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부엌에서 글쓰기 - 따듯한 요거트 스콘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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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가 나왔어요. 평범한 육즙 스프였어요. 안에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투명한 액체를 통해 접시 바닥에 있을지 모르는 무늬를 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무늬는 없었어요. 접시는 수수했어요. 이어서 쇠고기와 야채, 그리고 감자와 함께 나왔지요. 이 검소한 삼위일체는 질퍽한 시장에 있는 소의 궁둥이와 가장자리가 노랗게 오그라진 싹양배추,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값을 깎으며 흥정하는 망태기를 걸친 아낙네들을 생각나게 했어요. 제공된 음식은 충분했고, 탄광 광부들은 확실히 이보다 못한 음식 앞에 앉아있을 터이니, 인간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었어요. 말린 자두와 커스터드가 나왔어요. 커스터드로 기분이 좀 풀렸더라도, 말린 자두는 무정한 야채(과일이 아녜요)이며, 수전노의 심장처럼 힘줄이 많고, 80년 동안 와인과 안락함을 거부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도 나누어주지 않았던 구두쇠의 혈관 속에나 흐를 법한 액체를 배출한다고 누군가 투덜거린다면 세상에는 말린 자두조차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보아야만 해요. 다음에는 비스킷과 치즈가 나왔고, 물병을 아낌없이 쭉 돌렸어요. 비스킷이란 게 원래 건조한 것이지만 이 비스킷들은 속까지 별나게 팍팍했기 때문이지요. 그게 다였어요. 식사는 끝났어요. 손님이나 방문객이 “저녁식사가 영 별로였어요.”라고 말한다거나 “우리끼리만 여기에서 식사할 수 없었을까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 비슷한 말을 했더라면 낯선 사람에게는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럴듯한 집의 내밀한 경제 사정을 염탐한 셈이 되었을 거예요. 아뇨,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어요. 실제로 대화는 잠시 시들해졌지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틀은 본시 마음과 몸, 두뇌가 모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지 분리된 칸막이 안에 제각각 들어가 있는 것이 아녜요. 그건 백만 년이 지난다 해도 확실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양질의 저녁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예요. 식사를 잘 하지 않으면 생각도, 사랑도 잘 할 수 없으며 잠도 잘 들지 못해요. 소고기와 말린 자두로는 척추 속에 있는 등불이 켜지지 않아요.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소설이 아닌 강연집을 정리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 여성의 자유ㅡ몸의 자유보다 지적인 자유ㅡ에 대해 그녀 이전의 여류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 이야기와 위에서 인용한 남녀대학 오찬 메뉴의 차이점 등, 독특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여성들이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열쇠인 금전적인 자유(고정적인 수입)와, 혼자서 생각의 범위를 넓혀갈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이 책이 나온 뒤에 흐른 8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과연 그녀의 시대보다 더 성장했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여류작가가 글로써 자신의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뤄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대로 천천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강연회라고는 하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모양새가 강연 원고라고 하기보다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글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원효로 1가 구석은 놀이터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80년대 초 윤노파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골목이었고 출판사와 인쇄소, 철근을 자르는 공장들이 늘어서 있어 늘 시끄럽고 아이들이 놀 만한 놀이터 한 군데 없었던 곳. 가끔 철문을 잠근 출판사의 옆 담에 매달려 무슨 책이 나오나 구경하려다 아저씨에게 야단맞기도 하고 다른 인쇄소에서 제본하고 남은 두꺼운 파지들을 받아다가 가는 허리에, 눈에는 각종 도형들이 들어가 있고 가는 허리 밑으로는 드레스가 거의 180도로 펴지는 공주들을 그려 잘라 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낮고 넓었던 창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책을 읽었다. 놀 곳이 없었다는 것을 핑계 삼아 그때부터 나는 혼자 시간 보내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운 셈이다.
