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나 유리 조각 따위의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 절창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절창』에는 상처에 손을 대 상대를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죠. 그리고 이 능력은 ‘오언’이라는 인물에 의해 폭력적인 일에 이용됩니다. “소설이란 축복받지 못한 존재들의 이야기”라는 구병모 작가는 이 저주와도 같은 능력을 통해 질문합니다. 오독과 왜곡 없이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가. 이토록 철학적 고민을 던지는 동시에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니, 『절창』은 순식간에 읽게 한 뒤 오랫동안 생각하게 하는 아주 힘이 센 소설입니다.
현실에서는 불행한 능력이겠구나
『절창』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독자 분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운데요.
책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큰 반응을 받는 일은 처음이어서요. 조금 더 있어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사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편집자님이 계속 ‘이건 된다, 된다(웃음)’ 하면서 마치 주문처럼 힘을 불어넣어 주시긴 했는데요. 제 성향이 워낙 뜨거운 잔이 있을 때 그걸 한 손에 잡지 않고, 살짝 손가락 끝을 대보는 스타일이에요. 아마 본격적으로는 다음 달에 있을 북토크에서 직접 독자 분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 현장에서는 좀 더 실감을 하게 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온라인으로 전해주시는 이야기들도 정말 감사해하고 있어요. 저는 물론, 편집부에서도 전부 모니터링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고요. 독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절창』은 목소리로 가득한 소설이죠. 인물들이 처음부터 청자를 향해 말을 하잖아요. 독자는 과연 이 목소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거듭 따져보게도 될 것 같아요. 이 방식을 선택한 데에 작가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소설을 쓸 때는 딱히 이 방식을 쓰면 이러한 효과가 나겠지, 같은 생각을 거의 안 해요. 그냥 본능적인 선택 같은데요. 워낙 그런 것에 약한 편이기도 해요. 체계적인 기획력 같은 것은 별로 없고, 거의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씁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면 그렇게 쓰는 거죠. 『절창』의 목소리 서술 방식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냥 이게 맞는 것 같았어요.
쓸 때는 그랬지만, 출간 후 비교적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된 뒤에 생각한 것은 있어요. 소설에 화자가 두 명이고, 청자도 두 명이잖아요. 화자는 중간중간 바뀌고요. 그 중, 첫 번째 화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요. 첫 번째 화자의 청자는 명시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어요. 이때의 청자가 누군지 혹은 이 청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등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채 화자가 다짜고짜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진행한 것은 첫 번째 화자의 진짜 목적을 소설의 어느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추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서술 트릭이 중요한 소설이 되겠다 싶어서 말하기 방식으로 이어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후에 해보게 됐어요.
말을 건네는 서술 방식을 선택한 뒤에 고민한 부분은 없었나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어요. 화자 두 명이 모두 여성이죠. 나이대가 서로 다르고요. 이들이 말을 하는 방식인데요. 자칫 제 말투가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화자 구분이 잘 안될 가능성이 있었어요. 고민 끝에 결국 화자 중 한 명인 ‘아가씨’의 화법을 굉장히 싸가지가 없게(웃음) 들리는 톤으로 선택했어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을 하는 식으로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화자가 누구인지 구분을 지어줘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무엇보다 말하기, 라는 서술방식이 서사와 얽혀서 아주 독특한 효과를 낳거든요. 화자의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타인의 상처를 통해 그 사람을 그대로 ‘읽어내는’ 주인공의 능력과 마찰을 일으키더라고요. 결국 마음 읽기와 책 읽기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도 되고요. 그러니 주인공 ‘아가씨’의 능력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 점에서 저는 답을 가지고 있긴 해요. 일단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타인들과 다른 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차이점이 축복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체적 우월함이나 예술적 능력이 아니라 『절창』에 나오는 것처럼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경우 그렇다는 것인데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는 무서워하겠죠. 귀신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그걸 보통 축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피하겠죠.
중세의 마녀사냥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마녀라는 것이 오늘날에나 재미있는 콘텐츠 정도로 인식이 되는 것이지, 그 시대에는 달랐어요. 예를 들어 잔다르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고,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도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했잖아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고찰할 것 없이 현실에서는 불행한 능력이겠구나 생각하면서 썼던 것 같습니다.
