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대하여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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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오만과 편견』의 새 번역본을 샀습니다. 집에 이미 정음사에서 나온 옛 번역본이 있지만 조 라이트의 영화를 보고 나자 새 번역을 읽고 싶어졌어요. 사실 오화섭 번역본은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습니다. 1장에서 베넷 부인이 뻔뻔스럽게도 “비행기 태우지 마요!”라고 예언적인 선언을 하는 걸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었죠. 이어지는 오역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출사표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지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못하고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어쩌고저쩌고….”

맞는 말일까요? 글쎄요. 적어도 민음사가 새로 낸 번역본들은 이전 정음사나 을유사의 번역보다 더 정확하고 현대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상대적으로는요. 제가 어렸을 때 밤을 새워가며 읽은 동서추리문고의 번역은 지금 와서 보면 어색하고 성차별적이고 중역 티가 나며 원작을 읽지 않아도 오역인 게 분명한 문장들이 부글거립니다.

그러나 일반론으로 받아들이면 조금 아쉬운 발언이기도 합니다. 결국 번역이란 몇십 년밖에 통하지 않는 일회용에 불과하다는 말이거든요.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다른 방향으로 틀겠습니다. 정음사나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일본식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테스』『햄릿』과 같은 뻔한 작품들을 끝도 없이 우려먹은 따분한 서재 장식용 벽돌을 떠올립니다. 그건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책들의 작품 선정이 그렇게 뻔했을까요?

한번 검토해봅시다. 정음사의 전집은 아직도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주락」이나 플로베르의 「성 앙트완느의 유혹」,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프랑스 희곡들의 번역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소스입니다. 을유문화사에서는 골즈워디의 『포사이트 연대기』나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묵시록의 네 기사』, 사빙영의 『여병자전』과 같은 책들의 번역을 제공해주고 있고요. 다른 문학전집으로 눈을 돌리면 이보다 더 흥미로운 책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로 전 어렸을 때 정음사의 오스카 와일드 선집만 읽고 원서 때문에 버벅거리는 영문학과 애들에게 온갖 유식한 척을 다 한 적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낡아빠진 책이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나 「착실함의 중요성」과 같은 희곡들을 담고 있는지 몰랐단 말이에요.

번역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정보는 수집되고 누적되어야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누적은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도서관 문화가 형편없고 번역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지요. 이런 빈약한 번역 자료들을 찾다 보면 종종 어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린 몇천 년 동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나라입니다. 당연히 상당량의 번역 자료들이 쌓여 있어야만 해요.

하지만 어떤가요? 실제로는 그 뻔한 『서상기』의 번역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책들의 번역본을 읽으려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저 먼 도서관까지 가야 해요. 위에서 제가 언급한 정음사나 을유문화사의 책들도 마찬가지. 요새 새로 지은 도서관엔 있지도 않더군요.

언제나처럼 전 결론 없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에 대한 해답 같은 건 몰라요. 도서관 전산화와 같은 기술적 대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번역의 질이 높아지고 번역체가 안정된다면 번역물의 수명이 길어질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건 절대적인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원래 만병통치약과 같은 건 없으니까요.

저보고 말하라면 일단 과거의 그 낡아빠지고 고루한 세계문학전집들에 기회를 한 번 더 주라고 말할 겁니다. 사람들이 벽장 장식용으로 사들인 뒤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그런 책들에 흥미로운 작은 통로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한번 확인해보라고요. 하지만 그러려면 제대로 된 도서관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동네 대여소는 절대로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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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메라

2007.02.04

글쎄요~제 생각에는 이렇게 투덜거리듯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좀 더 개선될 수 있는 여지라는 것이 생긴다고 봅니다. 더욱 근거가 있는 타당한 투덜거림은 말입니다.우리 나라의 도서관 문제는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겨우 10여년 전에 나온 <계몽사>의 세계문학 전집에는 "두도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번역은 형편없었지만...당시 양장본으로 출시된 이 열여섯권짜리 전집의 광고는 각 잡지를 수놓을 만큼 엄척난 것이었습니다!그렇지만 지금 눈씻고 찾아봐도 고작 10여년전에 출간된 세계문학 전집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은 단 한곳도 없어요!!정보는 수집되고 누적되어야 한다는 말에 깊히 공감합니다!당시 그 정보의 옳고 그름을 둘째 치고라도 말입니다!평가는 어짜피 세대마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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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나드

2006.04.05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오래전부터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번역되었던 [신곡]을 읽다가 머리가 돌아 버리는 줄 알았었죠. 원본을 그대로 번역한덕에 지금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중세이 단테와 일주일간 씨름 했답니다;; 분명 번역은 현실의 언어생활과 문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겠죠..=_=a(이상한나라의 엘리스 읽다가 피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시대의 번역본들도 재미있더군요. 언제 번역했느냐에 따라서 글맛이 달라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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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efall

2006.04.04

이번 글 참 동의합니다. 제인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이 집에 있는데 한 번 읽고 책장 귀탱이로 던져버렸습니다... 정말 번역 엄청나더군요. 국내에 번역본 딱 하나 있는 <로빈슨 가족의 모험>은 재미있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영어참고서에서 교과서 문장 번역해놓은 딱 그 느낌이더군요. 책 읽는 내내 원본을 구해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만드는... 외국에서 노벨상을 타는 대다수의 해외문학이 원문보다도 맛있는 번역 덕을 많이 본다지요. 흑흑.. 표지 디자인에 신경쓰는 것보다 번역의 맛배기에 더 신경써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좋은 고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두도시 이야기>는 1년 전까진 구할수도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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