열 살쯤이던가, 장맛비가 연달아 퍼붓던 초여름 그 날도 그랬다. 살짝 어둡지만 책은 읽을 만했던 오후, 낡은 책장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버지니아의 책. 살짝 젖은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고 늘 그랬듯 창틀에 자리를 잡았다. 고모들은 항상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펜으로 줄을 그어놓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 펼친 그 책에도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었다. 밑줄이 특히 많이 쳐져 있던 책은 특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뭔지 모르게 멋있다고 생각했던 글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특히 루이제 린저, 전혜린, 프랑소와즈 사강, 이덕희의 책들에는 두세 번씩 그은 밑줄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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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세월이 꽤 지난 지금은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사촌조카들을 잘 대접하고 싶다는 핑계로 한창 식사 준비에 바쁜 메이드에게, 쪄서 시럽에 절인 생강을 사오라며 리치몬드에서 런던 가는 기차 시간표를 무표정하게 읊던 영화 속 니콜 키드먼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생강케이크를 구울 때나 스콘에 따듯한 생강 마멀레이드를 곁들일 때는 더더욱. 더불어 그녀 언니와 함께 이끈 지식인 클럽인 블룸즈버리Bloomsbury, 런던에 머물던 시절 대영박물관을 갈 때마다 스쳤던 러셀 스퀘어와 블룸즈버리 스퀘어가 있는 블룸즈버리 구역, 피카딜리의 포트넘 앤 메이슨에 진열되어 있었던 화려한 블룸즈버리 햄퍼Hamper도 더불어 생각난다. 절인 생강과 당밀, 각종 향신료 향이 풍기는 절임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포트넘스의 풍경보다 더 영국적인 게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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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우울하게 잠도 잘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담배만 연신 피워대는 장면을 보며, 항상 달콤한 생강을 차와 함께 곁들일 줄 아는 그녀가 왜 그렇게 우울해하고 고통스러웠을까, 궁금했다. 스스로가 다시 미쳐간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외투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강으로 들어가버린 그녀는 정말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고 치료받을 수 없었던 걸까? 달콤한 음식도, 통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헌신적으로 옆에 있어주는 남편조차 왜 그녀에게 불을 붙여줄 수 없었을까?
하지만 그녀 덕분에 지금까지 난, 내 척추에 불이 켜지는 순간들을 위해 살아왔다. 그때 버지니아의 글 한 구절을 읽었을 때 막연하게 느꼈던 척추의 열기, 그런 느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직업을 택하고, 결정들을 내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먹고 있는 음식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불을 켜줄 수 있는 존재인지 끊임없이 의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항상 뜨겁고 싶었기에 불이 꺼져가는 기운이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뭐든지 찾아 몰두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춤을 추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끝내 불을 다 피우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를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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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꽤 자신 있게 끓일 수 있는 밀크 티 맛 어때요?
이 정도의 쇠고기 요리와 말린 자두 콩포트라면 당신의 척추에도 불이 켜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기만의 방에 대한 글을 볼 때마다 뜨끔해진다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왔는데도 아직까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독립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욕심 없이 살면서 좋은 글만 쓰고 좋은 글만 보고 사람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에는 헤쳐 나가야만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고. 왜 세상은 이토록 발전하고 없는 것이 없다는데, 왜 80년 전 당신이 ‘제발 이 둘만이라도’라고 바란 것조차 가지지 못한 건지. 정말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일까 투덜거리는 내게 그녀가 해주는 대답은 항상 똑같다.
우리가 또 한 세기를 산다면ㅡ개인으로써 살아가는 짧은 일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인 공동의 삶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ㅡ그리고 각자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면, 자유의 습성과 생각하는 바를 정학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면,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벗어나 인간을 늘 서로와의 관계가 아닌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또한 하늘과 나무, 무엇이든지간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시야를 가려서는 안 되기에 밀턴의 악령을 간과해 버린다면, 매달릴 팔은 없지만 홀로 가며 우리의 관계가 단지 남성과 여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때 기회는 올 것이며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죽은 시인이 빈번하게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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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습성,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 이 두 가지야말로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인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사실, 지구 어디더라도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라면 곧 자기만의 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난 깨닫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 어떤 방보다 부엌 테이블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라는 것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느끼는 행복과 안정된 기분을 글을 쓰면서도 느낀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그 막연한 희망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버지니아의 글을 보고 그랬었던 것처럼, 나의 글로 누군가의 척추에 불을 붙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올까?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아니, 이미 기회는 가까이 왔고, 내가 아름답게 키울 일만 남았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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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가 알립니다.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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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간하신 것도 더불어 축하드리며..
그동안 글과 요리 잘 읽고 음미했습니다..고.맙.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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