『로렘 입숨의 책』에 수록된 「누더기 얼굴」도 떠오르네요. 투명 인간이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에서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신기해하고, 지켜주겠다고 하지만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하게 되는 풍경이 펼쳐지잖아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였어요.
네, 그런 느낌과 비슷하겠네요. 비현실적인, 그러니까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과히 축복일 경우가 없다는 생각을 저는 기본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능력이 나쁜 일에 사용된다면
『절창』이라는 제목도 이야기와 함께 처음부터 같이 왔나요?
제목은요.(웃음) 이 제목을 찾는 데 한 4개월이 걸렸습니다. 저는 제목을 짓기 전에는 소설 쓰기를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요. 생각하는 것만 4개월을 한 것 같은데요. 제목 짓고 있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제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 와중에 제목이 오지 않아서 시작을 못하다니요. 왜 이렇게 제목을 찾기 힘들었을까요? 다른 후보는 없었어요?
후보랄 게 없었어요. 그냥 ‘상처에 손을 대서 상대를 읽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정도가 있었고, 그렇다면 어쨌든 상처와 관련이 있는 제목이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죠. 하지만 상처를 읽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서 단순하게 ‘상처 읽는 사람’ 같은 제목으로 가는 것은 제 방식이 아닌 것 같아요. 특별하지 않잖아요.(웃음) 때문에 상처에 관련된 특별한 말이 없을까 생각했던 거죠. 사전을 많이 찾아봤고요. 열심히 뒤진 끝에 가장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상처일 것 같아서 골라낸 말이 ‘절창’입니다.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9쪽)라는 문장이 지시하는 바가 아주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잖아요. 소설에 담긴 여러 질문 가운데 이 문장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절창』을 시작할 때, 작가님 마음에 떠올랐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써왔던 제 소설적 테마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마음 한쪽 구석에 두고, 언제라도 꺼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죠. 늘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한편 저는 소설을 쓸 때 흩어져 있는 메모 중 어느 것을 건져내면서 시작하는데요. 이번에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거리 정도로 시작했어요. 그냥 ‘상처를 읽는 사람’이었어요.
그렇다면 이 메모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얘기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누군가와 악수를 하는데 마음을 읽는다든지 상대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든지 사물에 손을 대면 거기에 스쳐 간 기억을 본다든지 하는 식의 사이코메트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꽤 있었잖아요. 반대로 영화 <사토라레>처럼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는 남들이 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설정도 있고요. 이것들은 일종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사이코메트리는 웬만하면 남들한테 도움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경찰의 수사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으로 흔하게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인물의 능력이 전적으로 나쁜 일에 사용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하고 생각한 거예요. 이 정도의 역발상, 발상 전환 수준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단순한 신체 접촉 같은 방식이 아닌 ‘상처’가 선택된 데에는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요?
나쁜 일에 사용되는 능력이라는 배경을 결정한 다음,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마음 읽는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를 결정해야 했는데요. 매개가 단순히 신체의 어느 부분이라거나 소지품이라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았어요. 보통의 일상에서 발생하기 힘든 일이면 좋겠더라고요. 물론 자주 다치는 활동을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일상에서 엄청 큰 자상이나 열상이 숨 쉬듯이 매일 생기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제한적인 조건과 매개를 상처로 결정을 한 건 그런 이유였어요. 결국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이 상처라는 매개가 결정되면서 정해진 것 같아요.
그것이 광대의 권리
제목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할까요? 인물의 이름 말인데요.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15쪽)하는 읽기 행위라는 생각과 주요 인물의 이름이 ‘오언(烏焉)’이라는 점 역시 무척 절묘했어요. 궁금했던 것은, "서로 모양이 지나치게 비슷한 까닭에 틀리기 쉬운 글자"라는 의미의 이 이름을 가져오면서 인물의 성격 혹은 인물 간 관계 등이 결정되었을지 혹은 그 반대였을지에 관한 부분이었어요.
이름은 나중에 왔어요. 평소에 사전을 자주 봐요. 사전을 보다가 단순히 모양이 예쁜 낱말을 발견해도 좋고, 의미가 인상적인 낱말을 봐도 좋아요. 그렇다고 제가 엄청나게 많은 낱말을 기억하면서 살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수시로 사전을 들여다보게 되는데요. 『절창』을 쓰기 위해 대략적인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 성격을 정한 상태에서 이 사람한테 이름을 붙여줘야 구체적으로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또 사전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름이 ‘오언’이었죠. 인물 성격이나 관계나 이야기의 흐름 같은 것들이 굵직하게 잡혀 있는 상태에서 이름을 주고 나니까 좀 더 구체적이고 선명해졌어요.
