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를 사랑한 우리 작가 한병호
2006.01.03

해치와 시작하는 병술년

안녕하세요. 여러분에게 그림책을 소개하는 엉뚱한 마녀가 이제 새해 인사를 대신해서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장을 펼치면, “하늘에는 어둠을 밝히고, 정의를 지키는 해의 신 해치가 살았어.“ 그림책 『해치와 괴물 사형제』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할아버지의 구수한 말투로 시작됩니다. 정의의 뿔이 머리 위에 솟아 있는 해치를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어두운 땅 속의 괴물들인 뭉치기 대왕, 뿜기 대왕, 던지기 대왕, 박치기 대왕 사형제는 심심할 때면 땅 위로 올라와 불장난을 하곤 했다네요. 어느 깊은 밤, 괴물 사형제는 해치가 밤에는 수평선 너머 바다 깊숙이에 해를 넣어 둔다는 것을 알고 해를 훔치러 바다 밑으로 내려갔어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자고 있는 해치의 곁을 지나 창고 안에서 커다란 해를 꺼내 쇠그물에 넣고는 다시 살금살금 빠져 나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세상에는 동쪽뿐 아니라 남쪽과 서쪽 북쪽에도 조각난 해가 떠 있고, 사람들은 ‘아 뜨거, 아 뜨거’ 후끈 달아오른 땅이 뜨거워 발을 땅에 딛지 못했답니다.

화가 잔뜩 난 해치는 “이놈들!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겠죠? 하지만 괴물 사형제는 콧방귀를 뀌고 막내 박치기 대왕은 “나하고 박치기를 해서 이기면 해를 내놓지”라며 겁도 없이 해치 앞에서 까불었답니다. 단단한 뿔을 머리에 갖고 있는 해치의 한 방에 털썩 쓰러질 것이면서 말이죠. 막내 박치기가 넘어지자 던지기, 뿜기, 뭉치기 대왕도 각각 해치와 맞대결을 했습니다. 네 차례의 맞대결에서 이긴 해치는 이글거리는 커다란 해를 되찾고는 자신의 입에 담아 세차게 해를 토해 냈습니다. 불벼락은 맞은 괴물 사형제는 꽥꽥 소리치며 땅 속으로 달아나 버렸지요. 해치는 그 날 이후로 밤에는 동해 바다 속에 있는 자신의 창고 문을 자물쇠로 단단히 잠궈 놓고, 잠에서 깨어나면 커다란 붉은 달을 바다 위로 밀어 올려준답니다.
정하섭님의 글과 도깨비 그림 작가로 너무나도 유명한 한병호님의 그림이 어우러진 『해치와 괴물 사형제』에는 미국 작가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속의 괴물들만큼이나 어수룩한 꺼벙한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괴물사형제로 형상화된 동물은 온순함의 상징인 소, 토끼, 개구리, 새인 것이죠. 동양화 기법으로 화선지 위에 채색과 아교 등의 혼합 재료를 사용해 그려진 익살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꺼벙한 괴물들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고, 두려워할래야 두려워 할 수 없는 친근한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책 나와라 뚝딱! 그림책 작가 한 병호는 왜 도깨비를 만드는가?
그림책을 시작한 이후 거의 해마다 한 종 정도의 도깨비 그림책을 낸다는 한병호 님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출판 미술 협회 전시회에 전공인 동양화의 특징을 살린 도깨비 일러스트를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책인 『도깨비와 범벅 장수』가 1992년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도깨비 전문가 한병호님을 찾아와 도깨비 그림책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게 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도깨비를 연구하며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살맞은 도깨비를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깨비 작가가 되기까지

