 힘, 그것의 위대함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고귀한 것은 그 사람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려는 눈물겨운 노력 때문이었다. 지친 영혼의 혁명가를 눈물로 위로하던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말한다.
- 몰리나,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좋아하게 될 거야. 심지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도. ……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 겁내지도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너에게 약속을 지키는 거야, 네가 모든 추한 것을 잊게 하는 거야. 나는 오늘 아침에 그것을 맹세했어, 네가 어떤 슬픈 생각도 하지 않게 하겠다고. 난 약속을 지킬 거야…… 내 힘이 미치는 동안은, 최소한 이 하루만이라도…… 난 네가 슬픈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할 거야. …… 다른 것도 약속해줘. 사람들이 널 존중하도록 만들겠다고, 누구도 널 심하게 다루거나 착취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아.
통장에 10억을 두고도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없는 사람
동성애자라는 도덕적 수치심으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늘 자신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로 여기던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누구도 그를 심하게 다루게 두지 말 것을 약속해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석방으로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된 몰리나는 목숨을 걸고 발렌틴의 정치적 메시지를 그의 동료에게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정치적 행동을 실행에 옮긴 몰리나는 처참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의 막바지에는 감옥에 홀로 남아 고문을 받으며 끔찍한 빈사 상태에 빠진 발렌틴이 등장한다. 발렌틴은 모르핀의 도움으로 고문의 고통을 잊고 몰리나의 환상을 보며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금 마음의 휴식을 얻는다. 고통의 야릇한 환상 속에서 작가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잠들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다시 갈라놓지 않을 거에요. 왜냐면 우리는 가장 어려운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죠. …… 내가 당신의 생각 깊숙한 곳에 살고, 그래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이 결코 혼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
홀로 죽어간 몰리나와 고문을 받던 발렌틴은 외로웠을까? 그들의 삶은 처참한 실패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통장에 10억을 두고도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올 것이다. 겉만 맴도는 말과 허위의식만 가득한 제스처로 이루어진 ‘가짜 관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 보자. 당신에게는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 앞에서는 미친 듯이 울어도 흠이 안 되고, 때론 이유 없는 침묵도 이해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실수를 섣불리 비난하지도 않고 성공을 무턱대고 치켜세우지도 않는 사람. 진심으로 나의 성장과 발전을 기도해주고 함께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 당신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 릴케에게 루 살로메가 그랬듯, 하나의 문과 같은 존재를 가졌냐는 말이다. 그 문을 통해 넓은 들판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전에 표시해 두었던 나의 성장을 문기둥에 서서 다시 재어볼 수 있는 그런 존재.
언젠가 잡지에서 한 유명한 정신과의사가 쓴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자살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장된 우울한 우리 사회에서 그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 옆에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단 한 사람’말이다. 당신은 그 ‘단 한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그 단 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어떨까?
19세기 중엽의 위대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만일 한 가슴의 찢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당신이 누군가의 영혼을 진심으로 껴안아본 적이 있다면 당신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나눈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 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 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좋아한다는 신영복. 그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자그마치 20년 20일을 복역한 신영복이 담장 밖으로 보내온 편지들의 묶음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육사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신영복은 어느 날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파릇파릇한 청춘이 채 가시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20년이 지난 1988년이 되어서야 신영복은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를 하게 된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잔인하게 긴 20여 년의 세월이었다. 그 나날 동안 신영복은 감옥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사랑했을까. 무엇에 아파하고, 감사하고, 절망했을까.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있는 숲 속에 서다
이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겠지”라고 혼잣말을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어리고 말았다. 옆 사람을 저도 모르게 미워해져 버리기 때문에 겨울 징역을 택한다는 이 사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가도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서도, 죽음이 일상이 되는 수용소에서도 ‘벗’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그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는다’던 신영복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한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함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비를 맞아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본다. 아니, 함께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어본 적도 없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그런 날이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혹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꾳. 눈꺼풀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텅 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 한참을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어젖히면 나를 반기는 것은 스산한 어둠뿐인 그런 날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고,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렇게 외로움에 숨이 가파져 상처받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람은 모두 300여 명. 그러나 기역부터 히읗까지 몇 번을 오고가도 마땅히 전화를 걸어 가만히 내 외로움을 호소할 만한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건 혼자서 어둠뿐인 집안으로 걸어 들어와야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외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지금, 신영복은 말하는 것이다.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다고, 한 알의 물방울이 되기보다 바다를 선택하겠다고.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고, 함께 비를 맞으며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는 징역 사는 동안 풍치 때문에 참 많은 이빨을 뽑았습니다. 더러는 치과의 그 유리병 속에 넣기도 하고, 더러는 교도소의 땅에 묻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담 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 마디 말에서부터 피땀 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속에, 혹은 한 뙤기의 전답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 묻는다는 것이 파종임을 확신치 못하고, 나눈다는 것이 팽창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나의 소시민적 잔재가 치통보다 더 통렬한 아픔이 되어 나를 찌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언가를 서로 공유하는 것