그런가 하면 다른 인물들에게는 이름을 안 주셨거든요. 어떤 이야기든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선택에도 작가님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평소에 이름 짓는 것을 싫어해요.(웃음)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위저드 베이커리』의 화자가 ‘나’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의 이름이 안 나오죠. 당시에 북토크를 하면, 화자에게 왜 이름이 없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보시더라고요. 지나고 나서 생각한 것이, 한국 단편 소설에는 이름이 명시된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였어요. 단편 소설에서 인물의 이름을 묻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스토리 흐름이 분명한 장편 소설에서는 꼭 인물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의문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이름 짓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이름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고도 생각하고, 있으려면 인상적인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파과』의 ‘조각’ 같은 이름이 그렇게 나오는 거죠. 『네 이웃의 식탁』을 쓸 때 괴로웠던 부분이 반드시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사람이 여러 명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이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어서 조금 힘들었고요. 한편으로 『절창』은 두 여성의 서술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굴러가는 이야기고, 소설의 분량에 비해 등장인물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선택과 집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인상적인 단 한 명의 이름을 남기자고요. 두 화자는 각자 자신의 얘기를 하니까 이야기 속에서 이름이 나올 일이 많지 않기도 하고요. 어설프게 보여주는 것보다 아예 안 보여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지었다면 모를까. 아니, 보통 애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긴 하지만 오언은 내 부모가 아니잖아. 부모 이상으로 많은 걸 주었는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 그러니까 선생님도 되도록 나를 이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줬으면 해. 그냥 학생, 이래도 되고. 아예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이름만 따로 지어준대도 환영할게. 어차피 이름이란 몇 개 음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원한 적 없을뿐더러 때로는 당혹스러울 뿐인 약속의 표기에 불과하니까.”(157-158쪽)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결정”(124쪽)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 부분을 오히려 곰곰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해요. 가령 아가씨가 오언에게 연락하기 전 그 일 년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째서 오언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아요. 화자의 취사선택과 청자의 오독 가능성이 뒤섞여 독자가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무척 넓어지는 이야기가 된 것도 같습니다. 이런 공간을 만들면서 작가님은 어떤 기대를 하셨나요?
소설에도 등장하는데요. 오랜 옛날 광대는 자기가 집중하고 싶은 장면을 부각해서 이야기를 전했어요. 이야기 흐름과 크게 상관없는 대궐의 진수성찬을 자세히 묘사하는 식으로요. 그것이 세상에 여러 버전의 이본이 존재하는 이유고, 그것이 광대의 권리이고, 또한 광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해요. “내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결정으로써, 아가씨의 최소한의 인격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략) 이것은 나의 결정입니다.”(124쪽)라고 썼는데요.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분들은 오언이 왜 마음을 설명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반드시 가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이유는 광대인 제가 그러기로 선택을 한 것이죠. 소설이라는 게 동전을 넣으면 재밌는 이야기를 토해내는 자판기 같은 게 아니고요. 소설을 문학으로 완성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선택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하는 대목을 넣었어요.