도깨비처럼 밤에 일한다는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자 한 것은 그림책은 회화와는 달리 드라마와 같아서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한 바 있는 한병호님은 그동안 여러 전집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91년 테헤란 국제 그림 동화 원화전’ 및 프랑스에서 열린 ‘한국 어린이 그림 동화 원화전’에도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9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1967년 이래 유네스코의 지원 하에 격년으로 개최되는 ‘블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2005’에서 황금사자상(BIB Golden Apple)을 수상했습니다.
한강을 거슬러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병호님이 살고 있는 현리란 동네가 나옵니다. 새벽 두 세시까지도 환하게 밝혀진 탁 트인 창에는 ‘뚝딱 뚝딱’거리며 자신이 만든 도깨비상들에 둘러싸여 열심히 그림에 몰두 중인 마흔 중반의 멋진 작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 생활 도구들인 부지깽이며, 솔, 국자, 너까래, 인두, 풀무 등등이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고, 작가가 이런 저런 전통 생활 용기를 이용해 만든 도깨비 상들이 서있는 공간에서 작가는 낮보다는 밤에 작업이 잘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병호씨는 작업실에서 밤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걸어오는 심심한 도깨비들이 주런 주런 엮어주는 이야기를 말 대신 한 장의 그림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도깨비들이 깨어있는 밤을 밝혀야만 할테니까요.
한병호님이 생각하는 착하고 순박한 도깨비들

이제는 낮도깨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상이 남긴 단 한 편의 동화가 한병호님의 도깨비와 만나다


여러분들의 몫을 위해 전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는데요, 어쨌거나 『황소와 도깨비』는 황소의 뱃속에 들어간 꼬마 도깨비의 이야기는 신의를 지킨 꼬마 도깨비와 꼬마 도깨비를 도와준 따듯한 돌쇠의 인간미가 서로에게 이로움을 준다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동화입니다. 이상 선생님이 1937년 3월 "매일 신보“에 발표한 동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지요.
도깨비가 좋아하는 것 하나 - 호박범벅

“시끌법적 장날이야. 범벅 장수는 이른 새벽, 장으로 나갔어. 먹음직스러운 호박범벅을 만들어 가지고 말이야.” 여기까지 읽어주었더니, 조카가 한다는 말이 "어, 그럼 고모. 이거 산에서 호랑이 만났다는 ’떡 하나 주면 안잡아먹지?‘하고 비슷한 이야기야?"라고 물어옵니다. "가만있어봐. 여긴 호랑이가 아니고, 도깨비가 나오는거쟎아"’라고 핀쟌을 주며 책 읽어 주는 마녀인 저는 큰 소리로 “자, 따끈따끈 호박범벅 사세요! 혀에 살살 녹는 호박범벅이요!”라고 외쳤습니다. 조카는 재미가 들렸는지, 저한테 빨리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고 성화입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책을 읽어주는 마녀인 저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범벅 떡이 먹고 싶어 아우성거리는 도깨비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살스럽고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눈에 익숙했던 판형보다 기다란 서책 같은 『도깨비와 범벅 장수』를 펼치니, 그야말로 이야기꾼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도깨비 목소리로 "아, 먹고 싶다 호박범벅"하면서 배고픈 척 배를 움켜쥐고 도깨비 흉내를 내면, 조카도 재미있다는 듯, "아, 먹고 싶다. 호박범벅"하면서 따라합니다. 조카에게 읽어 주고 지친 저는 흰 엿가락을 입에 물고, 책을 다시 꺼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호박범벅 먹고 싶다" 중얼거리면서, 책장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화선지의 거친 느낌이 깔깔하게 손끝에서 만져집니다. 먹의 번짐이 느껴지는 수묵담채의 그림들은 민화를 보는 느낌 그대로입니다. 게다가 위 아래로 긴 느낌을 살려서, 길게 늘어선 시골 장터의 모습이며, 채색화의 느낌이 드는 울긋불긋한 산자락의 모습이 절로 "오호. 호박범벅이 정말 먹고 잡다"를 중얼거리게 됩니다. ‘나도 한 입만’, ‘입이 열 개라면 좋겠어!’ ‘쩝쩝’하면서 입맛을 다지며 호박범벅을 먹고 있는 다양한 표정의 도깨비를 보고 있으면, 저도 이런 도깨비를 직접 그려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됩니다. 하나 둘 모여드는 도깨비의 모습과 표정들, 하다못해 눈동자조차도 제각각이여서 도깨비만 쳐다보는 것으로도 넋이 나갑니다. 그런데요, 범벅 장수에게 금은보화를 준 도깨비 녀석들은 왜 이리 미련하고 멍청하기만 할까요? 장사꾼의 말에 속고서도 무작정 ‘호박범벅이 먹고 싶어!’라고 외치며 해꼬지를 해보지만 한심하게도 번번이 속고 마는 도깨비들을 보고 싶으면 차라리 도깨비를 도와주고 싶은 심정만 간절해지네요. "이런 멍청한 것들. 차라리. 너희들 방망이로, ’호박범벅 나와라, 뚝딱!'하고 외치란 말야. 쯧쯧."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것 하나 - 꼬꼬댁 꼬꼬

