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잘못하는 사람이 되는 일
하은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가 만든 것들에 잠에 관련된 이미지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있었군요. 잠시 김사월의 도망자로 돌아가 보면, 그 노래의 ‘당신’도 누구를 두고 떠나니까 도망자겠죠? 그렇다면 그는 되게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줄행랑을 치고 있는 사람이니까. 뭔가 잘못한 사람이니까. 노래 속에도 ‘용서’라는 키워드가 나오는데요, 도망자는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안담 용서가 너무 하고 싶어서 용서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고, 용서를 너무 받고 싶어서 용서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은빈은 어느 쪽인가요?
하은빈 제가 2015년에 황정은의 「웃는 남자」라는 단편소설을 읽었어요. 그 단편의 주인공인 ‘d’를 지금도 자주 생각해요. d의 연인은 dd인데, 어느 날 d와 dd가 동승한 버스에서 사고가 나요. 그 사고 이후로 d는 자기가 사고의 순간에 dd를 잡지 않고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끈을 꽉 쥐었다는 사실,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저 방에 머무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삶을 살거든요. 방에 아무 사물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벽지까지 전부 뜯어 없어질 때까지. 내가 왜 이 소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걸까? 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잘못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남은 삶을 그 사건에 저당 잡히게 된 것이고요. 오래전부터 저는 저에게 그런 일이 이미 있었거나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느꼈던 것 같아요.
안담 근데 이 책 안에서 한 번도 은빈이 용서의 주체가 되는 걸 보진 못했어. 속죄라면 언제나 은빈이 속죄하는 쪽이고, 용서라면 은빈이 용서를 구하는 쪽이지, 한 번도 용서를 하는 쪽은 아닌 거예요. 저도 그렇거든요. 일종의 죄의식 과잉이랄지?
하은빈 그 부분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인 것 같아. 마치 나는 사과받을 일이 없는 것처럼, 납작 엎드리기만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안담 우리가 그런 말들을 하잖아요. 잘못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근데 이런 공통점에 기대어서 모두가 연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잘못 앞에서는 사람들이 되게 단호하게 그 선은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 선이란 건 누구에게나 있고 각자 다 다르고요. 잘못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은 하고 살면 안 되지! 이렇게 전선이 갈라지게 되는데요. 그래서 거꾸로 은빈이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누구를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든가.
하은빈 너 그렇게 사람 무시하면 안 돼, 이런 마음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제가 무시받았을 때 드는 생각이라기보다, 내 옆 사람을 누가 무시한다거나 멸시한다고 느낄 때 엄청 화가 치밀어요. 근데 그건 우와 있을 때 항상 하던 경험이거든요.
안담 그럴 때 은빈은 “핏불테리어가 되어서 으르렁”거렸다고 책에도 나오죠.
하은빈 네. 이 사람들이 뭐 휠체어 타고 있으면 말도 못 하는 줄 아나, 사람이 말을 하면 흠칫 놀라면서, 마치 이 사람에게도 지적 능력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이…물론 지적 능력으로도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지만, 지적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나의 장애 이미지가 과잉 대표되는 거, 그래서 장애와 맺는 다양한 관계들이 하나도 조명이 안 되고, 장애가 결함으로서만 해석이 되는 거. 그런 은은한 무시를 받는 게 너무 화가 났었고 지금도 그게 제 버튼이에요.
안담 지금 그렇게 말하기를 저어하고 있는 거죠? 장애인을 향한 멸시에 대응해서 이 사람도 똑똑하고 지적이고 능력 있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지는 않은 거죠.
하은빈 맞아요.