“그건 상처에 닿아서 생각을 알아내는 것 이상으로 놀랄 만한 일이지 않아? 어쩌면 타인을 읽어내는 행위는 세상에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해 왔을 때부터 생래적인 능력인 거 아닐까. 나는 그게 조금 더 예민하게, 그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발달했을 뿐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186쪽)라고 인물이 말하는 대목도 나와요. 그런 장면에서 소설이 소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제가 의사소통을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소설 전체를 통해 의사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요. 평소 저의 기질적인 문제로 인해 불가능성 쪽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긴 해요. 다만 경험은 있죠.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이 같이 늙다 보니까 물건이나 장소,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고유 명사를 자꾸 까먹어요. “우리 저번에 갔던 데 있지” 하면서요. 재미있는 건 그러면 서로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어느 장소인지 명시하지 않아도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대화를 하는 거죠. 이렇게만 말하는데도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걸 보면서 이것은 함께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친밀한 관계에서 흔히 있는 일인가, 생각할 때가 있기는 했는데요. 그런 경우를 제외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저는 썩 낙관론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하고 오독하지만
다양한 고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요. 오언의 집에서 감시를 당하며 지내는 아가씨 설정은 『푸른 수염』의 변형처럼 읽히기도 하고요. 인물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거듭 대화하기도 하잖아요. 이러한 연결을 통해 작가님께서 해보려고 하셨던 것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 고전과 신화는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요. 아주 당연하게 말이에요. 그래서 틈날 때마다 고전이나 신화를 서랍에서 꺼내 인용하는 것이 결코 어색하거나 작위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렇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오늘 어떤 뉴스가 있었다고 해볼게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옛날에 <무한도전>에서 이것을 예언했다고 하잖아요. <무한도전>에는 없는 게 없다면서 다양한 밈을 활용해요. 실은 진짜 예언한 게 아니죠. 그만큼 오랫동안 방영한 장수 프로그램이고,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담았기 때문이거든요.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을 예언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일 뿐이에요. 즉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는 반복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고전과 신화, 역사도 반복되고요. 제가 쓰는 소설도 결국은 고전과 신화가 원형일 수 있다는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낸 거예요.
상호텍스트성에 의지하는 게 어떻게 보면 제 소설의 기본적인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특히 셰익스피어라는 존재와 함께 화자 한 명이 독서교사라는 설정, 그리고 집 안에 큰 서재가 등장하는 장치 등으로 특히 더 많이 쓰인 것처럼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그의 영화에 악당이 남의 집에 쳐 들어가서 거기 있던 남자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장면이 있거든요. 악당은 총질을 하기 전에 성경 구절을 하나씩 읊어요.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저 사람에게는 신앙심도 없을 텐데 왜 성경 구절을 읊을까, 하고 딱히 생각하진 않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생각을 딱히 안 하는 이유는 악당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냥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고요. 이곳이 영국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충분히 말이 되고,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일단 무척 재미있고,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에요. 반전과 결말까지 깊은 여운을 주는 이야기였어요. 특별히 작품을 쓰면서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결말은 정해져 있었는데 이 결말을 어떻게 이끌어낼까 하는 부분에 조금 고민이 있었어요. 중간 이후에 반전이 있고요. 그 반전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있잖아요. 그 부분이 고민이었죠. 충분히 박진감 넘치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럴듯함이 덜 하다고 느끼실 수 있으니까요. 특히 미스터리 작법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끼실 것 같아 고민이 됐는데요.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보다 더 설득력 있는 과정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저는 단어를 발굴하고, 배열하고, 몇 가지의 인상적인 문장을 통해 사유를 펼치는 데에 특화된 작가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본격 서스펜스나 미스터리, 스릴러와 같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님들만큼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소설을 읽다 보시면 느끼실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경찰, 수사관 같은 구체적인 단어를 하나도 쓰지 않았어요.(웃음)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최대로 나오는 단어가 ‘수사’나 ‘절차’ 같은 정도예요.
미스터리, 추리, 서스펜스, 스릴러 계열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건 관련 용어들은 안 하는 것이 이롭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웃음)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왜곡이 전제되는 것이라면 작가로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그냥 독자 영역이라고 확 생각해버리는지, 아니면 오독의 가능성을 낮추려고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독의 가능성을 낮추고 싶어서 노력하는 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독 자체는 필연적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인간은 언제나 상대를 오해하고 오독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계속 시도하는 본능이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아요. 한편 때로는 소설을 써 나갈 동력을 상실할 정도의 치명적인 오독도 있거든요. 그것은 제가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작가님의 작품을 만날 때마다 하게 되는 생각은 작가님은 이번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작가님께서 어떤 소설적 관심이나 소설적 고민을 갖고 계신지 질문하고 싶어요.
2021년에 장편소설 『상아의 문으로』를 출간했는데요. 그때 한 생각이 이 소설로 제가 해보고 싶었던 시도는 다 해본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이 소설을 쓰려고 소설가가 된 것 같다고요. 이후 2024년 1월에 중편소설 『단지 소설일 뿐이네』를 발간했어요. 그 책을 내면서 닿고 싶은 곳에 다 닿아보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번 장편소설 『절창』을 쓴 뒤에는, 다음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