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직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의 자기고백, 혹은 환상 - 『호에로 펜』
2003.10.15

하지만 당장 내일까지 뭔가 작품을 완성해야만 한다면? 자기 내키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 때 그 때 대중에게 공개한다면 좋겠지만 자본주의 하의 대중예술가들에게는 그런 호사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감독은 일단 크랭크 인에 들어가면 계획대로 촬영을 하고, 개봉일정에 맞추어야 한다.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면, 소설가 역시 그런 마감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만화가는 어떨까? 조금 알려지기 시작한 만화가라면 대개 2, 3개 정도의 만화를 함께 그린다. 한국은 워낙 열악한 상황이라 점점 잡지가 사라지고 있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주간지도 있고, 격주간지도 있고, 월간지도 있다. 다른 내용의 만화를 주마다 바꿔가며 그려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화가가 주변에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 만화가의 생활은 꽤 흥미로운 것이다. 인간성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들의 생활 자체가 무척 다채롭다. 그런 이유로, 만화가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 김나경의 『사각사각』, 요고 유키의 『코믹 마스터 J』 등이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이다. 『사각사각』은 만화가의 작업실 내부 풍경은 물론 편집기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소동 같은 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그림은 사실적이 아니지만) 반면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은 만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과 그를 사랑하는 역시 만화가 지망생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만화가의 꿈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고통까지 함께 그려낸다. 『코믹 마스터 J』는 곤경에 빠진 상황을 환상적으로 해결하는 어시스턴트를 주인공으로 묘사한, 다소 황당한 만화다.

하지만 일을 도와줄 어시스턴트가 자전거로 달려오다가 부상을 입은 후에 하는 말이 “좋아! 오른손은 안 다쳤다”이고, 전대물의 대사에 감동을 받아 자료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살인현장을 목격한 후, 겨우 범인을 잡은 다음, 힘들어하는 어시스턴트에게 호노오가 던지는 말은 ‘진정한 히어로가 되는 것은 지금부터다’이다. 늘 상황은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에스컬레이트되고, 결국 엄청난 비약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 어처구니없음, 그러면서도 그 안에 깔려 있는 만화가 자신의 진실한 고백이 독자를 그 열혈에 빠져들게 만든다.
“열심히 만들었다고 항상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이....세상은 혼을 담아 만들어 내는 것과 잘 팔리는 것과는 엄밀히 말해 별개. 그런 건 어찌되건 나와 상관없다!”는 말이나 “분명 만화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내용도 확실한 편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란 말을 듣고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열혈’에 동감할 수 없다. 『호에로 펜』의 재미는 바로 그것이다. 『호에로 펜』은 자신의 직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그 작업이 너무나 재미있고 즐거우면서도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작가의 자기고백이자 환상이다.
『호에로 펜』을 보고 있으면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만화가라는 인간형이 궁금하다면, 아니 자신의 직업에 즐거움이 빠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당장 『호에로 펜』을 펼쳐봐라. “만화 따위를 그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만화 따위를 그리고 있을 틈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린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의 자세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새겨야할 말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아무리 의미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에 즐겁게 헌신하는 것. 만화만이 아니라, 세상 역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1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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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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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gul
2019.06.15
놀러가서 사진은 엄청 찍는데 활용을 못하고...
곰손을 가진 저도 금손처럼 다이어리 꾸밀 수 있는 기회 만나고 싶습니다
1인 신청합니다
blueday333
2019.06.09
관심이 많습니다.작가님과함께 기록을
추억할수있는기회를주세요♡
1인신청합니다
마루찡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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