사진 : 표기식
감히 쓰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까
안담 근데 그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그게 저평가든 고평가든 간에 정확한 사실이 아니잖아요? 분노할 만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대화를 나누면서 의식하는 어떤 커뮤니티가 상당히 비슷함을 느껴요. 그 안에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윤리와 도덕을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면서요. 그런 압박을 느끼는 게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분필로라도 선을 그어야 놀이가 시작되듯이,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건 어떤 제한이니까요. 그럼에도 이런 제한이 때로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인데요. 가령 장애 당사자가 아니면서 장애에 관해 말하는 작가를 더 엄하게 의심하는 시선이 있음을 분명히 알긴 아는 거죠. 은빈이 생각하기에 감히 쓰지 말아야 할 것, 또는 섣불리 쓰지 말아야 할 것, 이런 게 있을까요?
하은빈 근데 어떤 영역을 세속화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게 장애이든, 빈곤이든, 퀴어 섹슈얼리티든, 금기시되거나 성역화된 무엇이 있다면 오히려 그걸 좀 저급한 영역으로 끌어내려서, 발에 채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게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래야 좀 균형이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안담 닳고 닳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이야기는 슬프게도 너무 손을 안 탄다.
하은빈 그렇죠.
안담 그리고 하나의 주제를 성역화할 때 큰 문제가 생기죠. 그 주제로 하는 얘기가 재미가 없어져요.
하은빈 맞아. 장애인권 동아리를 할 때 우리의 큰 이슈가 장애라는 이 성역화된 주제를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 것이냐였어요. 그래서 같은 학교의 퀴어 동아리인 큐이즈에서 만드는 문집 ‘퀴어플라이’가 엄청 의식이 됐어요. 퀴어플라이는 이미 발행 역사가 유구한 문집이었고 되게 재밌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문집인 디스에이블은 퀴어플라이보다 훨씬 재미가 없어! 이런 자조가 우리 내면에 있었어요. 장애 얘기는 어떻게 재미있게 하지?
안담 퀴어들은 막 가죽옷 입고, 젠더 구부렸다 폈다 하고, 여러 사람이랑 자고 이런 재밌는 얘기 해주는데.(웃음)
하은빈 그러니까. (웃음) 그때 두 동아리를 같이 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퀴어플라이 회의에 가서, 근데 퀴어는 (장애보다) 섹시한 것 같아요, 이런 얘기를 했대요. 장애보다에 괄호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아무튼 그랬더니 누가 “퀴어가 섹시해요?” 이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그게 제 안에는 우리 문집에 대한 반전된 질문으로 남아있었어요. ‘장애는 안 섹시한가?’ 그런 질문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장애에 대해서 더 매력적이고 더 고유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또 우리 문집의 중요한 한계로 지적되어 온 것이, 퀴어 동아리와 달리 우리 동아리에는 당사자들이 많이 없었어요. 장애 당사자 학생들이 훨씬 적었죠. 동아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계속해서 윤리, 옳음, 인권의 문제로만 장애에 접근하는 경직된 흐름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죠. 허리가 곧추서게 되는 방식으로. 근데 이걸 좀 눕히고 싶었어. 어떻게 자빠지게 할 수 있지? 어떻게 문집을 더 다채로운 색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죠.
안담 근데 소수자로 사는 일이 그래서 이중으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퀴어로 사는 일이든, 장애인으로 사는 일이든, 여성으로 사는 일이든, 어떤 종류의 규범적이지 않은 삶이 안 그래도 피곤한데, 거기다 막 전복도 해야 돼, 전유도 해야 돼, 그러면 머리 아프잖아요. 어쨌든 내 삶을 가지고 예술하려면 전보다는 적극적으로 뭘 하긴 해야 한단 말이죠. 그냥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더 매력적이어라, 더 섹시해라, 그런 요구가 억울했던 적은 없나요?
하은빈 오히려 반대가 억울했던 것 같아. 아름다우려고 하지 말라는 말에 반감이 들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장애에 관해서도 그렇고, 제가 여성으로서 느끼는 수치도 비슷한데요. 저는 저한테 ‘뭔가 연출하네, 아름다우려고 하네, 뭘 자꾸 하려고 하네, 그렇게 하지 마’ 이런 종류의 피드백이 직간접적으로 주어졌을 때 수치심을 느꼈어요. 어떤 매력 또는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그쪽으로 가려는 누군가에게, ‘너네는 그런 주체는 아니지, 미라는 문제에 있어서 주체는 아니지’라고 말하는 인식 내지는 느낌에 강하게 저항하고 싶었어요.