아, 어쩌자고…… 나는 결국 ‘항복’을 외치고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올리고 말았다. 나눔의 의미를, 이웃의 의미를 이토록 절절히 알려주는 책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들 심신의 일부를 타인에게 나누는 과정이다. 힘이 되어주는 한 마디를, 피땀 어린 인생의 경험을, 타인의 마음과 마음에 심어놓는 과정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개의 나무 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우리들은 그렇다.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 등의 ‘진짜 관계들’을 무의식중에 끝도 없이 갈망하면서도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마음을 열어젖히길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상대방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길 원하면서도 내가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는 철저히 거부한다. 항상 아픔은 비공개로 해둔 채,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들만 전체공개로 해두고 적당히 나를 포장한다. 평생을 이런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깊이 사랑받고 싶고, 깊이 사랑하길 갈망하나 사방에 두꺼운 바리게이트를 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로움에 지쳐 결국은 외치는 거다. 역시 세상은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이라고. 아무도 필요 없다고. 다 가버리라고……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사업’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최고의 교실이라 생각된다던 신영복. 그로 인해 나눔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먼저 양손을 털고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갖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허울뿐인 관계들만 맺으며 가짜 인생을 살지 말자. 기적과 마법은 믿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했다. 당신의 삶에 그런 ‘진짜 관계들’이 많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런 관계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한 때에 한 사람만을 생각한다고 하셨다.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자. 함께 고민을 나누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인생을 살아선 안 되니까. 결국 우리를 반짝반짝 빛나는 천국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진정한 관계들뿐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 독특한 제목의 소설이었다. 책꽂이 앞을 오래 서성이다 결국은 책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책을 덮은 후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 쏟아지는 이과수 폭포를 배경으로 슬픈 사랑을 나누던 두 남자를 화면 가득 담던 그 영화 <해피 투게더>. 그리고 놀랍게도 왕가위 감독이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모티브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 마음을 전부 빼앗긴 사람이 과연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 넌 네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그럼, 비웃어도 상관없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웃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야.
-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 게다가 혼자선 그런 일을 못해.
- 바로 그거야! 난 혼자가 아니야! …… 알겠어? …… 진실이 있고 그것이 중요한 거야! 바로 그거야,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들은 바로 그 순간 서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혼자가 아닌 이상 세상을 기꺼이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꿈을 꾼다면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상반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의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몰리나가 매일 밤 들려주는 달콤한 자장가와도 같은 영화 이야기이다. 불 꺼진 차가운 감방에서 동료가 들려주는 영화 줄거리를 듣는 냉랭한 혁명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혁명가와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비주류 인물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상처받은 영혼들이 득실거릴 감옥에서의 사랑. 그렇게 발렌틴과 몰리나는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야,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주려고 하지 않거든.
진정한 친구란 두 육체에 담긴 하나의 영혼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스하게 전해지는 서로의 마음,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그것뿐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믿었던 두 사람은 비좁은 감방 안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눈다.
- 그리고 또 어떤 것을 느끼는지 알아, 발렌틴? 하지만 잠깐만, 더 이상은 안 할게.
- 뭐야? 말해봐……
- 잠시 동안 내가 여기 없는 것 같았어…… 여기에도 아니면 저기 바깥의 어느 곳에도……
- ……
- 내가 아예 여기에 없는 것 같았어…… 마치 너 혼자인 것처럼.
- ……
- 아니면,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지금…… 내가 너인 것처럼.
결국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발렌틴과 몰리나는 결국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 진정으로 영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맛본다. 마치 내가 너인 것처럼, 네가 나인 것처럼, 그렇게.
친구란 두 육체에 담긴 하나의 영혼이라 했던가. 그들은 물과 기름 같던 두 육체를 하나의 영혼에 담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벗어던진다. 편견과 이기심과 적대감, 심지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마저 훌훌 벗어던진다. 마음을 열고 영혼을 껴안는다는 것의 힘, 그것의 위대함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고귀한 것은 그 사람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려는 눈물겨운 노력 때문이었다. 지친 영혼의 혁명가를 눈물로 위로하던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말한다.
- 몰리나,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좋아하게 될 거야. 심지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도. ……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 겁내지도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너에게 약속을 지키는 거야, 네가 모든 추한 것을 잊게 하는 거야. 나는 오늘 아침에 그것을 맹세했어, 네가 어떤 슬픈 생각도 하지 않게 하겠다고. 난 약속을 지킬 거야…… 내 힘이 미치는 동안은, 최소한 이 하루만이라도…… 난 네가 슬픈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할 거야. …… 다른 것도 약속해줘. 사람들이 널 존중하도록 만들겠다고, 누구도 널 심하게 다루거나 착취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아.