새 해 첫 날 밤에 나타나는 도깨비, 야광귀신
야광 귀신은 설날이면 사람들의 신발을 훔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을로 내려온다는군요.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은 새해 첫 날 밤에는 신발을 지키기 위해 신발을 숨겨 놓고 저녁 외출을 삼갔다고 하네요. 새 해 첫 날부터 신발을 잃어버리면 집안에 아픈 사람도 생기고, 돈도 잃고 복이 달아난다나요? 그런데 이 야광 귀신들은 머리가 정말 아둔한가 봐요. 구멍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슨 구멍이든 보면 그 구멍의 숫자를 세어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데, 문제는 머리가 너무 나빠 세던 숫자를 잊어버리곤 해서 세고 또 세고 하다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거죠. 어쨌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멍청한 도깨비들이 좋아하는 채를 문 앞에 걸어둔다는데, 정말 그런지 잠시 그림책을 보실까요?

위의 그림에서 키다리 도깨비가 호박에 구멍을 뚫어 숫자 연습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제대로 숫자를 알고 있는 도깨비는 없었으니 한심한 노릇이죠. 아래 그림에서는 사람들이 집 문에 걸어둔 체를 들고 서있는 키다리 도깨비가 구멍의 숫자를 셀 줄 몰라 꺄우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병호님은 도깨비가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을씨년스러운 겨울밤의 풍경을 살리고 사람들이 나타날 때에는 채색과 세밀화 기법을 이용해 인간 세상의 따듯함과 정겨움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야광 귀신을 표현할 때는 최대한 표정을 과장하되 배경은 단순하게 처리하여 초가지붕의 지푸라기까지 세심하게 그렸던 인간 세상과는 구별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이질적인 세상은 아주 멋지게 조화됩니다.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답은 바로 우리의 정서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도깨비를 보지는 못했지만, 도깨비 이야기는 무수히 들었던 우리들, 마당에 세워둔 빗자루가 사실은 도깨비라 밤이면 춤을 춘다고 겁을 주던 할머니의 품속같이 정겹고도 따듯한 정서는 우리 한국인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병호님. 병술년에는 어떤 모습의 도깨비를 보여주실건가요?
자칭 마녀인 저한테 도깨비들은 친구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병호님의 그림책 이야기로 병술년 첫 호를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제 친구들인 도깨비들 이야기만 그려주지 마시고, 올해에는 마녀 이야기도 그려주시면 안될까요? 예? 생태 그림책에 열중하실 생각이시라구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한병호님은 우리들이 잠을 자는 시각에 뚝딱뚝딱 열심히 그림책을 만들고 계실거예요. 이처럼 늦은 밤에도 깨어있으면서 작금의 우리나라 그림책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고 있는 여러 그림책 작가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녀가 우리나라 그림책에 바라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어지네요. 이제는 우리나라 그림책도 선악 구도를 위주로 하는 기존의 그림책에서 탈피하고, 지나치게 교육적 요소를 그림책 속에 담으려 하는 것에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병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림책 편집자도 작가도 독자도 다 달라져야겠지요. 우선 시장 규모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팽창했고, 질적으로도 많이 좋아졌으니까요. 그래서 한병호님처럼 ‘아, 도깨비의 작가’로 세계로 알려지는, 훌륭한 우주 그림책 작가가 많이 자리를 잡는 그런 병술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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