실패의 수행에 도달하는 몸짓들
안담 김원영 작가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 생각이 안 날 수 없는 이야기인데요.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에서 김원영 작가도 장애와 매력에 관계에 대해서 쓰죠. 그 사람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를 욕망한다는 진술도 의심스럽고, 그 사람의 장애’만을’ 욕망한다는 진술도 의심스러운 가운데, 김원영 작가는 결국 한 개별 존재가 가진 몸이라는 실재 그 자체를 향한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로 도착하는데요. 그런 사랑 속에서 어떤 몸의 아름다움이란 “초상화 그리기”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서사의 농축을 통해서 복합적으로, 또 총체적으로 포착돼요. 그리고 바로 이 장에서 은빈의 글이 인용되지요. 김원영 작가와는 긴 시간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아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하은빈 원영은 처음에는 학교 선배로 만났고, 그 다음엔 옆옆집에 사는 이웃으로 지냈어요. 저와 우, 그리고 원영이 살았던 가족생활동 앞에서 원영이 막 나온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선물해 주셨던 기억이 나요. 인용됐다는 게 되게 기분 좋기도 하고 그랬는데. 동료가 된 것은 사실 훨씬 근래의 일이에요. 특히 2020년에 원영과 저 모두에게 중요한 작품인 <무용수-되기>라는 작품을 프로젝트 이인과 같이 만들면서 동료가 되었고, 이후에 손나예 안무가와 셋이 함께 하는 워크숍을 여태 해오고 있고요. 저에게 원영은 장애와 미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앞서 제시한 사람이기도 해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안담 두 창작자 모두 무용에, 움직임에 큰 관심이 있죠. 장애와 무용의 관계에 대해서도요. 마침 우리가 있는 공간에 안무가 제롬 벨의 공연 <갈라>의 포스터가 거짓말처럼 붙어있어요. 은빈이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이 작품을 왜 좋아하나요?
하은빈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실패에 있어서, 어떤 수행의 실패와 실패의 수행은 좀 다른 것 같고 저는 후자에 관심이 있어요. 예를 들면, <무용수-되기>의 무용수였던 원영이 연습에서 언젠가 내가 욕망하는 것은 심리스한 상태다라고 얘기했었거든요. 그리고 이 몸이 그러한 심리스함을 가지지 않았다면 환경이 그것을 만들어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했었어요. 가령 휠체어를 탄 어떤 무용수의 몸이 아주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세팅된 무대란 어떨까, 거의 미끄럼틀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들을 만듦으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안담 스케이트 보드 대회장처럼 말이죠.
하은빈 네. 그런데 사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덜컹거릴 수 있을까, 매끄럽지 않고, 뭔가 삐꾸나는 이 순간이 어떻게 흥미로울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을 두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몸의 불완전성과 유한함이 아무리 좁혀도 좁힐 수 없는 무엇이라면, 바로 그 조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할 순 없을까? 전혀 심리스하지 않은 어떤 상태, 그런데 그게 어떤 수행에 실패해서 도달해 버린 상태인 것이 아니고, 어떤 실패를 수행했기에 도달하게 된 상태면 좋겠다.