통장에 10억을 두고도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없는 사람
동성애자라는 도덕적 수치심으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늘 자신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로 여기던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누구도 그를 심하게 다루게 두지 말 것을 약속해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석방으로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된 몰리나는 목숨을 걸고 발렌틴의 정치적 메시지를 그의 동료에게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정치적 행동을 실행에 옮긴 몰리나는 처참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의 막바지에는 감옥에 홀로 남아 고문을 받으며 끔찍한 빈사 상태에 빠진 발렌틴이 등장한다. 발렌틴은 모르핀의 도움으로 고문의 고통을 잊고 몰리나의 환상을 보며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금 마음의 휴식을 얻는다. 고통의 야릇한 환상 속에서 작가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잠들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다시 갈라놓지 않을 거에요. 왜냐면 우리는 가장 어려운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죠. …… 내가 당신의 생각 깊숙한 곳에 살고, 그래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이 결코 혼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
홀로 죽어간 몰리나와 고문을 받던 발렌틴은 외로웠을까? 그들의 삶은 처참한 실패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통장에 10억을 두고도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올 것이다. 겉만 맴도는 말과 허위의식만 가득한 제스처로 이루어진 ‘가짜 관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 보자. 당신에게는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 앞에서는 미친 듯이 울어도 흠이 안 되고, 때론 이유 없는 침묵도 이해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실수를 섣불리 비난하지도 않고 성공을 무턱대고 치켜세우지도 않는 사람. 진심으로 나의 성장과 발전을 기도해주고 함께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 당신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 릴케에게 루 살로메가 그랬듯, 하나의 문과 같은 존재를 가졌냐는 말이다. 그 문을 통해 넓은 들판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전에 표시해 두었던 나의 성장을 문기둥에 서서 다시 재어볼 수 있는 그런 존재.
언젠가 잡지에서 한 유명한 정신과의사가 쓴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자살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장된 우울한 우리 사회에서 그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 옆에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단 한 사람’말이다. 당신은 그 ‘단 한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그 단 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어떨까?
19세기 중엽의 위대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만일 한 가슴의 찢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당신이 누군가의 영혼을 진심으로 껴안아본 적이 있다면 당신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나눈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육사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신영복은 어느 날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파릇파릇한 청춘이 채 가시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20년이 지난 1988년이 되어서야 신영복은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를 하게 된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잔인하게 긴 20여 년의 세월이었다. 그 나날 동안 신영복은 감옥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사랑했을까. 무엇에 아파하고, 감사하고, 절망했을까.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있는 숲 속에 서다
이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겠지”라고 혼잣말을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어리고 말았다. 옆 사람을 저도 모르게 미워해져 버리기 때문에 겨울 징역을 택한다는 이 사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가도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서도, 죽음이 일상이 되는 수용소에서도 ‘벗’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그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는다’던 신영복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한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함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비를 맞아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본다. 아니, 함께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어본 적도 없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그런 날이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혹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꾳. 눈꺼풀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텅 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 한참을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어젖히면 나를 반기는 것은 스산한 어둠뿐인 그런 날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고,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렇게 외로움에 숨이 가파져 상처받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람은 모두 300여 명. 그러나 기역부터 히읗까지 몇 번을 오고가도 마땅히 전화를 걸어 가만히 내 외로움을 호소할 만한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건 혼자서 어둠뿐인 집안으로 걸어 들어와야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외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지금, 신영복은 말하는 것이다.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다고, 한 알의 물방울이 되기보다 바다를 선택하겠다고.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고, 함께 비를 맞으며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는 징역 사는 동안 풍치 때문에 참 많은 이빨을 뽑았습니다. 더러는 치과의 그 유리병 속에 넣기도 하고, 더러는 교도소의 땅에 묻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담 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 마디 말에서부터 피땀 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속에, 혹은 한 뙤기의 전답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 묻는다는 것이 파종임을 확신치 못하고, 나눈다는 것이 팽창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나의 소시민적 잔재가 치통보다 더 통렬한 아픔이 되어 나를 찌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언가를 서로 공유하는 것
아, 어쩌자고…… 나는 결국 ‘항복’을 외치고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올리고 말았다. 나눔의 의미를, 이웃의 의미를 이토록 절절히 알려주는 책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들 심신의 일부를 타인에게 나누는 과정이다. 힘이 되어주는 한 마디를, 피땀 어린 인생의 경험을, 타인의 마음과 마음에 심어놓는 과정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개의 나무 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우리들은 그렇다.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 등의 ‘진짜 관계들’을 무의식중에 끝도 없이 갈망하면서도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마음을 열어젖히길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상대방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길 원하면서도 내가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는 철저히 거부한다. 항상 아픔은 비공개로 해둔 채,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들만 전체공개로 해두고 적당히 나를 포장한다. 평생을 이런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깊이 사랑받고 싶고, 깊이 사랑하길 갈망하나 사방에 두꺼운 바리게이트를 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로움에 지쳐 결국은 외치는 거다. 역시 세상은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이라고. 아무도 필요 없다고. 다 가버리라고……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사업’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최고의 교실이라 생각된다던 신영복. 그로 인해 나눔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먼저 양손을 털고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갖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허울뿐인 관계들만 맺으며 가짜 인생을 살지 말자. 기적과 마법은 믿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했다. 당신의 삶에 그런 ‘진짜 관계들’이 많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런 관계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한 때에 한 사람만을 생각한다고 하셨다.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자. 함께 고민을 나누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인생을 살아선 안 되니까. 결국 우리를 반짝반짝 빛나는 천국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진정한 관계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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