제가 <갈라>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작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스코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갈라>의 출연진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 무용수가 다 섞여 있어요. 캐스팅 오디션에서 이들에게 안무가가 했던 유일한 질문은 “당신이 가장 즐겁게 춤출 수 있는 안무를 보여달라” 였어요. 정말 즐거운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들을 뽑은 거죠. 이 공연의 후반으로 가면, 퍼포머들이 한 사람씩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와요. 그 사람이 오디션 때 틀었던 그 음악이 나오죠.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기 춤을 열성적으로 추기 시작하고,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따라가야 해요. 그게 스코어의 전부예요. 아주 가관이죠. 왜냐면 보깅을 추는 너무 섹시한 게이 남성도 있고, 훌라후프를 돌리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이 훌라후프를 공중에 던지면 다 같이 던져야 되고, 그러면 훌라후프가 이리저리 튀고…난리가 나거든요.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요. 그 난리법석을 보는 게, 그러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고 그 실패를 흥미롭게 만드는 게 이 공연의 성취인 거죠. 모두가 성공의 순간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면 그 성공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방향으로 전환해보자. 그때 생산되는 사람들의 당황한 얼굴이나 허둥대는 움직임들이 잘 통제된 움직임보다 훨씬 재미있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에 삐져나온 무엇이 모종의 진실성, 또는 아름다움과 접촉하는 순간들이 있는 거예요. 애초에 잘할 수 없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의 삶이 그를 사랑하듯
안담 마지막 질문이에요. 은빈은 많은 일을 해요. 글을 쓰고, 공연을 하고, 글방을 운영하고, 노래를 짓고 부르기도 하죠. 어떤 예술을 하는 데 있어서 제게 중요한 질문은 그것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인데요. 가령 저는 춤을 좋아하지만, 저한테 춤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 하면 그건 모르겠어요. 그래서 춤은 취미로 즐기는 영역에 있죠. 은빈은 글쓰기로 하고 싶은 말, 공연으로 하고 싶은 말, 노래로 하고 싶은 말이 다 다른가요?
하은빈 음, 저한테 노래는 아직까지 완전히 취미의 영역이라서 노래로는 어떤 말을 하면 좋지만 굳이 안 해도 돼요. 그러니까 내 노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고,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가닿는다면 고맙지만, 노래로 뭔가를, 또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안담 은빈은 노래가 왜 좋은가요?
하은빈 글은 독자를 의식해야 하고, 공연은 관객을 의식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노래는 그냥 저라는 청자만 생각해요. 물론 다른 이들에게 좋으면 좋은데, 그건 그거고 노래는 내가 나랑 하는 공연이에요. 그래서 즐겁고요. 한편 글이나 공연은 좀 달라요. 저는 보통 우리의 결함이나 한계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어떤 전복적인 가능성까지 지니지는 않더라도, 그 한계 안에서 머무르면서 불시에 찬란하거나 아름답거나 내지는 이상해지는 순간들을 보고 싶어요. 공연으로는 그걸 재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글로는 그걸 증언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안담 그런 질문이 생기네요. 그냥 말하면 되는데, 왜 예술로 할까요?
하은빈 믿게 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경험을 주고 싶은 것 같아요. 근데 말은 경험의 표면에 불과할 때가 많잖아요.
안담 그래서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죠.
하은빈 맞아요. 아주 쉬운 답변으로는 말로 다 못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안담 저도 그 아이러니를 좀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말하고 싶으면 말하면 안 된다는.
하은빈 그리고 어떤 말이 그 글을 쓰거나 그 작품을 창작하고 난 이후에야 탄생할 때가 있어요. 사실 내가 말로 하고 싶은 바로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글방에서도 몇 번 말했는데,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항상 로베르트 발저의 표현을 인용하여 대답하게 돼요. “내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들만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받을 이해와 사랑을 위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나의 쓰기라고. 그런데 공연에 대해서도 그 문장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바꿔 말하면 공연도 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사랑, 경애의 표현이고, 결국에는 내가 누릴 이해와 사랑을 위해 먼저 발화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욕망이 제게 있지 않나.
안담 은빈은 아주 다양한 통로로 이 세계를 사랑하네요. 그렇다면 발저를 변용하여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어요. 이 세계도 아주 다양한 통로로 은빈을 사랑한다고. 마침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의 마지막 문장도 이렇지요. “은빈의 삶이 은빈을 사랑하듯, 우의 삶이 우를 사랑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큰글자도서)
출판사 | 사계절
우는 나와 우는 우는
출판사 | 동녘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